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합작, 전환기 돌입
2015-11-18
글 : 김성훈
다채롭게 변화하는 한•중 공동 제작 프로젝트
<나는 증인이다>

스릴러의 황무지인 중국 영화시장에 지난주에 핀 한 송이 스릴러영화가 화제다. 지난 10월30일 중국 전역에서 개봉한 한•중 합작영화 <나는 증인이다>(제작 문와쳐, 뉴클루즈 필름•감독 안상훈•출연 양미, 루한)가 개봉 3일 만에 1억2천만위안(약 213억원)을 벌어들이며 비수기 중국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 <블라인드>(2011)를 제작한 문와쳐가 중국 투자제작사 뉴클루즈 필름와 함께 <블라인드>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중국의 인기 배우 양미와 루한이 출연했고, 배급과 마케팅이 잘된 덕분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가운데, <나는 증인이다>의 흥행이 의미가 있다면 한국과 중국이 한국에서 검증된 아이템(이하 IP)을 가지고 공동 제작한 첫 스릴러영화라는 사실이다.

<나는 증인이다>가 흥행하기 전까지 한•중 합작영화는 대체로 <필선>(한국 제목은 <분신사바: 저주의 시작>(2012)) 같은 공포영화거나 <이별계약>(2013) 같은 멜로드라마거나 <20세여 다시 한번>(2015) 같은 휴먼 코미디가 주를 이뤘다. 그간 중국 영화산업에 스릴러영화가 많이 선보일 수 없었던 건 장르의 특성상 잔혹한 범죄 장면이 많아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의 엄격한 심의를 피해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동안 로맨틱 코미디와 가족 드라마가 유행하다가 중국 영화산업이 성장하고, 그로 인해 중국 관객의 눈높이가 올라가면서 중국 영화인들은 다양하고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를 선보여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씨네21> 1028호 특집 기사 ‘일일천리 파죽지세’ 참조). <로스트 인 홍콩>(2015, 16억1천만위안 극장 매출)이나 <전병협>(2015, 11억5900만위안 극장 매출)이나 <도성풍운 2>(2015, 9억7200만위안 극장 매출) 같은 코미디영화 바람이 올해 중국 극장가에 분 것도 그래서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증인이다>가 스릴러라는 새로운 불씨를 중국 극장가에 지핀 것이다.

NEW와 화책미디어가 중국 합자법인 화책합신을 설립했다.

CJ 차이나, 쇼박스 차이나, 화책합신 등 자본의 결합

<나는 증인이다>를 포함해 <이별계약> <20세여 다시 한번> 같은 최근 중국 관객의 사랑을 받은 한•중 합작영화는 과거의 한•중 합작 방식과 여러모로 다르다. 감독, 촬영감독, 특수효과, VFX를 포함한 후반작업 업체 같은 기술 스탭, 배우가 중국영화에 참여하거나 한국과 중국 제작사가 만나 공동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쇼박스와 화이브러더스, NEW와 화책미디어처럼 한국 자본과 중국 자본이 결합하거나 <나는 증인이다> 사례처럼 한국의 IP와 중국의 자본이 결합하고 있다. 또 CJ는 중국 현지에서 직접 자사의 아이템을 중국 시장에 맞게 개발해 중국 관객에게 선보이고 있다. 현재 서극 감독이 연출하고, 주성치가 제작하는 <서유기2>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있는 이치윤 프로듀서는 “그간의 합작 경험을 통해 중국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산업과 한국 영화인들에 대한 학습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 합작 방식이 자본을 중심으로 다양해지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말했다.

여러 합작 방식 중에서도 올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앞에서 짧게 언급한 한국 투자배급사와 중국 투자제작사간의 결합이다. 한국은 투자배급사고, 중국은 투자제작사인 건 양국의 투자사 사업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CJ, 롯데, 쇼박스, NEW 같은 한국의 메인 투자사들이 극장을 확보하고 있거나 마케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투자와 배급이 동시에 가능한 반면, 중국은 투자사가 배급까지 맡는 게 쉽지 않다. 국토가 워낙 넓고, 원선(상영관 가맹점에 영화 콘텐츠를 제공하고 브랜드와 경영관리를 해주는 대신 수수료를 받는 전국 상영관을 뜻한다.-편집자)의 종류가 다양한 데다 지방마다 극장이 많아 원선을 소유하고 있는 완다나 차이나필름그룹, 광고를 직접 제작하면서 지방마다 마케팅 자원을 갖추고 있는 광시엔 같은 회사 정도가 아니라면 투자사들은 투자와 제작만 신경 쓴다. 게다가 중국에서 배급 사업을 하게 되면 수십여명에 이르는 배급 인력들을 관리해야 하는데, 라인업이 없을 경우 그 인력들을 놀려야 하는 탓에 배급 사업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 많은 중국 투자제작사들은 메인 투자부터 완료한 뒤 따로 배급사를 구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

올해 한국의 대형 투자배급사들은 중국 파트너와 함께 중국 현지법인 설립을 발표했다. 지난 3월 쇼박스는 <미스터 고>를 함께 진행하면서 신뢰를 쌓은 화이브러더스와 독점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중국 현지법인 쇼박스 차이나를 설립해 중국 현지에 적합한 시나리오를 개발한 뒤, 쇼박스와 화이브러더스의 투자 결정 과정을 거치고 공동으로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중국 내 마케팅과 배급은 화이브러더스가 맡기로 했다. 쇼박스 차이나는 “아직 밝힐 순 없지만 공동 제작 1호 작품이 촬영이 완료되어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다”라고 전했다. 현재 제작 결정을 앞두고 있는 프로젝트도 서너개 있다고 한다. 쇼박스 해외사업팀 정수진 차장은 “<미스터 고>는 정산을 완료하기까지 약 3년 반 동안 두 회사가 보여준 상호 존중의 원칙과 파트너로서의 깊은 신뢰가 형성됐던 것이 이후 장기적인 협력을 논의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NEW는 화책미디어와 중국 합자법인인 ‘화책합신’을 설립했다. 지난해 중국 화책미디어그룹으로부터 535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지 1년 만에 내놓은 두 회사의 결과물이다. 화책합신은 강풀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마녀>, 올해 여름 시장에 개봉했던 <뷰티 인사이드>, 10월22일 개봉한 <더 폰> 등 세편을 라인업으로 확정했다. 이중 <마녀>는 두 회사가 기획 단계부터 중국 현지에 최적화된 두편의 영화 제작을 목표로 판권을 구매한 사례다. 중국판 <마녀>는 천정다오 감독이 총감독을 맡고, 한국판 <마녀>는 김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화책합신 김형철 공동 총경리는 “화책미디어라는 좋은 파트너가 생겼고, 그들과 함께 한시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보단 장기적으로 함께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며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제작하는 방식은 대체로 공동 제작에 참여하는 두 회사가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파트너십으로 운영되는 반면, 합작법인 방식은 NEW와 화책, 즉 당사자뿐만 아니라 더욱 다양한 파트너와 다양한 전략적 협업을 모색할 수 있다”고 합작법인 설립의 의미를 설명했다. <미스터 고>를 제작한 덱스터는 (아직 밝힐 수 없는) 중국 메이저 투자제작사와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내년 중국 회사들을 상대로 덱스터가 가진 IP를 피칭할 계획도 있다. NEW 김 총경리의 말대로 한국과 중국의 회사가 중국 현지 합자회사를 만든 뒤 기획 단계부터 함께 IP를 개발한다는 점에서 쇼박스와 NEW의 사례는 의미가 크다.

<20세여 다시 한번>

리메이크보다 오리지널 아이템

그런데 한국 자본과 중국 자본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속내는 조금씩 다르다. 최근 중국 영화인들의 한국 시장에 대한 관심은 예전만 못하다. “2017년이 되면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영화 시장이 되는데 한국 시장에서 벌어봐야 얼마나 벌겠는가”가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현재 중국 영화인들의 진짜 관심사는 한국의 IP를 중국 현지 상황에 맞게 개발하거나 오리지널 IP를 발굴해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대륙의 맹주가 되는 것이다. 그게 중국 시장에 나가고자 하는 한국 영화인들과 자본의 욕망이 맞물리면서 한국과 중국이 한배를 탈 수 있는 것이다.

합작회사 방식이든, 전략적 제휴 방식이든, 한시적 공동 제작 방식이든, 공동 제작에 참여하는 한국과 중국 영화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매력적인 IP를 확보하는 것이다. 지난해 말 개봉했던 <태평륜>(감독 오우삼)과 올해 초여름 극장 개봉했던 <양귀비>(감독 장이머우)의 흥행 참패는 스타 캐스팅과 블록버스터가 더이상 중국 관객에게 안 먹힌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다른 중국 회사들도 마찬가지지만, 한•중 공동 제작 프로젝트인 <리얼>을 투자한 알리바바픽처스 역시 IP를 확보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기준은 “중국 관객, 나아가 아시아 관객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소재와 장르인가”다. “책이나 만화, 웹소설 같은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원천 콘텐츠 중에서 인터넷 커뮤니티, 블로그, SNS 같은 소셜미디어 빅 데이터를 많이 참고해 결정한다”는 게 알리바바픽처스 한희주 프로듀서의 설명이다. 한국의 대형 투자배급사가 그렇듯이 중국 투자제작사 역시 투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한희주 프로듀서는 “알리바바픽처스 역시 마케팅은 제작이 완료된 뒤 배급할 때 시작되는 단계가 아니”라며 “알리바바픽처스의 영화 마케팅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알리바바그룹이 가지고 있는 인터넷 기술과 서비스를 기반으로 전통적인 영화 배급과 마케팅을 진행하는 식이다. 알리바바그룹의 전자상거래가 가진 거대한 영향력을 배급과 마케팅의 모든 과정에 투입시킨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IP를 중국 시장에 맞게 리메이크하거나 <이별계약>이나 <수상한 그녀>처럼 하나의 IP를 한국, 중국, 베트남, 일본 등 여러 국가에서 리메이크하는 개발 방식이 많았다면, 앞으로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가진 제작사를 중심으로 공동 제작하는 추세로 바뀔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쇼박스 정수진 차장은 “쇼박스 역시 그동안 배급했던 작품 중에서 현지화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영화 시장으로부터의 수요는 한국영화의 리메이크보다는 오리지널 아이템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 차장은 “아무래도 리메이크 작품은 중국 감독이나 배우들이 작업에 부담을 가지기 쉬운 데다가 우리가 원하는 최상의 패키징이 어려울 수 있어 쇼박스가 주안점을 두고 있는 개발 방향은 한국 시장에서 개발된 오리지널 아이템을 가지고 중국 시장을 우선적으로 겨냥하는 합작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증인이다> 활영현장.

한•중 합작 계속 성장할까

자본과 자본간의 거래가 활발한 반면, 지난해 뜨겁게 달구었던 ‘차이나머니발’ 공동 제작 움직임은 <20세여 다시 한번>, <나는 증인이다>, <역전의 날>(감독 리준•출연 종한량, 이정재), <엽기적인 두 번째 그녀>(감독 조근식•출연 차태현, 빅토리아, 후지이 미나), <나쁜 놈은 반드시 죽는다>(감독 손하오•출연 진백림, 손예진, 신현준) 같은 몇몇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제작 계획만 무성할 뿐 실질적인 진행은 다소 잠잠하다. 서울과 베이징을 수차례 오가는 한국 영화인들이 “올해는 인상적인 한•중 공동 제작 프로젝트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최근 중국 영화산업이 성장하면서 많은 신생 영화사(제작사, 투자사, 배급사)들이 생겨났고, 다른 업종에 있던 기업들도 영화에 투자나 제작으로 참여하게 됐다. 영화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상태에서 한국의 영화인들이 함께 작업을 진행하다보니 크고 작은 마찰을 겪었고, 그로 인해 영화를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도중에 엎어진 프로젝트도 많다. 상대방과 다시는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이를 가는 중국과 한국 제작사도 적지 않다. 뉴클루즈 필름 신아름 프로듀서는 “공동 제작을 결정하기 전에 상대방이 작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지난 10월4일, 중국 정부는 ‘제18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를 마치고 2020년 국가발전 플랜을 발표했다. 예상했던 대로 앞으로 5년간의 경제성장률이 기존의 7%를 고수하는 대신 6.5%를 밑돌지 않을 것이라고 제시했다. 중국 경제가 다소 주춤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영화산업은 당분간 계속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한•중 합작이 지금과 같은 붐을 지속할 거라는 예상은 다소 회의적이다. “이제는 신뢰를 가지고 꾸준히 합작을 진행하는 회사들만이 중국과의 합작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아름 프로듀서의 말대로 한•중 합작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전환기에 이미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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