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 한발에 조국의 운명을 짊어진 여성 독립군 저격수.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으로부터 전달받은 그녀의 표적은 두명이다. 조선주둔군 사령관 가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 명중의 유무와 상관없이 분명한 건 목숨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치의 망설임 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비극적인 여성이다.
전작 <도둑들>(2012)로 처음 호흡을 맞췄던 최동훈 감독과의 작업이 만족스러웠나보다. 전지현은 <암살>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에 출연을 결정했다. “<도둑들>이 끝난 뒤 감독님께서 시나리오를 쓰는 데 2, 3년 걸린다고 하셨다. 여배우로서 캐릭터가 분명한 역할을 찾기 힘들고,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요즘인데, 안옥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감동받을 만한 캐릭터였다. 무엇보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이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도둑들>의 비주얼’이었던 예니콜과 달리 안옥윤은 1930년대 일제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떠안은 채 서사를 이끌어가고, <암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전지현이 충분히 탐낼 만했다.
“신념이 곧고, 강한 여자.” 출연을 결정한 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전지현에게 다가온 안옥윤의 첫인상이다. “치장하지 않는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최동훈 감독의 주문에 따라 전지현은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단발머리로 변신했고, 민낯에 가까운 분장을 했다. “단발머리가 낯설진 않았냐고? 낯선 건 없다. 또 낯설면 낯선 대로 하는 거다. 그보다 중요한 건 배우가 캐릭터에 녹아들어가는 것이다.” 외양 변신이 안옥윤의 인상을 형성하기 위한 준비였다면, 총 장전 연습은 독립군으로서 그녀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과정이었다. 저격수라는 설정 때문에 총이 손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촬영 전 집에서 틈만 나면 모형 권총을 장전하는 연습을 했다. “요즘 총과 구조가 다르고, 저격수이다보니 표적을 보면서 장전해야 해서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웠다. 그런데 미리 연습한 덕분에 현장에서 적응하는 데 수월했던 것 같다.” 현장에서 전지현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총을 쏘는 걸 보고 최덕문은 “독한 여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하하. 그렇게 잘 쏠 줄 몰랐다. 촬영날 아침, 오늘은 몇발 쏴야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총 쏘는 연기가 재미있었다.” 총 쏘는 상상을 했는지 웃으면서 말은 했지만, 5kg이 넘는 장총을 어깨에 멘 채로 지붕 위를 뛰어넘고, 달리는 차를 쫓으면서 총을 쏘던 액션 장면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세트장에서 찍으면서 전지현은 안옥윤으로 산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을 상대로 그렇게 싸운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싸움을 하는 건데 나라를 위해 한몸 희생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현대인으로서 그녀가 처한 상황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니 그런 삶을 선택한 안옥윤은 대단히 용기 있는 여자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선언을 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면을 찍을 때 “가슴이 울컥”했던 것도 그래서다.
전지현은 <도둑들>부터 <베를린>(2012),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2013), 최근의 <암살>까지 매년 한 작품씩 쉴 새 없이 달려왔다. 덕분에 작품과 작품 사이에 휴식기가 길었던 과거와 달리 “작품을 시작할 때 곧바로 시동을 걸어 고속도로에 올라탈 수 있는 대기 상태”가 됐다고 한다. “이제는 전지현이 슬슬 지겹지 않을까? (웃음) 매년 한편씩 하니까 연기하는 게 몸에 익숙해져 좋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차기작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 어쨌거나 전지현이 쏜 안옥윤이라는 탄환은 총구를 시원하게 떠났다. 또 한번의 일보 전진이라는 과녁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