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동그랗게 뜬 ‘아가씨’가 서울역사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분장받는 공간이 좁아서, 전환도 할 겸 구경나왔어요.” 아직 준비가 덜 된 탓에 머리에는 굵은 집게핀을 꽂고 슬리퍼를 신은 김태리의 시선은 이미 촬영을 진행 중인 김민희에 머물러 있다. 오래된 역사의 고풍스러운 공간에서 지금 막 걸어나온 것 같은 우아한 옷차림의 김민희와, 자신의 눈빛이 방해가 될 새라 벽 너머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지켜보는 김태리를 보며 영화 속 그들의 조합을 짐작해본다. “좋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김민희) 언니를 처음 만났는데…. 너~ 무 예쁘고, 너~ 무 사랑스럽고, 정말 소녀 같아요, 언니는! 저에게도 전혀 거리감 없이 대해주셔서 만날 때마다 제가 ‘치근덕’거리고 있어요. (웃음)” <연애의 온도>의 김민희를 본 뒤 <뜨거운 것이 좋아>와 <화차>를 보며 그녀를 “파기” 시작했고, <아가씨>의 오디션 과정에서도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에 “김민희 배우님”이라고 답했던 김태리에겐 김민희와의 만남이 마냥 신기하고도 즐거운 우연이다.
귀족 아가씨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에게 고용돼 아가씨의 저택에 하녀로 들어가게 된 소녀. <아가씨>에서 김태리가 연기하게 될 인물이다. 그녀가 세라 워터스의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의 수잔과 다르게 느껴지는 지점은 ‘모성애’에 있는 것 같다고 김태리는 말한다. “극중 하녀의 나이가 열일곱살이에요. 굉장히 어린 나이인데 자기가 세상물정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숙하고 귀여운 아이 같아요. 그런데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에게 모성애가 발동하는 거예요.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강하게 드는 거죠. ‘하녀’는 아가씨에 대한 모성애와 그런 아가씨를 이용하려고 하는 백작에 대한 미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 같아요. 아이고, 에둘러 말하기 너무 힘들다. (웃음)”
1500 대 1. <아가씨>라는 작품을 만나기 위해 신인배우 김태리가 돌파해야 했던 난관이다. 수차례의 오디션을 거치며 부담감은 점점 늘어갔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조용하게, 차분하게 임하자”라고 마음먹었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고 그녀는 말한다. 영화 촬영 경험이 전무한 그녀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오디션에 지원한다는 건 “과한 욕심”이라고 생각해 한때 소속사의 오디션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지만, 박찬욱 감독의 한마디에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감독님을 뵙고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저라는 사람은 자신이 있지만, 저의 실력에 대한 자신은 없어요. 괜찮으시겠어요?’라고. 감독님이 한참 생각하시더니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네가 하겠다면, 나는 너랑 할 거라고. 감독님만 믿고 <아가씨>에 참여하게 됐어요.”
스물여섯살. 신인배우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다. “중학생 때는 선생님, 고등학생 때는 미술가, 대학생 때는 아나운서가 되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딱히 꿈이랄 게 없었다”고 말하는 김태리에게, ‘배우’라는 꿈은 <아가씨>가 그랬듯 운명처럼 그녀를 찾아왔다.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재학 중에 “즐거운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과 내 연극동호회에 들어갔던 그녀는 대학교 2학년 때 올렸던 연극 무대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닐 사이먼의 <굿 닥터>라는 작품 중 <오디션>이라는 에피소드였어요. 한 아이가 시골에서 끙차끙차 올라와 존경하는 작가 선생님에게 오디션을 받는 내용인데, ‘선생님,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하고 긴 독백을 해 보이는 거죠.” 무대와 관객과 박수 소리가 좋아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이제 배우로서 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딘가에 정말 살고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을 연기하고 싶다”는 이 신인배우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