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남자. <암살>에서 이정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을 연기한다. 일단은 김구에게 충성하며 실력 좋은 사수들을 불러모아 친일파 암살 작전을 이끄는 책임자다. 최동훈 감독 말에 의하면 “깡패 같기도, 선비 같기도 한 복잡한 캐릭터”인 염석진은 매끈한 얼굴 너머 그 진심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남자다.
<암살>은 이정재가 “시나리오를 보기도 전에 하겠다고 약속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막상 받아본 시나리오는 “예상보다 ‘어마무시’했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인데 그런 뜻깊은 해에 ‘순수한 애국자’를 연기하지 못한 게 한스럽다. (웃음) 하지만 실제론 염석진처럼 이념적 갈등을 겪는 인물이 훨씬 많았을 거다. 불쌍한 조선 사람이랄까. 자칫 반감을 살 수도 있는 위험한 인물을 감독님이 나에게 맡긴 게 고마웠다.” 하지만 이전까지 없었던 인물인 만큼 어디서도 참고할 만한 모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분위기를 상상해보는 것이 그가 한 사전준비의 전부였다. “그 시절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열심히 찾아봤다. 어떤 작품은 우익 성향이 강했고, 어떤 작품은 좌익 성향이 강했다. ‘조선 독립’이라는 대의를 놓고도 시각에 따라 입장이 갈렸다는 게 흥미로웠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정서를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만을 생각하며 사는 인물인 만큼 이정재도 “언제나 예민해져 있고 긴장을 풀지 못하는 채로” 현장에 있어야 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인 그가 15kg이나 더 감량한 것도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촬영 중엔 양념하지 않은 식단을 고수했고, 하루의 촬영분을 마치고 갖는 간단한 술자리에서도 입에 술을 전혀 대지 않아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도둑들>(2012)의 뽀빠이와 <암살>의 염석진을 나란히 놓고 보면 최동훈 감독이 이정재에게서 어떤 얼굴을 발견했는지, 어떤 캐릭터를 바랐는지 더 구체적인 상이 보인다. 뽀빠이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용하고 보는 얄미운 실용주의자였다. 생존과 효율을 따져가며 움직인다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염석진은 뽀빠이보다 더 절실한 인물이다. 얄미운 대신 처절하고 안쓰럽다. 그의 말마따나 결국 “불쌍한 조선 사람”인 것이다. 외양으로 판단하자면 콧수염을 붙이고 등장하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뽀빠이의 콧수염이 허세의 상징이었다면 염석진의 콧수염은 시대적 설정이자 본심을 숨긴 캐릭터의 가면이다. “관객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더 빠르게 캐릭터를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캐릭터의 외양을 만들어가는 건 배우에게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감독님이 누군지 모를 한 실존 인물의 흑백사진을 가져와 보여주시더라.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 인물이니 외양에서 가장 염석진다워 보일 것을 찾아야 했다.”
과연 염석진은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소개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전사를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 건 최동훈 감독님의 고유한 방식이다. 인물에 대해 열개의 정보를 주기 위해선 그 열배가 넘는 다른 정보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염석진도 마찬가지다. 이 남자가 이런 사람이 되기까지 과거를 짐작할 만한 정보는 최소한으로 주되 주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게 한다. 약간의 과장이 섞인 뉘앙스로.” 염석진을 두고 누군가는 “옆구리에 총구멍이 두개인데 그걸 손가락으로 막고 만주까지 온 사람”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열흘 만에 종로경찰서 탈출에 성공한 남자”라고 했다. 하지만 풍문으로 어떤 말이 오가든 그를 만나보기 전까진 결코 염석진의 실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정재는 리준 감독의 도심추격극 <역전의 날>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차이나필름그룹, 하이룬, 두타연 등 세개 회사의 합작영화로 8월 중순부터 서울 올 로케이션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이정재는 중국인 범죄자를 잡는 형사로 출연한다. 의외의 사실은 <역전의 날>이 이정재로선 첫 출연하는 한•중 합작영화라는 것이다. 해외 진출에 대해 “뚜렷한 계획은 없다”지만 “언제나 좋은 프로젝트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이제부턴 마음껏 욕심내려 하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