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박찬욱]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감정교육
2015-04-20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박찬욱 감독

박찬욱 감독은 사진 찍기와 보기를 좋아하지만 본인이 찍히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가 <씨네21> 표지에 최다 등장한 (전업)감독이 된 오늘의 현실은, 전적으로 체념의 소산이다. “사진작가 입장에서도 일이니까요.” 물론 마지노선은 있다. 십수년 전 유망주로 묶인 김지운 감독과 나란히 신문사에 불려가, 둘이서 먼 하늘 소실점을 가리키며 그윽이 시선을 던지는 포즈를 주문받은 적이 있는데, 지금이라면 정중히 사양할 요청이다. 박찬욱 감독의 사진 수난사라면 <씨네21>도 결백하진 않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무렵, 효창공원에 청해 그네를 태우는가 하면 비둘기 떼를 그의 앞으로 몰아서 (오우삼 스타일로) 푸드덕 날렸던 표지가 있었다. 박찬욱 감독에게 매우 어색한 하루로 추억되는 이 표지는 공교롭게도 역대 최악의 오자(‘Cooming Soon!’)가 얹히면서 <씨네21>의 흑역사로 등재되기도 했다(찾아보지 마시라). 여하튼 산전수전 끝에 심상해질 만도 하지만 다시 <씨네21> 1000호 표지를 위해 새 영화 <아가씨>의 주연들과 카메라 앞에 선 박찬욱 감독은 배우들의 옷과 메이크업, 공간에 전에 없는 주의를 기울였다. 6월 중순 크랭크인하는 <아가씨>는 영화에 쓰일 의상도 스케치로만 존재하는 상태다. 태어나지도 않은 영화와 캐릭터의 ‘초음파 사진’을 본의 아니게 세상에 내보이는 형국이니 조심스러울 만도 하다.

<스토커>(2012) 이후 박찬욱 감독은 단편영화 <청출어람>을 만들고 시민과 외국인들이 찍은 영상을 재료로 서울시 프로젝트 <고진감래>를 박찬경 감독과 완성했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받은 서부극 시나리오를 고쳐 쓰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 정밀한 소녀 성장담이었던 <스토커>가 남긴 여운의 반작용으로, 거친 남자들이 우글대는 영화가 동했기 때문이다. 각색 결과는 흡족했지만, 투자자의 청사진과 조율 불가능한 격차가 확인됐다. 오랫동안 ‘보류’ 서랍에 들어 있는 <도끼>의 리메이크는 여전히 예산의 적정선을 모색하는 중이다. 그래서 돌아와 다시 마주앉게 된 영화가 “이번 순서만은 피하고 싶었던” <아가씨>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스토커>를 잇는 박찬욱표 여성 성장영화가 예정보다 일찍 3부작을 완결하는 셈이다.

<아가씨>는 <올드보이>(2003)의 프로듀서 임승용 대표가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박찬욱 감독에게 권하며 시작됐다. 원색의 통속적 재미가 만발하는 이 소설이 샐리 호킨스와 일레인 캐시디가 주연한 <BBC> 드라마 <핑거스미스>(2005)를 제외하면 영화화된 적 없다는 사실은 약간 미스터리다. 2012년 판권을 획득한 박찬욱 감독은 <스토커>의 런던 프리미어에 세라 워터스 작가를 초대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자그맣고 단단한 사람, 단아하게 나이 든 여인이라는 인상을 남긴 워터스는 영화에 대해 특정한 당부를 남기지 않았다. 1860년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무대인 원작 <핑거스미스>는 큰 계략 안에서 움직이다 마주친 두 여자의 이야기다. 책의 주인공인 수잔과 모드는 온갖 적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마저 거슬러- 서로를 불가피하게 발견하고 사랑에 휩쓸린다. 아니, 사랑이 그들을 누르고 기어오른다. 가까워져야 하지만 오직 허락된 만큼만 다가갈 수 있는 관계. 용인된 방식을 넘어서면 파국을 부를 감정. 이것은 <박쥐>(2009)의 신부 상현(송강호)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 <스토커>의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가 품은 삼촌을 향한 애증에서도 발견되는 딜레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다. <올드보이>와 동명 만화, <박쥐>와 <테레즈 라캥>의 함수관계를 돌이켜봐도 박찬욱 감독이 원작에서 취하는 바는 온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계기와 시추에이션이다. <아가씨>는 강제 합병 후 20년이 지난 식민지 조선으로 이야기를 옮긴다. 영화의 삼인조는 귀족 상속녀(김민희)와 그녀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하정우), 그리고 백작의 소개로 아가씨의 하녀로 들어가는 소녀(김태리)다.

2015년 4월 초 현재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가씨>를 생각할 때 감독의 머리에 처음 떠오르는 그림, 이를테면 섬네일 이미지는 무엇일까? 박찬욱 감독은 잠시 사이를 둔 후 고른다. “두 여자가 침대에 모로 누워 마주보고 대화하는 모습이에요. 내용은 영문 모르는 사람이 앞뒤 맥락을 자르고 들으면 순진한 처녀들의 대화로 이해할 수도 있죠. 둘의 말에는 거짓말이 섞여 있지만 저도 모르게 진심도 튀어나와요. 상대에게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이 동시에 일어 복잡해지죠.” 대사 쓰기가 보통 난해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하는데, 박찬욱 감독이 확인해준다. “내 영화 가운데 대사가 제일 많을뿐더러 가장 중요한 작품이에요. 전작들에서는 꼭 필요치 않은 궤변 같은 대사도 다른 재미를 얻기 위해 썼지만 <아가씨>는 좀 다른 경우가 될 거예요.” 좋은 대사를 쓰는 능력과 소녀의 심리에 밝은 눈을 지닌 정서경 작가(<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는, 감독으로 하여금 <아가씨>에 대시하도록 힘을 준 ‘믿는 구석’이었다. 연인을 가로막는 장애야말로 러브 스토리의 촉매라는 고전적 의견을 수용한다면 <아가씨>는 가시밭에서 피어나는 붉고 쓰라린 드라마가 될 자질이 있다. 사랑이 더할수록 죄의식이 가중되는 혹독한 설정을 바탕으로 계급, 성별, 나이, 출신 문화의 다양한 간극이 인물 사이에 겹겹의 골을 파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가씨>의 1930년대가 갖는 의미가 있다. 예컨대 <아가씨>의 1930년대는 나치 군인과 점령지 여성의 비운의 사랑을 그린 2차대전 멜로에서 흔히 보아온 것 같은 민족적 갈등을 제공한다기보다 봉건과 근대, 다국적 문화가 조선에 혼재한 이행기라는 속성에 극적인 중요성이 있다. “이 시대에 일본 문화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일본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양, 즉 근대가 유입됐다는 뜻이죠. 유럽식과 일본식, 한국적 양식이 완전히 융합되지 못한 채 갖다붙이듯 섞여 있는 양상이, 눈에 보이는 의복과 건축은 물론 이 집안에서 행해지는 생활양식에서 보일 거예요.”

이제 곧 사라져갈 봉건의 잔재, 상전과 몸종이라는 신분은 <아가씨>의 에로티시즘에 중요한 기제가 될 법하다. 옷을 입히고 벗기고 머리카락을 손질해주는 일상적 행위에서 발생하는 관능적 접촉이 있을 터다. 성적 억압이 강력했던 빅토리아 시대를 다룬 <핑거스미스>에서 중요했던 페티시즘은 <아가씨>에 이르러 어떻게 변용되고 대체될까. “‘정말 지금부터 성행위가 시작되는 거야?’ 하는 식으로 표현되진 않을 거예요. 대화의 연장으로서 정사라는 표현이 적당할 거예요. 원래는 업무인 시중 들기의 일부였다가 그 순간만큼 계급을 벗어나 동무가 되는 거죠. 누가 누구를 유혹한다거나 정체성을 확신해서 시작되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방을, 감각을 서서히 발견하는 상황이기에, 이 영화의 에로틱한 장면은 대화의 연장이자 교육의 연장이며 성장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감미로운 음악과 조명 아래 카메라가 흐르듯 미끄러지고 디졸브로 연결되는 신이 아니라 상대를 보살피고 돌봐주며 서로 성장을 돕는 행위에 가깝죠.”

레즈비언 관계가 한국 주류영화가 명시적으로 다룬 적이 드문 제재라는 사실이 낳는 별스런 긴장은 없을까? 박찬욱 감독은 덤덤하다. “이슈를 제기하려고 기획한 영화가 아니라 좋은 스토리를 찾다 만난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이야기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민감한 요소가 포함돼 있다고 해서 회피하거나 변경하려고 하지 않을 뿐이에요.”

3D로 찍고 싶었다

코끼리 더듬기를 넘어서기 무망한 내용 탐문을 그만두고 <핑거스미스>에서 박찬욱 감독이 감지한 영화적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이 무엇인지 물었다. “관점을 바꿔서 다시 볼 때 온전한 진상이 밝혀지고 퍼즐이 완성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전작들을 회상해보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구조가 연상되는 대답이다. “그렇죠. <공동경비구역 JSA>는 수사하는 인물을 따라가며 여러 증언을 접하는데, 이 이야기는 행위 당사자의 시점을 따라가다 서사가 교직되는 방식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기분이 있었어요.” <아가씨>에서 시점이 갖는 함의와 관련해 솔깃한 대목은, 3D로 제작할 것을 고려했다는 뜻밖의 일화다. “SF 액션 장르가 아닌 3D영화를 해보고 싶었어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있긴 했지만 그 작품도 판타지 어드벤처라는 요소가 있었잖아요. 3D를 통해 두 시점 숏의 차이를 보다 분명히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처음에는 입체영화 아니면 싫다고 고집했죠. 그런데 결국 예상되는 등급과 시대 재현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예산의 압박이 커져 3D를 포기했어요.” 시나리오는 2D 촬영을 전제로 씌어졌지만 시점 숏은 여전히 <아가씨>를 규정하는 중요한 형식일 거라고 박찬욱 감독은 예상한다. 다만 <아가씨>의 시점 숏은 몸이 아니라 마음의 동세를 따라가는 시점 숏이라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 복도를 따라가며 흔들리는 역동적 시점 숏이 아니라 이를테면 여럿이 앉아 있는 방에서 공모자의 옆얼굴에 던지는, 때로는 욕망에 따라 동일한 풍경에서 상이한 진실을 보는 시야의 숏일 거라고 감독은 짐작한다. 듣고 있자니 고요한 시점 숏들로 구획된 보이지 않는 밀실과 감정의 회로가 그려진다.

은밀한 시선의 방을 지어갈 세명의 캐릭터 중 아가씨와 하녀는 원작과 달리 아가씨쪽이 연상으로 설정됐다(소설 속 수잔과 모드는 동갑이다). 두 또래 소녀를 두명의 신인배우가 연기하는 안도 고려했지만, 계급, 출신 문화와 아울러 둘을 대비시킬 수 있는 속성을 보태는 편이 맞다는 결론이었다. 그럼 두 여자 중 하녀가 아닌 아가씨를 연상으로 정한 데에는 어떤 고려가 작용했을까?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재미있는 결과였지만 하녀를 나이 어린 쪽으로 결정한 까닭은 그녀가 나름 저잣거리에서 굴러 세상물정을 잘 안다고 과신하는 아이이기 때문이었어요. 본인은 그렇게 믿지만 관객이 보기에는 저래 가지고 잘될까 싶고 걱정되는 편이 흥미진진할 테니까.”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인터뷰에서 피해갈 수 없는 캐스팅 질문을 던지려는데 마침 촬영 준비를 마치고 집게핀을 꽂은 배우들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한다. 사뿐사뿐 눈으로 말하는 김민희, 신인이라 긴장할 법도 한데 마실 나온 양 슬리퍼를 끌고 유유자적한 김태리, 완벽한 개화기 신사의 차림새로 쑥 들어와서는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는 감독에게 족욕의 효능을 혹하게 설명하는 싹싹한 하정우.

김민희의 캐스팅 소식을 접하고 처음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그녀의 대체 불가한 음색이었다. 원작에서 모드는 내키는 대로 고함을 지르는 자유분방한 꼬마로부터, 귀를 희롱하는 낭독자로 훈련된다. 현악기에 대뜸 활을 긋듯 예기치 못한 주파수로 듣는 이의 심경을 흔들어놓는 김민희 특유의 발성으로 여사여사한 장면이 연출된다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은 시나리오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멋대로 누린 즐거움이었다. 아가씨 역 김민희의 진가를 박찬욱 감독이 처음 알아본 영화는 <화차>다. 하지만 얼마 전에 뒤늦게 보았다는 2007년작 <뜨거운 것이 좋아>가 준 감흥이 한층 생생했다. “<뜨거운 것이 좋아>를 개봉 당시 봤더라면 즉시 반했을 거예요. 목소리도 말투도 그야말로 무심한 듯 시크한 매력이 있고(웃음) 코믹한 순간을 탁 포착하는 센스도 뛰어나더라고요.” <아가씨> 출연배우 명단을 접했을 때 기자는 막연히 경력 있는 배우가 하녀 역일 거라고 짐작했다가 놀랐더랬다. 김태리라는 미지의 얼굴에서 감독이 발견한 힘은 무엇일까? 그녀의 무엇이 다른 후보와 견주어 상대적으로 캐릭터에 적합했을까? “우선 눈이 맑고 시원해서 끌렸어요.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양한 감정과 사연을 전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눈이죠. 오늘은 화장을 해서 덜 보이지만 자연스러운 얼굴의 아름다움도 좋았어요. 성격이 차분하고 긴장을 잘 하지 않았어요. 허황된 욕심도 없고 영리해요. 말의 뜻을 금방 이해하는데 할 말은 거리낌없이 해버리죠.”

<아가씨>의 백작 캐릭터에 해당하는 원작의 젠틀맨은 여자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홀랑 넘어오게 하는 미남 달변가다. <BBC>판 <핑거스미스>에서도 젠틀맨 역은 로맨틱한 외모의 루퍼트 에반스가 연기한 바 있다. 한편 완급과 강약을 조절하며 뭇 사람을 홀리는 설득력은 리듬감 빼어난 배우 하정우가 일찍이 <용서받지 못한 자> <멋진 하루>에서 선보인 자질이다. “조각 같은 외모보다 태도와 표정이 남에게 주는 즉각적 호감이 백작 캐릭터에 필요한 자질이에요. 물론 정우씨도 충분히 미남이지만, 자신을 꾸미는 법과 매너가 더 중요하죠.” 박찬욱 감독은 호감과 설득력을 아우르는 속성을 ‘귀여움’이라는 단어로 함축했다. “하정우씨를 전부터 종종 사석에서 보면 사람이 귀염성이 있었어요. (웃음)” 박 감독이 제일 좋아하는 하정우의 영화가 <멋진 하루>라는 사실은 이 발언의 훌륭한 보충설명이 된다. “이윤기 감독과 하정우가 만든 그 남자는 한국 영화사에 기억될 만한 남성 캐릭터인 것 같아요.”

이야기를 움직여가는 여자들

<아가씨> 제작 캠프에는 <올드보이>부터 <스토커>까지 5편을 감독과 함께 찍은 정정훈 촬영감독, <올드보이> <쓰리, 몬스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를 디자인한 류성희 미술감독 등 ‘유주얼 서스펙트’들이 소집됐다. 2.35:1 화면비율에 좌우공간이 넓게 담기는 아나모픽 렌즈로 촬영될 예정이라 미술부와 촬영부가 자못 긴장할 만도 하다. 얼마 전 촬영감독, 미술감독과 더불어 일본 로케이션 답사를 마친 박찬욱 감독은 아오모리와 나고야를 돌아본 끝에 아가씨의 집 외관에 적합한 장소를 나고야에서 점찍었다. 여름 내내 진행될 <아가씨>의 촬영은 70%가량 실내 세트에서 이뤄질 예정이다. 한편 조상경 의상팀장은 옷을 통해 계급과 문화는 물론 관능성까지 표현해야 할 과중한 업무를 짊어졌다. “설득하느라 애먹었어요.” 그녀를 합류시키는 데에 성공한 박찬욱 감독이 안도를 담아 덧붙인다. 의상과 장신구의 세부를 논하기에 앞서 감독이 일단 해야 할 기본 작업은 복식의 배정이다. 남녀 인물 모두가 한복, 기모노, 양장을 다 입을 수 있는 시대이기에 누가 몇번 신에서 어떤 국적의 옷을 입는지부터 결정해야 한다. 전통적 코스튬 드라마처럼 관객에게 현란한 옷장 구경을 시킬 의도는 없지만, 자주 갈아입다보면 불가피하게 눈을 끌 수는 있을 거라고 감독은 말한다. “한복, 기모노, 드레스도 각기 계급별로 세분화되고 옷 입는 규범과 경우도 다양하잖아요. 아침에 입는 옷, 혼자 방에 있을 때의 옷, 손님을 맞을 때 옷이 다르다보니 자주 갈아입을 수밖에 없죠. 과시하듯 연출되지 않게 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인터뷰를 마친 박찬욱 감독이 당장 돌아가 돌입해야 할 작업은 스토리보드의 구체화다.

구(舊)서울역사의 곳곳을 돌며 진행된 촬영과 인터뷰는 주차장 한쪽의 분장실에서 끝났다. 토막토막 끊어진 대화를 한 호흡으로 복기해보려고 애쓰며 노트북을 주섬주섬 챙기다 문득 박찬욱 감독에게 물었다. “성에 갇힌 공주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게 아닐까요?” 박찬욱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에서 딸이 서사를 유도하는 등대라면, 여성 성장 3부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토커> 그리고 <아가씨>의 ‘딸’들은 이야기를 움직여가는 주동자다. 여기에 <박쥐>의 태주(김옥빈)까지 불러오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 박찬욱 근작은 성에 감금된 여성이 탈출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도 있다. 구경꾼의 관찰을 듣는 박찬욱 감독의 반응은 언제나처럼 뭉근했다. “오, 그런가?” 그러나 내 작은 경험에 기대 말하자면, 박찬욱 감독은 얼핏 의례적 리액션 같아 질문자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대꾸 뒤에서 실제로 곰곰이 생각하곤 한다. 긴 사이를 두고, 그가 입을 열었다. “영락없이 <박쥐>도 그런 요소가 있네요. 범위를 넓혀보면 <친절한 금자씨>도 과거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여자였고. 비록 영화는 출감 장면에서 시작하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그 영화가 다른 종류의 감옥을 다루는 이야기라는 점을 웅변하는 설정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다섯 번째 비슷한 이야기를 해오고 있는 셈인가요.”

헤어 & 메이크업 정지호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