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한민국에 아직 그런 달달한 게 남아 있긴 하나?” 세상의 밑바닥을 거치며 닳고 닳은 ‘정치 깡패’ 안상구가 정의를 명분 삼는 우장훈 검사(조승우)에게 하는 말이다. 십년 전, <달콤한 인생>에서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묻던 그의 위태로운 소년 같은 얼굴을 기억한다. 복수의 대상을 마주하는 순간, 가장 순수하고 절실한 눈을 했던 외골수 ‘선우’가 세상을 알고 세속적인 인간이 됐다면 이런 모습일까. 십년이 지난 지금, 이병헌은 <내부자들>에서 이 세상에 ‘달콤함’ 따위는 진작 없다는 걸 안 안상구 역으로 돌아왔다. 구성지게 내뱉는 전라도 사투리와 차진 욕, 더 말랐지만 독기어린 혈색이 도는 얼굴로 말이다. 정•재계와 언론 간 유착으로 이루어진 기득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안상구는 비자금 파일을 빼내려다 처절한 응징을 당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이병헌은 안상구를 “약 20년간의 일대기를 통해 한때 조폭으로 최고의 지위를 누리다 나락으로 떨어지고, 구르고 깨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간적 인물”이라고 표현한다. 안상구는 여태껏 그가 맡아온 역할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속물적이며 경박하고, 징글맞기도 하며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모자라”기도 하다. 여태까지는 판타지적으로 상정된 영화 속 인물, 즉 사극의 왕이거나 할리우드의 암살자 혹은 정서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을 주로 맡아온 그다. 순수하거나 낭만적이거나 완벽하거나, 가상의 제련된 인물 같았던 그는 수많은 옷들을 내려놓고 <내부자들>의 거친 현실에 발을 붙여 뼈와 살, 그리고 피가 도는 한 인간이 됐다. 그 중심엔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역할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안상구의 인간적 캐릭터는 그런 마음에서 출발한 그의 아이디어였다. “원래 안상구는 행동대장처럼 강한 캐릭터였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워낙 긴박하고 쉴 새 없이 사건들이 벌어지다보니 한 인물을 통해 관객의 숨통을 틔워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는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우민호 감독에게 제안했고, 감독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사와 지문이 바뀌었고, 현장에서는 애드리브를 해가며 안상구를 만들었다. “모히또 가서 몰디브나 한잔할까?” 같은 코믹한 대사도 현장에서 탄생한 애드리브다. 안상구가 우장훈 검사와 함께 모텔방에 있는 신에서 화장실 벽을 통유리로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남자들끼리 모텔에 있는 상황에서 요상한 화장실 때문에 머쓱해지면 웃기지 않겠나.”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은 “이병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준비가 ,,돼 있다니 놀랐다. (웃음)”고 당시의 소감을 밝혔다.
난생처음 해보는 전라도 사투리 연기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조승우와 동시녹음기사가 전라도 출신이라 끊임없이 대사를 체크받고 이상하게 들리는 부분이 있다면 어휘나 어미를 바꿔가며 연기했다. 힘들진 않았냐고? 영어 연기도 하는데 이 정도야. (웃음)” 그를 고생시킨 건 사투리뿐만이 아니다. 제작실장의 말에 따르면 “웬만한 무술팀보다 무술을 잘한다”는 그이건만 이번엔 때리는 연기보다는 맞는 연기를 더 많이 했고, 멋진 액션보다는 ‘개싸움’을 해야만 했다. “실제 같은 ‘개싸움’이 더 어렵다. 실제 싸움에선 ‘헛방’이 더 많잖나. 비틀거리고 미끄러지는 것도 맞춰서 해야 하니까 쉽지 않더라.”
이런 녹록지 않은 캐릭터를 맡은 데에는 새로운 장르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한국 관객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같은 검찰과 깡패, 비리 등을 선 굵게 다룬 범죄 드라마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난 그런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더라. 깡패가 복수를 한다는 점에서 <달콤한 인생>과 비슷하다고들 하는데, <달콤한 인생>이 판타지에 가까운 영화라면, <내부자들>은 현실을 그려내 양극단에 있는 작품이다.” 그는 “내가 출연한 범죄 드라마는 어떤 색깔일지 궁금했다. 이제 심판대에 오른 기분”이라며 개봉을 앞둔 소회를 밝혔다.
<내부자들>의 이강희(백윤식)는 머리를 굴리지만 한 수 뒤를 생각지 못한 안상구를 “여우 같은 곰”이라 칭한다. 그렇다면, 배우 이병헌은 어떤 존재일까. 우 감독은 그는 “곰 같은 여우”리고 명쾌하게 정의한다. “그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우직한 곰 같다. 딜레이가 돼도 한번도 짜증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가 할 신을 준비한다. 어떻게 짜증 한번 내지 않느냐 물으니, 영화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스탭 모두가 최고의 장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에 언제든 기다릴 자세가 돼 있다고 하더라. 진정한 프로다.” 그런 한편, “막상 연기를 할 때는 여우처럼 영민하게 신을 압도한다”는 그다.
최근 할리우드영화 <미스 컨덕트>와 <황야의 7인>의 촬영을 마친 그는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배우가 해나갈 수 있는 외연도 넓혀가는 중이다. <미스 컨덕트>에서 맡은 청부업자는 미국 배우가 해도 상관없는 배역이었으나 그의 팬인 감독의 러브콜로 출연이 결정되었고, <황야의 7인>에서는 유일하게 칼을 쓰는 캐릭터를 맡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전할 것”이라는 그는 앞으로도 할리우드와 한국 활동을 병행해나갈 계획이며, 양쪽의 차기작을 조율 중이다. “딱히 나만의 연기론 같은 건 없다. 다만,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엔 마음속에 커다란 근심이 있든 기쁨이 있든 간에 전부 다 잊힌다”는 그는 천생 ‘곰 같은 여우’인 배우임에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