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그 탱크 좀 짠하더라
2015-09-30
글 : 이주현
사진 : 백종헌
천성일 감독, 강종익 시각효과 슈퍼바이저, 이재혁 촬영감독에게 듣는 <서부전선> 제작기
천성일 감독, 강종익 시각효과 슈퍼바이저, 이재혁 촬영감독(왼쪽부터).

“영화보다 이게 더 코미디 같은데?” <서부전선>의 제작과정을 회상하던 세 사람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현장이, 오늘의 대담이 얼마나 코미디였는지. 이건 결코 욕이 아니다. 천성일 감독의 말처럼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사는 게 다 코미디”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웃을 일이 더 많이 필요하니까. <서부전선>은 드라마 <추노>(2010)의 각본가이자 영화 <7급 공무원>(2009),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 2014) 등의 시나리오작가로 유명한 ‘이야기꾼’ 천성일의 감독 데뷔작이다. 한국전쟁 종전을 3일 앞둔 1953년, 남한의 늙은 병사 남복(설경구)과 북한의 소년 병사 영광(여진구)의 이야기인 <서부전선>은 코미디를 경유해 전쟁의 비극에 다다르는 작품. 멋부리지 않았으나 멋있는 대사,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두 배우의 연기 케미스트리, 몸개그부터 엇박의 상황 코미디까지 관객의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는 영화적 리듬 등 장점이 두루 많은 휴먼 코미디다. 영화가 언론에 처음 공개된 날, 천성일 감독과 <해적> <서부전선>의 시각효과를 담당한 덱스터의 강종익 본부장, <7급 공무원>의 조명감독이었고 <서부전선>의 촬영감독인 이재혁 촬영감독이 한자리에 모였다. 잘나가는 멋진 형, 진지한데 웃긴 둘째, 언제나 해맑은 막내, 그렇게 분명한 캐릭터를 지닌 세 사람이 들려주는 <서부전선> 제작기를 전한다.

천성일_<7급 공무원>을 통해 이재혁 촬영감독을 처음 만났다. 그때는 조명감독이었는데, 현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웃으면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일은 안 하는 것 같은데 조명은 잘 나오고, 그런 사람이었다. 강종익 감독님과는 <해적> 때 인연을 맺었다. 그땐 진짜 안 친했다.

강종익_<해적> 때는 만나면 서로 예의 바른 인사만 나눴다.

천성일_<서부전선> 하면서 참 좋은 형이라는 걸 알게 됐다.

강종익_천 감독도 알고 보니 진국이더라.

<서부전선>

천성일_이분(강종익)이 셋 중 유일한 1960년대생인데, 셋 중 제일 젊어 보이지 않나. 그래서 별명이 ‘막내형’이다. 강종익 형이 1969년생, 나는 1971년생, 이재혁 촬영감독이 1973년생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키 크고 잘생긴 사람 옆엔 가지 않는다. (이재혁 촬영감독을 바라보며) 5등신 체형을 좋아한다. (웃음) 어쨌든 처음엔 경계했지만 영화 작업하면서 처음으로 내게 이상한 경험을 안겨준 분이 강종익 감독님이다. 보통은 VFX 담당자들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프리 비주얼 작업을 한다. 그런데 강종익 감독님은 <해적> 때 시나리오에도 없는 내용을 직접 만들어오셨다. 신 하나를 본인이 직접 만든 거다. 그게 벽란도 장면에서 수레 굴러가는 장면이다. <서부전선> 때도 프리 비주얼 작업을 하면서 이런 상황이나 장면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고 아이디어를 많이 주셨다.

이재혁_<서부전선> 시나리오는, <7급 공무원> <추노> <해적>의 각본을 쓴 감독님의 작품이라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읽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코미디가 아니었다. 감독님은 제법 진지하게 이건 정통 전쟁영화라고 하시고, 난 아무리 읽어봐도 코미디영화 같고…. 처음엔 정말 헷갈렸다. ‘에잇, 내가 머리가 나쁜 건가’ 싶어서 나중엔 김창주 편집감독한테 “형, 이것 좀 읽어봐. 난 도저히 모르겠는데, 감독님이 정통 전쟁영화래. 맞아?” 했더니 “아니지, 임마~!” 그러시고. (웃음) 난 정통 전쟁영화라는 말에 <서부전선>에 합류하겠다고 한 건데….

천성일_<서부전선>에는 전장에 있을 법한 거의 모든 종류의 군인들이 나온다. 용감한 군인, 비겁한 군인, 정치적인 군인, 사람 목숨 귀하게 여기는 군인 등 가장 현실적인 군인들의 모습을 영화에 담으려 했다. 과장하지 않고서.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정통 전쟁영화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영화 코미디예요’ 하면 촬영감독이 거절할 것 같기도 했다. 이재혁 촬영감독에게 먼저 러브콜을 보낸 이유는, 일단 체형이 마음에 들었다. (웃음) 두 번째는 조명감독 출신이라는 거였다. 10년 넘게 조명 일을 해왔기 때문에 빛을 잘 이해하고 있는 촬영감독이다.

강종익_전쟁영화엔 필연적으로 전투를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서부전선>은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쟁 묘사에 집중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남복과 영광, 두 인물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쟁영화라고 생각했다. 시각효과 작업을 하면서도 이를테면 피의 묘사보다 전체 상황을 살피는 게 중요했다.

강종익 시각효과 슈퍼바이저

천성일_<7급 공무원> 마지막 촬영일이 2008년 12월31일이었는데, 그날 <서부전선>의 시나리오를 하리마오픽쳐스의 강민규 PD에게 보여줬다. 그 뒤로 이 시나리오가 참 많은 감독들을 거쳐갔다. 일부 투자가 되어 있는 상황인데도 묘하게 상황이 틀어져 영화 제작이 진척되지 않았다. 사실 그러다 조용히 덮는 시나리오도 많다. 그런데 이건 그냥 덮을 수가 없더라. 애정이기도 했고, 고집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내가 연출을 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쉽게 얘기하면 ‘감독은 상당히 아쉬운데 그래도 배우가 설경구와 여진구니 어떻게 되지 않겠어?’ 하는 생각들을 했던 거다. (웃음) 인디언 속담에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된다’는 말이 있지 않나.

강종익_그래? 확인하기 힘든 말을 하고 그래.

천성일_인디언 속담 아닌가? 아무튼 <서부전선>은 내가 받아야 하는 아이구나 싶었다. 사실 연출을 고사하고 말고 할 상황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들 나를 고사했지. 제작사와 투자사쪽에서. (웃음) “제가 연출을 해보면 어떨지….” “연출 같은 거 안 한다며.” 이런 분위기? 그래도 글을 썼으니 잘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들으면,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연출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다만 크게 다른 길로 벗어나진 않을 것 같다’고 답했던 것 같다. 감독으로서 현장에 나갈 땐 그런 마음이었다. 경천동지할 영화를 만들어 내가 누구인지 세상에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절박한 각오. 16년 동안 영화 일을 했는데 창피하긴 싫다는 자존심.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흘러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영화는 그렇게 목숨 걸고 하는 게 아니라는 담담함. 그 감정들 사이에서 스스로 계속 싸웠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을 정했다. 만드는 사람이 재밌어야 한다고. 촬영감독한테도 그랬다. “우리 재밌게 찍어요, 담담하게 찍어요.” 그래놓곤 촬영 첫날 지각했다. (웃음)

이재혁_설경구 선배님이 “쟤는 처음 (연출) 하는 애 아냐” 그랬다니까.

천성일_아침 8시 첫 촬영이었다. 한 시간 전에는 현장에 나가서 촬영감독과 얘기도 하고 리허설도 해야 하는데, 전날 굉장히 마음 편하게 잠을 잤다. 현장에 도착하니 정확히 7시58분이었다. 촬영감독이 앵글 다 잡아놓고 리허설도 다 끝내놓았더라.

이재혁_굉장히 의연하게, 마치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을 뿐인데 다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냐는 듯한 편한 얼굴이었다.

천성일_그렇게 말하면 진짜 생각 없는 사람 같잖아. (웃음)

이재혁_나 역시도 <서부전선>이 촬영감독으로선 두 번째 작품이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천 감독님은 진짜 열 작품 한 분처럼 차분했다. 뭔가 헤매고 있으면 와서 스윽 정리해주고 갈 때가 많았다.

이재혁 촬영감독

천성일_정확히 말해 의연했던 건 아니다. 스탭들이 든든했던 거지. 촬영장엔 많은 감독들이 있다. 촬영감독, 조명감독, 무술감독, 미술감독, 비주얼 슈퍼바이저…. 혼자서 다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루매트를 치고 촬영할 땐 강종익 감독님한테 “이건 형이 더 잘 알고 계시니 형이 찍어주셨으면 해요” 하고 말했다. 내가 강종익 감독님보다 기술적으로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니까. 그럴 땐 믿고 맡기면 된다. 물론 그전에 충분한 신뢰가 쌓인 관계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러면 또 강종익 감독님은 현장에서 집요하게 촬영하신다. 절대 쉽게 오케이 내는 법이 없다. 곧 해 떨어질 것 같은데도. (웃음) 그렇게 멋진 장면을 만들어주셨다. 무스탕기 추격전 같은 경우는 강종익 감독님이 연출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강종익_그렇진 않다. 함께 만들었다. 결정의 권한이나 판단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면 그만큼 신나게 일하게 된다. 나를 믿어준 거니 그만큼 책임감 있게 잘하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서부전선>에서 가장 고생하며 만든 전쟁 신이 편집에서 잘려나갔다. 합천세트장에서 찍은 남복의 전투 신인데, 세트장쪽에서 폭파하지 말고 연기 피우지 말고 총 쏘지 말고 촬영하라 해서, 폭파 없이 연기 없이 총 없이 찍은 장면이었다. 우리끼리는 환경을 생각하며 찍었다고 해서 ‘에코 촬영’이라 했는데, 그런 촬영은 또 난생처음이었다.

천성일_다른 영화에 비해 VFX의 분량은 적었을지 몰라도 지금까지 참여한 영화 중 제일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일 거다. 탱크 때문에 고생한 날도 많았다. 처음엔 동구권에서 들여오려다 실패하고 결국엔 국내에서 촬영용으로 자체 제작을 했다. 탱크 촬영 첫날, 드디어 탱크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촬영감독이 나를 저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탱크에 시동이 안 걸립니다” 그러는 거다. 그날은 탱크 신만 찍는 날이었는데.

강종익_나한테도 조감독이 와서 “탱크에 시동이 안 걸립니다” 그러더라. 순간 지금 나보고 탱크를 고쳐달라는 건가 싶었다. (웃음)

천성일_탱크에 많은 것을 기대하진 않았다. 언덕길에서 점프하고, 드리프트하고, 제자리돌기도 하고, 포탑도 좀 잘 돌았으면 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시속 10km의 속도도 안 났던 거지. (웃음) 강종익 감독님한테 후반작업으로 만질 수 있냐고 계속 물어가며 찍었다. 아마 현장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돼요?”였을 거다. 결국 나중엔 꿈이 소박해져서 제자리돌기도 필요 없으니까 전진 같은 게 좀 잘됐으면 싶었다.

강종익_탱크가 급정지했다가 급출발도 하고 턴도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VFX의 일이 점점 늘어났다.

천성일 감독

이재혁_지금 남양주종합촬영소에 그 탱크가 있다.

천성일_걔 보면 안쓰럽다.

이재혁_나도 가서 몇번 봤다. 짠하더라.

천성일_촬영 마지막 날엔, 남다른 소회는 없었는데 그간 정이 많이 쌓여서인지 이 사람들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재혁_10년쯤 영화 일을 했지만 스탭들이 이렇게 아쉬워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천성일_그런 얘길 종종 했다. 사람 위에 영화 없다고. 그런 마음이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전염된 것 같다. 스탭들의 가족이 현장 방문하는 ‘패밀리 데이’도 열고 싶었는데 그런 자리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아쉬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종익 감독님은 이 작품을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크랭크업하는 날, 한신 남겨두고서였나. 밥차 아저씨가 100여명의 스탭들에게 통닭을 쐈다. 그러곤 뒷정리 몰아주기 가위바위보를 했다. 제작사 대표님이 20만원의 상금도 걸었다. 이긴 사람이 상금을 받는 대신 뒷정리를 하는 거였는데, 현장에 방문왔던 강종익 형의 형수님이 일대일 토너먼트를 거쳐 결승전까지 올랐다.

강종익_많은 사람들의 응원 속에 와이프가 결승까지 올랐지만 조감독한테 져서 2등 했다. 아깝게 상금을 놓쳤다.

천성일_지나고 나면 이런 시간들이 제일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재혁_작품은 내가 고르는 것이 아니다. 작품이 나를 고른다고 항상 생각해왔는데, 여러모로 <서부전선>은 내게 운명 같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감독님이 입봉에 대한 스트레스와 괴로움이 없지 않았을 거다. 조금 먼저 입봉한 처지에서, ‘어떻게 하면 그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천성일_그래서 요점이 뭐야. (웃음)

이재혁_감독님이 잘되길 바라는 거지.

천성일_처음 하는 얘기지만,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었다. 제작자로 시작해서 시나리오작가가 됐고, 드라마 극본도 썼다. 심지어 이젠 연출까지 하게 됐다. 뭐 하나 제대로 못하고 이것저것 들쑤시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잠시 고민을 했다. 답은 쉽게 내렸다. 나는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야기가 영화에 어울리면 시나리오를 쓸 것이고, 드라마에 어울리면 드라마를 쓸 것이고, 그 대본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에게 연출을 의뢰할 것이고, 내가 꼭 한번 연출하고 싶다는 작품은 연출할 것이다. 규정되지 않은 규정인데, 그렇게 편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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