“데뷔는 언제 했나, 이런 질문은 안 물어볼 거지? 허허허.” 산전수전 공중전 두루 겪은 백전노장답게 박근형이 던진 농은 다소 긴장하고 있던 스튜디오를 무장해제시켰다. 청렴한 이미지로 차기 대권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지만 정치 비자금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교육부 장관(드라마 <앵그리맘>(2015)), 돈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사업가(드라마 <전설의 마녀>(2014~15)) 등 최근 그가 연기한 인물과 한참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오히려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익히 보아온 부드러운 ‘할배’ 그대로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봤나? <꽃보다 할배>에 나오는 ‘그 사람’은 배우 박근형이 아닌 보통 사람이다. <장수상회>의 성칠을 포함해 내가 연기한 캐릭터는 상상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 상상의 세계는 내가 만들었다. 사람들이 내가 연기한 인물을 보며 저럴 수도 있겠다고 동의해주면 족하다.”
성격이 지나칠 만큼 꼼꼼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버럭부터 발사하는 남자. 동네 재개발 계획에 유일하게 반대할 만큼 황소고집인 남자. <장수상회>에서 박근형이 만들어낸 세계, 성칠은 한마디로 깐깐한 남자다. 장수상회라는 동네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성칠 앞에 금님(윤여정)이라는 참한 여자가 나타나 그의 가슴을 뒤흔들어놓는다. 요즘 충무로에서 70대 남녀의 사랑을 다룬 소재가 흔치 않아서일까. 그는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옛 기억이 떠오를 만큼 설렜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길게 늘어선 나무 사이로 걸어오던 여학생이 생각났다. 좋아했던 친구다. 나중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 좋아했었다는 고백도 했다. (웃음) 시나리오에서 금님을 처음 만났을 때 딱 그런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데 그치는 최근 한국영화와 달리 <장수상회>는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형식의 서사라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자극적인 사건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큰 파도가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잔잔한 물결에서 큰 파도가 일어나는 것처럼 작은 감정들이 조금씩 구축돼 영화의 후반부에서 깊은 감동을 주는 영화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야 하는 주인공인 데다가 70대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흔치 않은 소재를 다룬 까닭에 박근형에게 <장수상회>는 “반가”우면서도 “도전”이었다고 한다.
영화 예고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마트 직원 유니폼을 입고 헝클어진 헤어스타일을 한 박근형의 모습은 다소 낯설다. 최근 출연했던 작품에서 포마드를 발라넘긴 헤어스타일과 정장 차림으로 빈틈없는 모습을 주로 보여줬던 그가 아닌가. 성칠을 표현하기 위해 외형적인 변화를 먼저 준 것도 그래서다. “내면은 상상을 통해 구축하고, 외면은 신체에 여러 변화를 주면서 표현한다. 외모에 가장 먼저 변화를 준 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백발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이 먹은 노인이라는 편안한 마음을 가졌다. 상상을 통해 구축한 진실성이 외형적인 변화를 만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전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역할을 극대화하면 극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재미를 더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배우의 연기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오랫동안 실천해온 역할 창조학 이론을 이번 작품에서도 굳게 믿었다. 처음으로 함께 호흡을 맞췄지만 “배우들이 놀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강제규 감독의 섬세함” 덕분에 그는 “안심하고 작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박근형이 과거 출연했던 작품의 대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현재 도전을 즐긴다는 사실은 꽤 유명하다. <장수상회> 촬영이 끝난 지 한참 지난 지금, 그의 머릿속은 현재 촬영하고 있는 조성희 감독의 신작 <명탐정 홍길동>으로 가득하다.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젊은 날 저질렀던 나쁜 행동들 때문에 복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숨어 사는 할아버지”다. 굉장한 세트와 독특한 분위기의 야외 촬영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 이야기가 아니라면서, 젊은 감독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으며 작업하고 있다고 한다. “먹고, 자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은 전부 현재 작업하고 있는 캐릭터만 생각한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런 걸 따지고 산다. 항상 앞만 보고 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연기가 웅덩이에 고이지 않고, 새롭게 전진할 수 있는 대배우의 비결이자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