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만큼 인상적인 촬영지 30 (1)
2015-08-25
글·사진 : 이화정
글 : 김성훈
글 : 장영엽 (편집장)
글 : 이예지
글·사진 : 주성철
글 : 윤혜지

신사의 무기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양복점 헌츠맨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 Maketh Man)라는 에티켓 문구를 첩보영화에서 듣게 되었을 때의 당혹감.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5)의 그 특별함이 태동한 곳은 여느 스파이물의 본거지와 전혀 ‘다른’ 곳이었다. 비밀정보조직 킹스맨의 베테랑 요원 해리(콜린 퍼스)의 품격 액션을 가능하게 한 똑떨어지는 슈트 핏을 전적으로 책임진 곳, 그리하여 그의 매너와 액션 실력에 흠뻑 취한 새로운 요원 에그시(테론 에거턴)를 길러낸 그곳. 바로 킹스맨의 회합장소인 런던의 한 양복점 ‘헌츠맨’(HUNTS MAN)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트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 런던 최고 번화가 옥스퍼드 서커스 근처, 새빌로가에 위치한 헌츠맨은 1849년 창립해 1919년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켜온 맞춤양복의 명가다. 주변 모두 200년 전통의 양복점이 10여 군데나 늘어서 있는 이 지역은 ‘양복 재단의 황금길’로 유명하다고. 그중 굳이 헌츠맨에서 촬영된 이유를 들자면, 감독 매튜 본과 콜린 퍼스가 이곳의 주요 고객이라는 점. 영화의 아이디어를 이곳에서 떠올렸다고 하니 더 특별해지는 장소다. 요원이 없다는 걸 빼면 클래식 빈티지를 표방하는 내부 구조와 제대로 슈트를 갖춰입은 점원까지, 영화 속 분위기 그대로다. 영화의 인기로 최근 헌츠맨을 찾는 관광객이 부쩍 늘었는데, 특히 아시아 지역 팬들이 상당하다고. 그 기세 그대로 헌츠맨의 재단사들이 아시아 투어에 나선다는 소식도 들린다. 싱가포르, 도쿄, 홍콩, 상하이, 베이징과 더불어 9월에는 서울에도 온다. 단, 제작기간 3개월, 비용 400만원선의 높은 장벽이 기다린다. 요원의 길은 멀다.

위스키 향 그윽한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의 스코틀랜드 발블레어 증류소

켄 로치가, 그러니까 노동계급의 이야기를 만들어온 좌파 감독과 위스키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만든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2012)에서 위스키가 직업도 없이 사고만 치고 다니는 주인공 로비(폴 브래니건)에게 새로운 재능이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을 보면서 위스키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로비가 위스키를 시음하는 행사에 참여하고, 위스키 경매가 이루어지는 장면은 발블레어(Balblair) 증류소에서 찍었다. 스코틀랜드 테인 근처의 작은 마을 에더턴에 위치한 증류소로, 1894년 지어진 유서 깊은 곳이다. 로비와 그의 사고뭉치 친구들이 그랬듯이 일반인도 이곳에 가면 위스키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배울 수 있고, 위스키가 보관된 숙성 창고도 둘러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제조된 위스키를 시음할 수도 있다(www.balblair.com).

<브로큰 임브레이스>

연인을 위하여

<브로큰 임브레이스>의 란자로테섬

때때로 사진은 눈으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알려준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20여년 전 란자로테(lanzarote)섬에서 찍은 한장의 사진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는 섬의 해변가에서 한 커플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을 사진을 인화한 뒤 발견했고, 그들의 모습으로부터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의 이야기를 구상해냈다. 이 영화에서 마테오와 레나는 어니스토의 감시를 피해 란자로테섬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그리고 알모도바르의 사진 속 연인들이 서 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포옹을 한다. 스페인 카나리아제도에 위치한 란자로테섬은 용암 지형과 총천연색 바다색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비현실적인 풍경으로부터 알모도바르가 연인들의 비밀스러운 일탈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붉은 기와지붕의 섬

<편지>의 오키나와 다케토미섬

에메랄드 빛! 산호초 바다와 새하얀 모래의 조화가 만든 천상의 아름다움. 섬마을 특유의 소박한 생활이 도시의 복닥거림을 상쇄시켜준다. 오키나와에 가면 ‘힐링’이란 단어를 조개껍질처럼 주워올릴 수 있다. 오키나와는 지리적으로 대만과 가까워 일본인들에게도 이국적인 여행지. 본섬 외에 부속섬만 160여개에 달하는, 볼거리가 많은 섬이다. 영화에서 오키나와를 만날 확률도 적지 않다. 쓰마부키 사토시는 오키나와섬에서 <눈물이 주룩주룩>(2006)을 찍었고 아오이 유우는 부속섬 다케토미섬(竹富島)에서 <편지>(2005)를 찍었다. 6살 때 도쿄로 떠난 엄마를 그리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섬마을 소녀 후키의 성장담의 배경인 다케토미섬은 섬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곳. 돌담과 붉은 전통 기와지붕이 이어진 작은 마을, 영화 속 아오이 유우처럼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이 소박한 풍경을 완성한다. 주변의 유부섬, 이리오모테섬에도 들러 여행을 만끽할 수 있다. 부속섬으로 가는 직항 전세기편이 마련되어 있으니 당장 검색 시작.

세트가 아니었다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멘델스 빵집, 푼트 형제의 유제품 가게

총천연색 색감과 동화 같은 장면들로 관객의 판타지를 한껏 자극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온갖 사랑스럽고 예쁜 것들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가장 예쁜 것을 꼽으라면, 단연 멘델스 제과점의 핑크색 케이스 속 케이크가 아닐까. 영화 속 알록달록한 케이크들을 쉴 새 없이 구워냈던 멘델스 제과점의 내부는 독일 드레스덴에 위치한 푼트 형제의 유제품 가게(Molkerei Pfund)에서 촬영한 것이다. 1880년 창업한 이 가게는 독일 도자기 업체인 빌레로이 앤드 보흐에서 만든 타일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제품 가게’로 1998년 기네스북에 등재된 유서 깊은 곳. 영화 속 멘델스 케이크는 없지만, 버터밀크와 연유, 치즈 등 다양한 유제품을 맛볼 수 있다.

류승완 감독이 준비 중이라는 <군함도>의 무대

<007 스카이폴>의 데드시티, 하시마섬

영국 정보국 M16 요원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와 전 요원에서 적이 된 실바(하비에르 바르뎀)가 맞붙는 황폐한 데드시티. 폐허가 된 적요한 도시는 두 남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부각시킨다. 영화 속 데드시티의 실체는 일본 나가사키현의 무인도인 하시마섬(端島). 롱숏으로 보여지는 외관은 실제 하시마섬이고 내부는 하시마섬을 모델로 세트 제작했다. 콘크리트 아파트가 빼곡한 모습이 군함과 비슷하게 생겨 군함도라고도 부른다. 19세기 말 탄광이 발굴되어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5천여명이 거주하는 융성한 도시였다. 그러나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뀜에 따라 쇠퇴, 탄광을 폐쇄하고 주민들은 모두 섬을 떠났다. 일제가 ‘국가 총동원법’을 통해 한국 젊은이 800여명을 강제 동원하여 탄광에서 고된 노역을 시켜 약 134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곳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어두운 역사의 일부다.

화보가 따로 없네

<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의 프랑스 리조트 레자크

이케아 화보로도 손색없다. 알프스 산자락, 스키 시즌, 고급 리조트, 단란한 가족. <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4)은 폼 나는 유럽 중산층의 도덕과 교양 깊숙한 곳에 있는 지질함을 끝끝내 포착해내는 산사태 같은 드라마다. 그래서 흔히 예상하듯 산속에 고립되는 액션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의외로 심리 드라마라는 게 진짜 함정! 비발디의 <사계>가 흐르는 가운데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뽐내는 리조트와 눈덩이처럼 불어난 긴장이 엮인 역동적 심리전의 향연이 펼쳐진다. 영화의 배경이 된 레자크(Les Arcs) 리조트(www.lesarcs.com)는 1968년 오픈한 유서 깊은 곳. 알프스 사부아 지역, 유럽의 부자들이 즐겨 찾는 스키 명소인 타렌타이즈 계곡의 레자크 스키장에 위치하고 있다. 영화 속 레스토랑을 덮친 산사태가 걱정된다고? 식당 테라스는 세트이고 눈사태는 캐나다의 눈사태를 합성한 거다. 리조트 비용만 빼면 안전은 걱정 마시라.

언제든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파리 생투앙 벼룩시장

우디 앨런에게는 타임워프도 SF장르에서 볼법한 복잡한 그 무엇이 아니다. 그저 파리 밤거리에 등장한 구형 푸조 한대를 타는 순간 1920년대로 가 헤밍웨이와 논쟁을 벌이는 것도, 벨 에포크 시대로 진입하는 것도 모두 가능하다. 대신 과학의 영역 너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영화 속 파리를 재현해줄 실제 파리의 장소들이 그만큼 중요해진다. 19세기 말 문을 연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생투앙 벼룩시장(Saint-Ouen flea market)은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미드나잇 인 파리>(2011)를 상징해주는 곳이자, 2011년 현재 시점의 길(오언 윌슨)의 로맨스가 시작되는 곳. 100년 넘는 고가구와 오래된 LP판, 고서적 같은 물건이 거래되는, 말 그대로 ‘시간의 박물관’이다. 무려 7만m2 부지에 14개의 개별 시장과 2500여개의 상점이 골목골목 늘어서 있다. 과거 넝마주의의 주거지로 ‘빛의 도시의 어두운 지역’으로 불렸던 역사를 지나 지금은 전세계 골동품 수집가들이 손꼽는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생투앙 시장이 위치한 파리 북구 클리낭쿠르역에 내리면 약간은 지저분한 데다 치안도 허술해 보여 깔끔을 떠는 길의 여자친구 이네즈(레이첼 맥애덤스)의 심정이 되다가도, 벼룩시장으로 진입하는 순간 길이 첫눈에 호감을 가지는 빈티지 레코드숍 점원 가브리엘(레아 세이두)을 만나는 기분이 될 것이다. 시간여행지로는 딱이다.

애덤 리바인이 <Lost Stars>를 부른 곳

<비긴 어게인>의 뉴욕 그래머시 시어터

영국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그레타(키라 나이틀리)와 데이브(애덤 리바인)에게 뉴욕은 낯설지만 꿈으로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데이브가 메이저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바빠지면서 둘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둘은 끝내 이별을 겪는다. 하지만 그레타의 빈자리를 느낀 데이브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자신의 콘서트에 초청한다. 영화에서 데이브가 멀리서 구경하는 옛 여자친구 그레타의 존재를 느끼면서, 자신의 진심을 담아 <Lost Stars>를 부른 곳은 바로 뉴욕 맨해튼 23번가에 있는 그래머시 시어터(Gramercy Theatre)다. 그때만큼은 영화 속 데이브가 아니라 무대 위의 애덤 리바인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무려 1937년에 지어진 이곳은 500석 정도의 적은 규모이지만 오랜 세월 재개봉관이나 예술영화 상영관 등으로 계속 모습을 바꿔가며 뉴욕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퓨지스의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뮤직비디오가 이곳에서 촬영됐으며(왠지 <비긴 어게인>의 마지막 장면과도 어울리는 제목!) 2000년대 초반에는 각각 신상옥,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2006년 재개관을 하면서는 음악 공연도 가능하게 됐는데, 이미 대스타가 된 데이브가 자신의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한 장소로는 최적의 무대였을 것이다.

풋풋한 데이트의 그곳

<네이든>의 대만 스린 야시장

잔뜩 주눅 든 채로 대만에서 열리는 수학 올림피아드 캠프에 참가한 영국 소년 네이든(아사 버터필드)은 활달한 대만 소녀 장메이(조양)와 짝이 되고, 네이든은 점점 장메이의 밝은 모습을 닮아간다. 장메이는 네이든의 손을 잡아끌고 대만 시내 곳곳을 쏘다니며 잠깐의 일탈을 만끽한다. 낯선 풍경, 낯선 음식, 낯선 사람, 그리고 낯선 감정 사이로 네이든의 마음이 움직인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이어온 스린(士林) 야시장의 활기 띤 정취로, 이국의 소녀는 소년의 가슴에 천천히 젖어든다. 스린 야시장은 대만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역사가 깊은 시장이다. 상가 지하의 푸드코트에선 대만식 튀김, 꼬치요리, 철판요리 등 대만의 각종 길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네이든과 장메이가 사이좋게 나눠먹은 닭꼬치도 이곳의 음식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