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슨의 얼굴은 정직하다. <보이후드>에서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의 얼굴은 개인의 역사가 기록되는 영화적 공간이다. 메이슨의 얼굴 위로 12년의 시간이 지층처럼 쌓여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아름다운 영화적 경험이다. <보이후드>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 속 얼굴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오늘날 트뤼포와 앙트완의 우정은 과거의 낭만이 되어버렸다. 영화에서 배우의 얼굴은 더 이상 아날로그적으로, 수공예의 방식으로 시간을 기록해나가는 역사적 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장술과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은 얼굴의 시간을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한 편의 영화에서 배우의 현재 모습과 노인이 된 모습을 동시에 만나는 일은 흔한 일이 되었다. 메이슨이나 앙트완처럼 한 감독의 영화 세계 안에서 배우가 성장하고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조우하는 일은 이제 희귀해진 경험이다. 대신 슈퍼 히어로 시리즈가 멀티플렉스를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감독이 아니라) 영화산업과의 공고한 관계 속에서 (늙지 않을 뿐 아니라) 불멸하는 캐릭터를 목도하게 되었다.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는 배우보다 캐릭터의 존재가 강력하다. 최근 마블 스튜디오가 소니픽처스와 파트너십을 체결하면서 <스파이더맨>의 주연배우가 앤드류 가필드에서 아사 버터필드로 교체된 것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우리는 스파이더맨을 포함해 개별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계보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물론 캐릭터를 뛰어넘어 배우의 얼굴을 각인시키는 사례가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는 히스 레저의 죽음 이후에도 조커의 영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DC 스튜디오가 제작 중인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자레드 레토가 차기 조커를 연기한다). 이곳에서 대체 불가능한 것은 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캐릭터이다. 최근 몇몇 영화가 슈퍼 히어로가 스크린을 점령한 현실을 근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가령 <버드맨>. 혹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대본을 받자마자 배경이 지구인지를 가장 먼저 묻는 줄리엣 비노쉬의 피곤한 목소리. 자크 오몽이 <영화 속의 얼굴>에서 얼굴의 해체를 다루었다면, 이제는 얼굴 자체의 상실에 대해 말할 때가 온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여전히 얼굴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얼굴과 정체성의 미끄러지는 관계들, <내가 사는 피부>의 인공피부, <엉클 분미>의 붉은 눈의 비인간으로 대체된 인간의 형상, <언어와의 작별>의 해체된 시선과 양쪽 망막에 맺히는 서로 다른 얼굴들. 그렇다면 오늘날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동시대의 얼굴을 사유하고 있을까. 우리는 스크린에 비친 또 다른 우리의 얼굴들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최근 도착한 세 편의 영화 <홀리 모터스>, <맵 투 더 스타>, <언더 더 스킨>은 이에 대한 서로 다른 세 개의 영화적 답변이다.
먼저 레오 까락스 감독의 <홀리 모터스>. <홀리 모터스>의 주인공 오스카(드니 라방)는 하루 동안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며 아홉 개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는 차례대로 걸인, 모션캡처 배우, 광인, 딸을 태운 택시기사, 암살자, 죽어가는 노인이 된다. 영화의 후반부 리무진을 운전하는 셀린(에디뜨 스꼽)은 오스카에게 마지막 스케줄이 적혀 있는 서류를 전해준다. 서류에는 “당신 집”이라고 쓰여 있다. 우리는 오스카의 연기가 퇴근 후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스카가 퇴근 후 도착한 집은 영화 초반 그가 출근했던 집이 아니다. 이번에는 그가 출근 전부터, 셀린으로부터 아홉 개의 스케줄을 받기 전부터 이미 연기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스카의 연기는 셀린이 말한 아홉 개의 스케줄 너머로 확장되고 현실과 연기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따라서 아홉 개의 스케줄 중 글에서 아직 언급되지 않은 하나의 연기가 옛 연인과 재회하던 오스카였는지 혹은 다른 무엇이었는지를 구별해내는 것은 중요치 않다. 이곳은 이미 입구와 출구가 지워진 세계이다.
입구와 출구가 지워졌다는 표현은 은유가 아니다. 연기가 현실을 <홀리 모터스>의 세계에는 죽음을 위한 자리가 없다. 암살자를 연기하는 장면에서 오스카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테오를 죽인다. 테오 또한 오스카를 죽인다. 피바다가 된 바닥에 오스카와 테오가 쌍둥이처럼 나란히 쓰러져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둘 중 하나가 비틀거리며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우리는 살아서 돌아 온 사람이 오스카인지 테오인지 알 수 없다. 혹은 건물 안에 남겨진 이(오스카 혹은 테오)가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이 문장은 영화가 그(들)의 생사 여부를 중요치 않게 생각한다는 말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이십년 만에 재회한 오스카의 옛 연인은 이십분 뒤에 자살하는 스튜어디스를 연기해야해서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녀는 이십분 뒤에 건물에서 뛰어내린다.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그녀의 움직임에는 망설임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죽음을 사무적으로 대한다. 죽음은 그녀가 소화해야하는 연기들의 일부일 뿐이다. 다시 한 번, 이 문장은 인물이 자신의 죽음을 개의치 않는다는 말로 바꿔 읽어도 될 것이다. 영화에서 죽음을 걱정하는 존재는 따로 있다. 바로 엔딩에 등장하는 리무진들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 온 리무진들 중 하나가 “잠이야 조만간 평생 잘 텐데 뭘. 우리도 곧 폐차장으로 밀려날 거야. 곧 쓰레기가 될 텐데”라고 말하자 모두들 죽음을 근심하며 술렁인다. 이 죽음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가 필요하다.
<홀리 모터스>는 얼굴이 거래되는 세계다. 오늘날 우리는 산업 자본주의에서 문화 자본주의로, 현실공간에서 가상공간으로, 소유에서 접속으로 이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제레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접속의 시대에는 인간 문화가 상품의 영역으로 포섭되고 경험과 이미지가 거래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틀은 <홀리 모터스>에서도 유용하다. 설명을 위해 짚고 넘어갈 장면이 있다. 오스카가 리무진에서 뛰쳐나가 식사 중인 남자를 총으로 쏘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살해당하는 사람은 오스카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오스카가 아침에 리무진을 타기 전에 연기했던 부유한 은행원이다(동일한 양복, 동일한 넥타이, 동일한 헤어스타일). 오스카는 은행원을 죽인 뒤 “드디어 정리됐군”이라고 말한다. 정리되었어야 하는 것이 미처 정리되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누군가 은행원을 연기하기 위해 은행원을 연기했던 오스카의 얼굴로 분장했고, 이것은 일종의 오류이기 때문에 오스카는 리무진 창밖으로 아직도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은행원을 보자마자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급히 뛰쳐나갔다. 여기에는 하나의 얼굴과 세 명의 인물이 뒤섞여 있다. 오스카, 은행원, 오류가 있어 오스카의 얼굴로 은행원을 연기하는 또 다른 연기자. 혹은 하나의 얼굴과 두 명의 인물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은행원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연기자들의 연기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이다. 어느 경우든 은행원은 자신의 얼굴을 갖고 있지 않다. 적어도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 안에서 은행원이라는 (가상의) 인물은 자신의 얼굴을 소유하는 대신 연기자의 얼굴에 접속함으로써 존재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스카를 비롯한 연기자들은 자신을 대여해주고 그/그녀가 되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
스스로를 대여한다는 점에서 오스카와 리무진은 유사하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재밌는 점은 우리가 리무진을 대여하지 실제로 소유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리무진을 대여함으로써 이를 자신의 아바타로 삼고, 자신이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 되는 것 마냥 아바타 놀이를 즐긴다”라고 말했다(<씨네21 892호>). 물론 오스카는 아바타 놀이를 하기 위해 리무진을 타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리무진은 하나의 역할에서 다음 역할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정류장과 같은 공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리무진은 죽음을 근심할 수밖에 없다.
감독이 일종의 유머처럼 삽입한 엔딩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리무진들이 걱정하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폐차로 인한 물리적인 죽음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소유물과 달리 접속의 대상은 쉽게 대체가 가능하다. 소유는 항구적이지만 접속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지금 소유한 자동차보다 성능이 좋은 자동차가 나왔다고 해서 바로 구매하기는 어렵지만 오늘 렌트한 자동차보다 마음에 드는 자동차가 있으면 다음 날 그것을 렌트하면 된다. 연기자들은 리무진보다 값싸고 편리하며 그 안에서 분장 가능한 이동수단이 나온다면 리무진을 타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큰 기계를 원치 않아”라고 말하는 리무진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리무진들은 자신들보다 작은 기계가 나올 미래를 두려워한다.
오스카는 딱 한 번 리무진과 비슷한 종류의 근심을 내비친 적이 있다. 오스카가 암살자 연기를 마치고 리무진으로 돌아왔을 때 한 남자가 그를 찾아와있다. 그는 오스카에게 "여전히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세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저희가 보기에 요즘 좀 피곤해 보여서요. 이제 못 믿겠다는 불평이 들어와서요"라고 말한다. 오스카는 “대체 누가 그래요? 젠장”이라고 욕을 한다. 우리는 오스카의 얼굴, 그의 연기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가 예전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스카가 답한다. “카메라 때문이에요. 옛날에는 정말 육중했는데 우리 머리보다 작아지더니 이제 보이지도 않잖아요.” 여기서 카메라의 의미보다 중요한 것은 남자와의 대화가 기술의 진보로 인해 언젠가 오스카가 직업을 잃게 될 것임을 징후적으로 예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과가 끝나고 퇴근하는 장면에서 오스카의 집과 똑같이 생긴 집들이 길을 따라 끝이 안 보이게 늘어서 있다. 이 장면은 똑같이 생긴 리무진들이 줄을 맞춰 주차된 영화의 엔딩과 겹쳐진다. 동일한 집들, 동일한 리무진들은 오스카와 리무진의 대체 가능성을 암시한다. 타인을 연기 중일 때의 오스카는 자신의 물리적인 죽음을 신경 쓰지 않지만 오스카 자신으로 존재하는 오스카는 연기자로서의 존재론적인 죽음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오스카가 근심하는 후자의 죽음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초반에 살펴보았듯이 오스카의 연기는 출근 전과 퇴근 후에도 계속된다. 오스카의 삶은 연기의 연속이다. 그의 삶은 그의 것이 아니다. 실제로 리무진 안에서 분장 중인 오스카가 바깥세상을 가상 세계처럼 인식하는 장면들이 있다. 오스카가 창문 밖을 바라보면 창문 밖의 풍경이 실사 게임 화면, 야간 투시경 화면, 열적외선 촬영 화면으로 나타난다. 오스카에게 세상은 일종의 가상 세계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스카에게는 연기 중인 개별 얼굴 하나의 죽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연기할 수 없게 되는 사태야말로 진정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의 삶이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죽음도 그의 것이 아니다. <홀리 모터스>는 자신의 얼굴로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 하는 얼굴들의 디스토피아에 관한 영화다.
그렇다면 반대로 오늘날 자기 자신의 얼굴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자기 얼굴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맵 투 더 스타>는 이에 대한 하나의 영화적 답변이다. <맵 투 더 스타>의 기본 서사는 애거서(미아 와시코브스카)의 가족 안에서 숙명적으로 반복되는 남매간의 사랑이다. 하지만 <맵 투 더 스타>에서 근친상간의 테마보다 흥미로운 것은 거미줄처럼 얽히며 파멸로 치닫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이야기다. 그 중에서도 영화 출연을 욕망하는 하바나(줄리언 무어)의 얼굴은 오스카의 얼굴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녀의 직업 또한 배우다. 하지만 오스카와 하바나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할리우드의 중견 배우인 하바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혹은 당했다고 믿는)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다. 그녀는 오래 전 어머니 클라리스(사라 가돈)가 주연한 <스톨른 워터>의 리메이크작에 출연하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다. 어머니가 맡았던 배역을 연기함으로써 어머니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영화 출연에 집착하면서 하바나는 어머니의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영화 속 그녀의 일상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영화 출연을 위해 주변 감독이나 동료 배우들을 설득하고 정보를 모으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환영을 보지 않기 위해 강도 높은 테라피 치료를 받거나 요가를 하는 것이다(번외로 환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추가할 수도 있겠다). 하바나는 주연에 대한 욕망과 재기에 대한 열망, 어머니와의 대결을 끝내고자 하는 갈망에 휩싸여 있다.
하바나의 얼굴은 영화 내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 들끓는다. 가령 하바나는 조바심 어린 얼굴로 영화에 출연할 수 있도록 힘써달라고 동료를 설득하던 중, 아지타 와텔(제인 헤이트마이어)이 물망에 올랐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시기 어린 얼굴로 아지타를 험담하는데 열을 올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바나는 아지타의 출연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눈을 감은 채 아지타에 관한 음성메시지를 듣는 하바나의 얼굴은 서서히 감정으로 끓어오르다 일순간 용암처럼 폭발한다. 이후 아지타를 만난 하바나는 영화 출연을 축하해준 뒤 젊은 시절의 클라리스 역할은 누가 맡았냐고 자연스럽게, 그러나 질투심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묻는다.
아지타의 아들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시퀀스에서 하바나의 욕망하는 얼굴은 클라이맥스에 달한다. 사고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 하바나의 얼굴, 아지타 대신 주연을 맡게 될 수도 있다는 귀띔에 반신반의의 기대가 깃드는 얼굴, 이내 손사래를 치며 “아지타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라고 말할 때의 얼굴, 결국 영화에서 가장 흥분된 표정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마이카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얼굴은 짧은 시퀀스 안에서 서로 충돌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개별 표정이나 감정이 아니라 욕망하는 하바나가 만들어내는 상반된 얼굴들 그 자체이다.
하바나의 얼굴에 관해 말하기 위해 그림 한 점을 경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자크 오몽은 마르셀 뒤샹의 미래파적인 작품 <기차를 탄 슬픈 청년>의 해체된 얼굴에서 “슬픔으로부터 만들어진 여러 얼굴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서로 무관한 얼굴들의 순간적인 증식”을 읽어냈다(<영화 속의 얼굴>). 이 표현을 비틀자면 우리는 하바나의 얼굴에서 욕망이 만들어낸 여러 얼굴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서로 충돌하는 얼굴들의 연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바나의 개별적인 얼굴들은 모두 대문자 하바나의 욕망에 예속되었다. 더불어 그녀가 보여준 일련의 얼굴들, 조바심, 질투, 부러움, 낙담, 절망, 애도, 환희의 얼굴들은 모두 진심이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은 매번 진심으로 과잉된 상태라 섬뜩하다.
영화 초반 하바나는 “지금 내 생활과 모든 일정, 심지어 테라피까지도 클라리스의 역할에 맞춰 짰다고요”라고 말한다. 테라피를 받는 두 번의 장면에서 하바나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내가 실패하길 바라겠지만 어림없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린다. 치료사 샌포드(존 쿠삭)는 "참된 자아"를 드러내야 고칠 수 있다고 말하며 이를 "절대 실패하지 않는 마법의 아이"라고 부른다. 영화 속에서 치료사 샌포드가 집필한 책 제목은 <최선을 다하라>이다. 하바나는 최선을 다한다. (하바나가 앓고 있는) 신경증은 성과 사회의 산물이다(한병철, <피로사회>). <맵 투 더 스타>의 세계에서는 신경증을 치료할 때에도 최선을 다하라는 성과 사회의 정언 명령을 반복한다. 테라피를 받는 장면에서 하바나는 특유의 히스테릭한 얼굴로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그녀의 얼굴은 이번에도 최선을 다한다. 샌 포드는 배우인 아들 벤지(에반 버드)가 폭행사고를 저질렀을 때에도 “최악의 경우엔 토크쇼에서 고백하면 돼. 랜스 암스트롱처럼. 새로운 돈줄을 만들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하바나를 포함해 욕망하는 주체 혹은 성과주체들은 자기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 표정과 무의식과 상처까지도 조절하고 통제하고 활용한다.
자기 자신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세계에서 죽음에 대한 병적인 기피는 필연적이다. 파티장면에서 벤지와 친구들은 거침없이 나이 듦에 대해 비하하고 조롱한다. 이들은 스물세 살의 여배우를 두고 너무 늙어 폐경기가 왔을 거라고 비꼬고 하바나를 보고는 폐경기는 예전에 지나갔을 할머니라고 비웃는다. 이들에게 폐경기는 똥과 같은 층위의 농담거리로 다뤄진다(극성팬이 벤지 친구의 똥을 3천 달러라는 거액을 주고 샀다). <맵 투 더 스타>의 세계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죽음보다 나쁜 것은 죽어가는 것, 바로 노화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원하던 배역을 얻어낸 하바나는 이제 젊음을 욕망한다. 하바나는 애거서의 남자친구이자 리무진 운전기사인 제롬(로버트 패틴슨)을 유혹하며 "애거서보다 내가 더 아름답지? 내 피부가 더 곱지?"라고 묻는다. 집 앞에 도착한 둘은 차 안에서 성관계를 갖는다. 애거서는 집 안에서 말없이 이를 지켜본다. 하바나는 관계를 끝낸 후 집으로 들어와 애거서를 발견하고는 말도 없이 출근하지 않았던 애거서를 몰아붙인다. 애거서가 아팠다고 말하자 하바나는 “난 일주일 내내 아파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 네 시간씩 일해”라고 답한다. 실제로 하바나가 아플 때에도 일하는지와는 별개로 그것이 그녀가 옳다고 믿는 바다. 그것이 욕망하는 얼굴의 윤리다. 자리에서 바로 해고된 애거서가 집에 가기 위해 일어났을 때 소파에는 생리혈이 묻어 있다. 벤지와 친구들의 대화를 상기할 때, 만 이천 달러짜리 소파를 생리혈로 망가뜨리는 것은 애거서가 하바나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유머러스한 복수이다. 하바나는 자제력을 잃고 애거서에게 인신공격을 해댄다. 애거서는 하바나의 얼굴을 촛대로 내리친다. 애거서는 하바나의 머리가 아니라 얼굴을 내리친다. 최고의 형벌은 그녀의 얼굴을, 욕망의 장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배우이기도 한 하바나에게 이것은 이중적인 죽음이다.
서로 다른 측면에서 얼굴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홀리 모터스>와 <맵 투 더 스타>는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의 문제를 사유한다. 전자에서 죽음이 타인이 접속할 만한 가치를 잃는 것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을 뜻한다. 두 영화에 나타나는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과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두 영화의 세계에서는 살아있지만 기능하지 못 하는 상태, 쓸모가 없어진 상태가 가장 문제적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언더 더 스킨>에는 바로 이 죽음과도 같은 상태의 얼굴이 등장한다.
조나단 글레이저가 원작 소설을 영화화할 때 소설의 상당 부분을 각색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외계인이 인간을 사냥한다는 소설의 뼈대만 빌려왔을 뿐 소설의 서사적인 설명들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대신 감독은 영화에서 실험적인 사운드와 미니멀한 이미지, 익스트림 롱쇼트와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긴장,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해체 등 미학적인 시도들에 집중한다. 얼굴 이미지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언더 더 스킨>은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실험적인 방식으로 얼굴 이미지를 다룬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원형의 행성들은 익스트림 클로즈업된 눈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동공의 무늬까지 세밀하게 보일 정도로 확대된 눈은 신체의 일부라기보다는 탈인간화된 낯선 물체처럼 다가온다. 실제로 이 눈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사냥하는 외계인, 로라(스칼렛 요한슨)의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나체의 로라는 동료가 사냥해 온 여성의 옷을 벗겨서 입고 있다. 이 때 로라는 창백한 화이트 스크린과 대조되는 검은색의 실루엣만으로 제시된다. 세상에 나온 뒤에도 검은 머리,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두운 얼굴, 톤 다운된 계열의 옷을 입고 있는 로라는 여전히 색채가 없는 존재이다. 무채색의 존재로 묘사되는 로라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화장이다. 하지만 화장을 한 뒤에도 로라의 얼굴에는 무언가가 없다. 그녀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다. 그녀의 얼굴이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성이 제거된 로라의 얼굴은 일종의 오브제처럼 기능한다.
로라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정당화해주지는 못 한다. 인간이 아닌 대상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한 영화는 많다. 그런 영화들은 대상에 얼굴과 함께 표정과 감정도 부여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인간이 아닌 얼굴에도 풍부한 표현력을 부여하는 작업이 가능해졌다(<A.I.>의 로봇들과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골룸, 최근 리메이크된 <혹성탈출> 시리즈의 유인원 시저를 떠올려보자). 인간적인 표현력을 결여한 로라의 얼굴은 의도된 것이다. 감독은 마치 얼굴 이미지에서 인간성을 제거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텅 빈 얼굴의 로라는 다른 인물과의 교류가 불가능하다. 물론 영화 중반부까지 로라는 길거리의 행인들과 말을 나눈다. 하지만 이것은 대화가 아니라 인간사냥을 위한 알고리즘적인 매뉴얼의 작동일 뿐이다. 로라의 대사는 사냥을 위해 필요한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 인간사냥꾼들의 무리로부터 이탈한 로라는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알고리즘에서 벗어나는 상황 속에 놓이자 로라는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고작 "Yes", "Thank you"같은 대답을 한두 번 내뱉을 뿐이다. 더욱이 로라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다. 스칼렛 요한슨은 <그녀>에서 목소리 연기를 통해 OS의 감정과 생각, 나아가 얼굴을 상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던 것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로라의 목소리를 연기한다.
로라는 무채색의 존재에서 출발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목소리가 없으며 감정이 없다. 로라는 인간이라는 지표로서만 기능하는 최소한의 얼굴을 가졌다. 로라는 인간의 얼굴에서 비인간의 얼굴을 구현해낸다. 지금까지 우리는 로라를 로라라고 불렀지만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는다. 비인간의 얼굴을 한 그녀는 호명될 수 있는 주체가 아닌 것이다.
그런 로라가 인간을 사냥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로라가 옷을 하나씩 벗으며 유혹적으로 걸어가면 남자들 역시 옷을 벗으며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따라간다. 남자들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표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세 번째 희생자가 표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때 그는 자신보다 먼저 포획된 남자를 발견한다. 오랜 시간 푸른 액체에 잠겨있던 남자의 몸은 형체를 잃은 채 흐느적거리고 있다. 몇 초 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피부 아래 있는 남자의 육체가 완전히 제거된다. 남자의 피부 껍데기만이 비닐처럼 남아 수중에 떠돈다. 남자는 죽기 직전까지, 그러니까 흐느적거리는 피부로만 존재했을 때, 그는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을 뿐이다. 이 때 남자의 피부는 생명 유지 장치로 유지되는 식물인간의 몸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모두 인간적인 삶이 끝난 뒤에도 생명이 지속되는 상태에 처해있다. 이것은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근대 이후에 탄생한 새로운 종류의 얼굴, 생명 기계의 얼굴을 대변한다. 인간을 가축처럼 도축해 식용고기로 가공하는 원작의 설정이 근대적인 것이라면 생명과 피부를 분리해내는 영화의 도살 방법은 탈근대적인 것이다. 비인간의 얼굴을 한 로라와 피부만 남은 남자의 얼굴은 유사하다. 두 개의 얼굴에는 인간적인 것들이 제거되었다. <언더 더 스킨> 역시 얼굴의 디스토피아에 관한 영화다.
세 편의 영화는 모두 동시대의 얼굴을 사유하고 있다. 오스카와 하바나, 그리고 로라의 얼굴은 서로 중첩된다. 연기 중인 오스카의 얼굴과 쉼 없이 이동 중인 하바나의 얼굴은 서로 닮아 있고 로라가 사냥한 남자의 피부는 오스카가 근심하는 죽음의 상태와 닿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얼굴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스크린에 비친 우리의 얼굴들은 오스카와 하바나와 로라의 얼굴과 닮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