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열렸던 <아가씨>의 제작사 용필름 송년모임에서 김민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가씨>에 막 캐스팅됐기 때문일까. 그는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박찬욱 감독의 곁을 지키며 그의 말을 경청했고, 술자리에 있었던 그 누구에게도 그들의 대화에 낄 틈을 주지 않았으며, 덕분에 시끌벅적한 술집에서 두 사람의 자리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김민희가 박찬욱 감독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게 됐다는 소식이 영화계 안팎에서 화제가 됐던 때다. “박찬욱 감독님의 신작이라는 사실이 출연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냐고? 내가 뭐라고…. (웃음) 그저 그의 작품에 출연하게 된 것만으로도 행운이자 감사한 일”이라는 게 김민희의 겸손한 출연 소감이다. 불과 4개월 전의 일인데 촬영을 두달 앞둔 지금, 김민희는 그때가 까마득하다. “그 이후로 (김)태리씨, 박 감독님과 많이 만났다. 그런데 배우, 스탭 첫 미팅이 있던 지난주 하정우 선배와 처음 만나 식사를 하니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준비할 게 많은데 곧 촬영이라고 생각하니 시간이 좀 부족한 게 아닌가 걱정부터 앞선다. (웃음)”
<아가씨>에서 김민희가 맡은 역할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귀족 아가씨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김민희는 아가씨가 “너무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인물의 행동과 대사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고, 인물이 가진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아가씨>의 원작 소설인 <핑거스미스>를 읽어본 사람들은 김민희가 연기할 아가씨에 해당하는 주인공 모드가 우여곡절 많은 성장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여배우라면 누구라도 평탄치 않은 여성 모드의 삶에 홀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물론 김민희는 “원작 소설을 읽진 않았”다. “대신 <BBC>가 제작한 3부작 드라마 <핑거스미스>(2005)를 챙겨봤다. 이 드라마와 비교했을 때 <아가씨>는 캐릭터가 훨씬 풍부하고, 박찬욱 감독님의 스타일이 많이 반영됐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촬영까지 남은 두달 동안 김민희는 아가씨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중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건 일본어 공부다. 1930년대 한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인 데다가 한국어와 일본어 대사를 둘 다 해야 해서 일본어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캐스팅된 뒤로 지금까지 매일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 촬영하기 직전 외양에도 변화를 줄 계획이다. “1930년대 유행했던 헤어스타일로 변신해 당시 분위기를 낼 예정이다. 체형? 감독님께서 지금 상태가 적당하다고 하셨다.” 그간 박찬욱 감독과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그랬듯이 김민희 역시 박찬욱 감독이 추천해준 영화와 클래식 음악을 접하며 영화의 스타일을 미리 익히고 있다. “나루세 미키오,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작품들을 접하게 됐고 슈만, 슈베르트, 뒤티외 같은 낭만적이고, 악기끼리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실내악이나 소편성 앙상블 음악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물론 추천받은 영화와 음악은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일 뿐이다. “꼭 원작을 봐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변영주 감독님의 <화차>(2012) 때도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 <아가씨> 역시 시나리오에 충실하려고 한다. 아가씨라는 캐릭터를 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김민희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 촬영을 끝냈다. 최근 박찬욱, 홍상수 등 한국의 거장 감독들이 그를 찾는 건 그가 배우로서 특별한 영감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민희는 그 얘기가 싫지 않은 듯했다. “음… 감독님들에게 평생 영감을 주는 배우로 남고 싶다. 부담감이 크지 않냐고? 전혀. 잘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