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만큼 인상적인 촬영지 30 (3)
2015-08-25
글 : 이주현
글 : 장영엽 (편집장)
글 : 이화정
글·사진 : 주성철
글 : 김성훈
사진 : 나지언 (칼럼니스트)
사진 : 이병학 (한겨레 기자)
<셀마>

‘블러디 선데이’를 기억하라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

1865년 미국의 노예제가 폐지됐지만 미국의 흑인들이 참정권을 얻기까지는 그로부터 100년이란 시간이 더 걸렸다. 1965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들의 정치적 자유권을 외치며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의 행진을 주도한다. <셀마>(2014)는 마틴 루터 킹의 삶에서도 바로 이 셀마 행진에 주목한다. 앨라배마 강 위에 세워진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Edmund Pettus Bridge)는 역사적 행진의 출발지였다. 그리고 평화 행진에 나선 많은 이들이 다리 위에서 피를 흘렸다. 에바 두버네이 감독은 “실제 그 공간에 담긴 DNA와 정서”를 영화에 이식하기 위해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서 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올해는 셀마 행진 50주년 되는 해. 1965년의 ‘블러디 선데이’를 기억하기 위한 행사가 에드먼드 다리에서 열렸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참석했다. 50년 전, 투표권 쟁취를 외치며 다리를 건넜던 용기 있는 이들 덕에 가능한 풍경이었다.

추억은 방울방울

<업>의 칼 할아버지 집

<업>(2009)의 칼 할아버지는 아내와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집을 지키기 위해 수천개의 풍선을 달아 집을 통째로 띄워버렸다. 추억 따윈 돈으로 얼마든지 보상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개발업자들에게 순순히 집을 내놓을 순 없었던 것. 픽사 애니메이션 <업>에 등장하는 칼 할아버지의 집에는 실제 모델이 있다. 미국 시애틀의 이디스 메이스필드 할머니의 집(1438NW 46th st, 시애틀, 워싱턴)과 집에 얽힌 사연이 그것. 메이스필드 할머니가 살던 집 주변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건축주는 할머니에게 100만달러(11억원)를 제시하며 집을 팔 것을 종용한다. 할머니는 집을 지켜냈지만 2008년 세상을 떴다. <업> 개봉 이후 ‘업 하우스’는 동네의 랜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최근, 현재의 업 하우스를 허물고 시애틀의 오카스섬에 새로운 업 하우스를 지을 계획이라는 뉴스가 떴다. 그대로 사라지지 않아 다행이라 해야 할까.

얼음과 불과 미래의 대지

<프로메테우스>의 아이슬란드 데티포스 폭포

아이슬란드는 얼음과 불의 나라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과 인간이란 존재를 미약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폭포가 공존하는 곳이다. 지구의 시간이 시작될 법한 곳을 찾고 있는 영화 제작진에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을까.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2012)에서 아이슬란드는 ‘빅뱅’이 일어나는 장소다. 5억4천만년 전 지구에 당도한 엔지니어 종족 중 한명이 검은 액체를 마시고 아이슬란드의 급류에 휘말려 완전히 분해된다. 그의 DNA는 지구의 곳곳에 스며들고 그로부터 생명체의 본격적인 진화가 시작된다는 설정이다. 영화에서 3분가량밖에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지만 <프로메테우스>의 서막을 여는 이 오프닝 신은 대담하고 도발적이다. 인류의 기원이 외계 종족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죽음과 피조물의 탄생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 영화 속 장소는 아이슬란드의 데티포스(Dettifoss) 폭포다. 높이 44m, 너비 100m. 유럽에서 가장 큰 폭포라고 알려진 이곳은 광활한 사이즈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데티포스 폭포의 스케일 앞에, “이제 우리가 신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라는 인간의 선언(<에이리언> 시리즈 탐사선의 소유주인 피터 웨이랜드의 말)은 얼마나 어리석게 들리는가.

<현기증>에도 나왔죠?

<인사이드 아웃>의 샌프란시스코 롬바르드 거리

샌프란시스코를 완성하는 풍경 중 롬바르드 거리(Lombard Street)를 빼놓을 수 없다. 금문교와 알카트라즈 교도소, 피셔맨스 워프 같은 관광명소에 이 조그만 언덕길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지그재그길이라는 독특함 때문일까. 덕분에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스티브 매퀸이 카 체이싱을 펼치는 <블리트>(1968)는 이곳의 지그재그 지형을 제대로 살린 예.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 속 퍼거슨(제임스 스튜어트)의 집도 롬바르드 거리에 있는데, 영화팬들이 하도 찾아와 현기증을 느낀 집주인이 외관을 아예 바꿔버렸다는 슬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젠 애니메이션에까지 등장해 또 한번 유명세를 더했다. <인사이드 아웃>(2015)에서 라일리는 아빠의 사업으로 갑자기 미네소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는데 그 스케치 장면에 롬바르드 거리가 있다. 11살 소녀에게는 낯설지만, 애니메이션 구현만큼은 실제와 정말 똑같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세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리스본 알파마 지구

정말 티켓 한장으로 떠날 수 있을까. <리스본행 야간열차>(2013)의 50대 고전문헌학 교수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선뜻 그렇게 한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한 책의 저자 아마데우를 찾아 입은 옷 그대로 수업도 내팽개치고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행 기차를 타버린다. 리스본에 도착해 그가 만난 것은 포르투갈의 독재에 맞서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을 돌아보는 시간여행. 발길 닿는 곳마다 중세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 리스본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하여 여행을 종용하는 영화목록에서 이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빼놓는 건 불가능해졌다. 특히 그가 묵는 소박한 호텔이 위치한 알파마(Alfama) 지구는 언덕과 트램이 인상적인 리스본의 아름다움을 요약해주는 결정적 장소다. 그레고리우스처럼 충동을 꿈꾸고 있다면, 주저 없이 리스본행 야간열차 티켓 발권에 도전하길.

숨 막히는 홍콩 아파트의 밀도

<순류역류>와 <트랜스 포머: 사라진 시대>의 홍콩 아파트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는 홍콩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오우삼부터 두기봉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홍콩 누아르 액션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것의 집대성은 아마도 서극의 <순류역류>(2000)일 것이다. 미로와도 같은 아파트의 내부와 외부를 잇는 기막힌 동선의 박력, 그 공간의 선과 면을 타고 흐르는 정교한 속도감은 그야말로 영화적 공간의 밀도를 극대화한 명장면이자, 그곳이 세계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홍콩의 아파트이기에 가능한 쾌감이다. 무려 30분 가까이 아파트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춤을 추고, 급기야 카메라가 건물 외벽을 하강하는 <순류역류>의 마지막 장면은 최동훈의 <도둑들>(2012)의 아파트 액션 시퀀스에도 큰 영향을 줬다. 홍콩 카우룽 반도 동쪽 낙산(落山) 로드에서 바다쪽 방향 가까이 있는 익풍(益豊)대하가 바로 그곳이다. ‘대하’(大廈)는 우리말로 하면 ‘맨션’ 정도 된다. 세월이 흘러 이곳은 놀랍게도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2014)에서 범블비가 지키며 서 있고, 케이드(마크 월버그)가 창가의 화분들을 부수고 에어컨 실외기를 마구 떨어트리며 악당과 싸우던 아파트로 등장했다. 홍콩 할매 3명이 좁은 복도를 가득 채워 악당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그 멋진 공간감이라니.

냉전시대 스파이들의 접선장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파리지앵 아케이드

“썩은 사과가 있어, 짐. 우린 그걸 찾아야만 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영국 비밀정보국 서커스의 수장, 컨트롤은 젊고 유능한 후배 스파이 짐 프로도에게 비공식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러시아 정보국이 서커스 고위에 심어놓은 스파이의 이름을 알아오라는 것.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프로도가 찾아가는 곳이 바로 이 장소다.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파리지앵 아케이드’(Parizsi Udvar)는 1909년 설립된 오래된 건물이다. 부다페스트의 유명한 쇼핑 거리였던 이곳은 한때 부다페스트 시티은행의 본사이기도 했다. 네오고딕과 아르누보 건축양식을 절충한, 파리지앵 아케이드의 고풍스럽고 웅장한 배경 아래 수많은 냉전시대의 스파이들이 실제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영국 스파이가 러시아에 보란 듯이 당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을까.

공룡 대신 소가 있네

<쥬라기 월드>의 하와이 쿠알로아 랜치

아차,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쥬라기 월드>(2015)의 배경이 코스타리카에 위치한 이슬라 누블라섬이라고 해서 그곳에서 찍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타조처럼 생긴 갈리미무스 불아투스가 무리지어 평원을 질주하는 장면도, 주인공 그레이(타이 심킨스)와 자크(닉 로빈슨) 형제가 원형의 이동기구를 타고 코뿔소처럼 생긴 스테고사우루스 무리 사이를 오가는 장면도 하와이 쿠알로아 랜치(Kualoa Ranch)에서 촬영했다. 울창한 열대우림, 높은 계곡, 들쭉날쭉한 산맥, 반짝반짝 빛나는 해변, 깊은 협곡 등 다양한 자연이 어우러져 있어 <쥬라기 월드>뿐만 아니라 <배틀쉽>과 <쥬라기 공원> <윈드토커> <진주만> <고질라> 등 여러 할리우드영화와 <로스트> 등의 TV드라마가 이곳에 와서 로케이션 촬영을 했다. 실제로 이곳에 가면 영화 촬영지를 구경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홈페이지 www.kualoa.co 참조). 공룡 대신 풀 뜯어먹는 소들이 반겨줄 것이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궁극의 탈출이 가능할 장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아이슬란드 세이디스피요르드

구조조정 위기에 처한 중년의 독신남에게, 어느 날 갑자기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는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는 현실을 살아가며 백일몽 속에 침잠하던 월터(벤 스틸러)가 현실의 모험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조명한 영화다. 대담한 상상을 하던 몽상가답게, 월터가 향하는 곳은 거칠고 원시적인 자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광활한 공간들이다. 그가 당도하는 수많은 장소 중에서도 특히 월터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막힘없이 질주했던 그린란드의 인적 하나 없는 도로는 여전히 백일몽에 안주하는 많은 이들의 심장박동을 뛰게 한 인상적인 장소다. 등장인물들이 그린란드라 일컫는 이곳은 사실 아이슬란드의 세이디스피요르드(Seyðisfjo‥rður)를 배경으로 한다. 700명도 채 되지 않는 주민들이 살아가는 이 작은 항구 마을은 SF영화의 주요 촬영지로 인식되어왔던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SF 장르의 비장한 영웅들에 비하면 귀여운 몽상을 하는 소시민 월터에게 잘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위대한 아름다움을 위하여

<그레이트 뷰티>의 로마 성 아그네스 성당

지금 현재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파올로 소렌티노만큼이나 이탈리아의 ‘그레이트 뷰티’를 기품 있게 표현해내는 감독은 없다. “눈을 감아라. 죽음은 삶의 이면에 있다”는 프랑스 작가 루이 페르디낭 셀린의 문장처럼(이 구절은 셀린의 소설 <밤의 끝으로의 여행>에 수록된 것으로,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 <그레이트 뷰티>의 포문을 연다), 소렌티노의 관심은 늘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인간 존재에 머물러 있으며 그의 2013년작 <그레이트 뷰티>에서 로마는 소렌티노에게 죽음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최적의 장소가 된다. 이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노년의 소설가 젭(토니 세르빌로)이 로마의 밤거리를 걷는 장면이다. “내가 깨달은 건 원하지 않는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그는 아름다운 여자의 나체 사진을 감상하는 대신 로마의 밤거리로 나선다. 그런 그가 지나는 장소는 바로 아녜스 성녀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성 아그네스 성당(Sant’ Agnese in Agone)이다. 세속의 미녀를 탐하기보다 이미 사라진 성녀가 영원히 묻힌 도시를 걷겠다는 선택. 소렌티노는 그것이 ‘위대한 아름다움’이라 믿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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