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만큼 인상적인 촬영지 30 (2)
2015-08-25
글 : 이화정
글 : 김현수
글 : 정지혜 (객원기자)
글 : 장영엽 (편집장)
글 : 송경원
<안녕, 헤이즐>

훔쳐가지 마세요

<안녕, 헤이즐>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벤치

벤치도 벤치 나름이다. <안녕, 헤이즐>(2014)에 등장한 암스테르담의 녹색 벤치는 이제 줄서야 앉는 촬영 명소가 됐다. 개봉 직후 땅에 박힌 벤치를 뽑아간 황당한 도둑 탓에 지금 레이드세흐라흐트 거리에 있는 벤치는 한달 뒤 그 옆에 똑같이 설치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영화에 등장한 벤치는 아니지만, 이미 영화 팬들의 방문으로 오리지널의 가치를 회복한 상태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운하의 도시가 아름답긴 하나 좁은 수로를 따라 늘어선 집들의 무한반복에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은 것도 사실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소녀 헤이즐(셰일린 우들리)과 그녀가 가슴 아프게 사랑하는 남자친구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가 함께 앉은 벤치는 이 단조로운 풍경에 스토리를 만들어준 일등공신이다. 영화의 원제처럼 ‘잘못은 우리 별에 있을’(The Fault in Our Stars) 뿐, 풋풋한 소년 소녀의 사랑은 벤치에 영원히 새겨졌다. 둘의 사랑의 암호 ‘Okay? Okay’도 물론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제발 이번 벤치는 도난당하지 않기를!

어둠 속에서 운명을

<어바웃 타임>의 영국 런던 당 르 누아르 레스토랑

세상에! 이런 게 정말 ‘블라인드’(blind) 데이트다. <어바웃 타임>(2013)의 팀(돔놀 글리슨)이 친구 손에 이끌려 들어가 평생의 짝인 메리(레이첼 맥애덤스)를 만난 건 런던의 이색 레스토랑 당 르 누아르(Dans Le Noir, 어둠 속에서)에서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일상생활을 체험해 반향을 일으킨 전시 <어둠 속의 대화>와 똑같은 컨셉이다. 오후 7시48분부터 10시37분, 딸기스무디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눈에 떡칠이 되는지도 모를 절대 암전의 시간. 팀과 메리가 여느 소개팅 커플처럼 서로를 ‘탐색’하는 그 시간을 영화는 암흑 속에서 대화로만 승부수를 띄운다. 외모를 떠난 운명적 만남을 설명하려는 의도를 잘 표현한 명장면. 그럼에도 어째 팀이 메리에게 결정적으로 반한 건 레스토랑을 나와 메리를 본 찰나의 1초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솟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쨌든 런던에 간다면 당 르 누아르(http://london.danslenoir.com)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겠다. 런던 이외에도 파리, 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바르셀로나에도 지점이 있다. 냉정히 말해 메리와 합석할 확률은 희박하다만.

인생도 리부팅이 될까요

<소스 코드>의 시카고 밀레니엄 공원 내 클라우드 게이트

목적지 없는 기차 여행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소스 코드>(2011)의 주인공 콜터 대위(제이크 질렌홀)는 그와 반대로 시카고 도착 직전의 기차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탄다. 과연 그는 시카고에 도착할 수 있을까? 스포일러 때문에 더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장소는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 공원에 자리한 거대한 조형물 ‘클라우드 게이트’ (Cloud Gate) 앞이다. 콜터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삶을 안겨주는 이 조형물은 인도 태생의 영국 조각가 애니시 커푸어가 만들었다. 이음매를 없앤 매끈한 표면에 시카고의 마천루가 그대로 일그러져 비친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또 다른 평행우주로 향하는 도어록처럼 여겨진다. 여기는 기억에 관한 또 다른 흥미로운 멜로영화 <서약>(2012)에도 배경으로 등장한다. 묘하게 삶을 리부트하고 싶은 영화마다 등장하는 덕분에 나를 리부트하고 싶어질 때마다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영감이 떠오르는 곳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알프스 실스마리아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는 스위스의 남동쪽 알프스 지역에 위치한 작은 마을 실스마리아(Sils Maria)가 배경이다. 설산에 폭 안긴 마을과 호수가 인상적인 곳이다. 영화 속 중년의 유명 여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와 그녀의 젊은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은 데뷔기의 마리아를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감독이 죽기 직전까지 머물던 실스마리의 작업실에 머문다. 마리아는 감독이 쓴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재출연을 두고 발렌틴과 옥신각신한다. 연극의 제목은 실스마리아에 있는 말로야 계곡에서 왔다. 거대한 구름떼가 협곡을 통과할 때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뱀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붙은 이름이다. 마리아와 발렌틴은 웅장하고 숭고한 말로야 스네이크를 눈앞에서 확인하며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연기, 예술, 나아가 젊음이라는 화두 앞에서 팽팽히 맞서던 두 사람 혹은 마리아의 내면에 인 어떤 감응일 것이다. 한편 실스마리아는 철학자 니체가 죽기 10년 전부터 머물며 창작 활동을 한 곳으로 니체 하우스가 보존돼 있다. 영화 안팎으로 실스마리아는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공간임에 틀림없다.

고공 질주의 아찔함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의 아부다비 에티하드 타워

“지금 급흥분되는 거, 나뿐이야?” 애타게 찾던 해킹 프로그램이 요르단 왕자의 펜트하우스 안에 있다니. 산전수전을 은근히(어쩌면 노골적으로) 즐기는 도미닉 일행에게 이보다 더 흥분되는 소식은 없을 것이다. 요르단 왕자의 펜트하우스가 위치한 곳은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의 에티하드 타워(Etihad Tower)다. 사무실과 호텔, 아파트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에티하드의 다섯개 타워는 근방에 위치한 에미리트 팰리스 호텔과 더불어 아부다비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분노의 질주: 더 세븐>(2015)의 도미닉과 폴이 전세계 오직 7대뿐이라는 스포츠카, 라이칸 하이퍼스포트를 타고 에티하드 타워의 3개동을 무정차로 공중 돌파하는 장면(물론 이 장면만큼은 세트에서 촬영했다) 이래 이곳은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아부다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에티하드 타워2의 75층 전망대에서는 영화 속 고공 질주 장면에 맞먹는 아찔한 뷰를 감상할 수 있다고.

천재 과학자의 작업실 같은

<엑스 마키나>의 노르웨이 주벳 랜드스케이프 호텔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실험을 남몰래 벌이고 있는 억만장자 테크 오타쿠의 거처로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을까. <엑스 마키나>(2015)의 주요 배경이 된 주벳 랜드스케이프 호텔(Juvet Landscape Hotel)은 노르웨이 북부 지방에 실존하는 고립된 호텔이다. “자연 속에 위치한” 공간을 찾길 바랐던 <엑스 마키나>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마크 딕비는 시나리오상의 무대였던 콜로라도를 벗어나 유럽 전역의 호텔을 물색했고, 최종적으로 이곳을 선택했다. 밖에서 보면 마치 보호색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는 카멜레온처럼 숲속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이 호텔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군더더기 없는 현대적인 디자인을 지닌 최신식 건물의 인상을 준다. “우리는 누군가를 힘 있고 부유하며, 지적으로 유능하게 보이게 하고 싶었다. 또한 디자인에 대한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마크 딕비의 선택은 옳았다. 천재 과학자의 분신과도 같은 이 공간은, 옆방에 인공지능 로봇이 투숙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의 현대성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무장한 곳이니까.

<그녀>

미래도시가 따로 없네

<그녀>의 미래도시, 상하이 푸동지구 루지아주이

친구 커플과의 더블 데이트 자리에 운영체제 여자친구를 데려간다 해도 놀랍지 않은 세상.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2013)는 미래의 로맨스란 바로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짐작하는 영화다. 지금 현재 세계에서 가장 미래적인 도시인 상하이가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존 말코비치 되기>부터 <어댑테이션> <괴물들이 사는 나라>까지, 스파이크 존즈와 많은 작품을 함께해온 프로덕션 디자이너 K. K. 바렛은 <그녀>를 준비하며 중국 금융의 중심가인 푸동지구의 루지아주이(陸家嘴)를 떠올렸다고 한다. 고층에 위치한 통로를 거치면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다른 건물로 이동이 가능한 이곳의 구조가 “미래 도시의 면모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루지아주이의 고가 통로를 걸으며 <그녀>의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운영체제 여친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와 이혼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카메라는 테오도르의 주변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몸을 주의깊게 들여다본다. 그건 아마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오직 인간의 육체만을 소유할 수 없는 사만다의 서글픈 시선일 거다.

<버드맨>

<왕과 나>의 첫 무대

<버드맨>의 뉴욕 브로드웨이 세인트 제임스 극장

<버드맨>(2014)은 사실 브로드웨이에 대한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미국 연극계의 욕망과 위선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한물간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 아니라 긴 시간 브로드웨이를 지켜온 극장이다. 원신 원테이크의 트릭을 활용한 카메라가 지겹도록 훑는 건 다름 아닌 브로드웨이 44번가에 위치한 세인트 제임스 극장(St. James Theatre)이다. 우리는 카메라를 통해 이 극장을 오랫동안 관리해온 사람처럼 외관, 무대 뒤, 옥상, 대기실, 좁은 복도까지 속속들이 관찰할 수 있다. 1927년 문을 연 세인트 제임스 극장은 <오클라호마> <왕과 나> 등 숱한 명작이 첫 공연을 했던 명소다. 주소는 246W 44th st. 쾌적하고 깔끔한 시설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역사를 반영하듯 다소 거친 느낌을 주는데 맞은편 마제스틱 극장과 함께 브로드웨이의 산증인이다. 영화 속에서 알몸으로 브로드웨이를 활보한 마이클 키튼의 동선은 약간의 트릭이 더해진 것으로,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참고할 것.

별이 내리네

<매직 인 더 문라이트>의 니스 코트다쥐르 천문대

이거야말로 결정적 순간이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2014)의 마술사 스탠리(콜린 퍼스)와 수상쩍은 심령술사 소피(에마 톰슨)가 서로에게 단번에 마음을 여는 건 비를 피해 들어간 니스의 코트다쥐르 천문대(Co⋎te d'Azur Observatory)에서다. 쏟아지는 별빛 지붕 아래 밀착한 두 남녀 사이에 불꽃이 일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리라.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구스타프 에펠이 돔의 디자인을 맡았다는 이 천문대는 보석처럼 빛나는 남부 프랑스의 낭만을 대변한다. 어쩌면 영화 속 찬란한 햇살은 그 찰나의 아름다운 어둠을 위해 존재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쉽지만 영화에서처럼 지붕을 개방해 직접 별을 볼 수는 없다고. 그래도 그 순백의 돔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남부 프랑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관광지가 아니라 2014년 은하계에서 가장 큰 별을 발견하는 등 본업에 충실한 천문대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두 얼굴

<1월의 두 얼굴>의 크노소스 유적지

“파르테논 지겹죠?” <1월의 두 얼굴>(2014)에서, 그리스를 찾은 여행자들에게 가이드 라이달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을 반증이라도 하듯, 영화 속 그리스는 잔혹한 그리스신화의 운명을 계승하는 서늘하고 음험한 장소로 다시 태어난다. 25년여 만에 촬영 허가를 받았다는 아크로폴리스 유적지를 배회하는 미국인 부부(비고 모르텐슨과 커스틴 던스트가 그들을 연기한다)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크레타섬의 크노소스(Knossos) 유적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등장인물의 난투극이다.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이 존재했다고 알려진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누군가는 괴물이 되고, 시체가 누워 있는 지하 위에선 유적지를 찾은 관광객들이 한가롭게 투어 중이다. 이처럼 과거의 신화와 현재의 욕망이 얽히고설킨 <1월의 두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건, 이제까지 발견된 적 없었던 그리스의 두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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