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조승우] 고도의 ‘숨은’ 연기
2015-11-23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내부자들> 조승우

“세번을 거절했다.” <내부자들>에서 검사 우장훈 역의 출연 제의를 받고 조승우는 거듭 고사했다고 한다. 검사 역도, 경상도 방언도, 또 백윤식, 이병헌과 같은 연기 잘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위치하는 것도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민호 감독님이 어디가 마음에 안 드냐며 계속 시나리오를 고쳐 오시더라. 주변 사람들도 왜 이 영화 안 하냐고 연락이 많이 오고….” 늘 빨리 결정하고 단호하게 의사를 밝히는 조승우의 평소 스타일대로라면 <내부자들>은 이상하게 끈질긴 인연이 된 작품이었다. “생각해보니 그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더라. 영화 <말아톤>(2005)과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때가 딱 이랬다. ‘내 능력 밖이야, 절대 이거 못해’라고 했는데, 하게 된 작품들이었다.” <말아톤>은 <타짜>(2006)와 함께 조승우의 최고 흥행작 중 하나, 그리고 <지킬 앤 하이드>는 그를 당대 최고의 뮤지컬 배우로 각인시켜준 중요한 작품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보자면 <내부자들> 역시 지금의 조승우가 대중적으로 더 도약하게 될 그래프 선상에 놓인 작품이 아닐까. “제대한 지 5년쯤 됐는데, 돌아보니 늘 내가 원했던 것만 해왔더라. 스스로 ‘후회할 작품은 하지 말자, 그래야 과정도 즐겁다’ 이런 주의라서 그랬는데, 그래서인지 솔직히 흥행은 썩 좋지 않았다. 이번엔 ‘객관적인 눈도 믿어보자, 주변 사람들 의견도 따라보자’ 싶었다.”

<내부자들>의 우장훈은 백 없이 제 능력으로 검사 자리까지 올라와 그걸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출세 지향적 인간이지만, 그 칼날이 결국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점에서, 세속적이지만 평범한 우리 시대 영웅에 가까웠다. 정치 깡패 안상구(이병헌)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된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가 복수를 위해,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내지르는’ 캐릭터라면, 우장훈은 그들 곁에서 똑같은 힘을 견지하되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아야 했다. <내부자들>을 구성하는 팽팽한 트라이앵글 중 한 꼭짓점을 차지하되 고도의 ‘숨은’ 연기를 해야 했다. “이병헌, 백윤식 선배처럼 스파크가 튀는 역할은 아니고 완급 조절이 중요했다. 어려운데 밋밋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할까. 그런 점이 결국 나를 도전하게끔 만들더라.” <퍼펙트 게임>(2011) 때 자그마한 체구의 조승우가 금테 안경 하나로 최동원 선수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가져와 스크린을 빈틈없이 채울 때 보여줬던, 배우 조승우의 저력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왜소함을 보완하려 이번엔 부러 살을 더 찌웠고, 우장훈의 말투를 위해 전형적인 경상도 방언이 아닌 경상도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살며 변형된 계통 없는 언어를 마스터하며 우장훈의 외적 스타일을 완성했다.

<내부자들>은 배우의 존재감으로 온전히 스크린이 꽉 차는 영화다. 상대역인 이병헌과의 합이 더해지면서 좋은 배우를 맞닥뜨렸을 때 관객의 만족도가 어느 정도로 최고치에 오를 수 있는지 고스란히 입증해낸다. <암살>(2015)의 독립투사 김원봉의 짧은 등장과 긴 파장에서, 그리고 <사도>의 O.S.T를 부르며 그 먹먹한 감정을 노래로 어루만질 때 느꼈던 흥분을 이번엔 영화 내내 마음껏 섭취할 수 있다. 그 충만감의 정체는, 그간 스크린에서 주춤했던 조승우에게 관객이 갈증을 느껴왔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영화를 일부러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다. 뮤지컬 <헤드윅> <지킬 앤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가 10주년 기념공연이었고, <베르테르>는 15주년이니까. 어릴 때부터 뮤지컬이 내 꿈이었다. 그사이 영화도 하고 드라마도 했는데 흥행이 안 돼서 그렇지. (웃음)”

조승우는 그럼에도 그간 영화계를 지켜보며 가져온 심경을 토로한다. “최근 영화를 보면 솔직히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할 정도로 한숨이 나오는 작품이 많았다. 똑같은 스타일, 똑같은 배우들, 똑같은 이야기. 내겐 자극이 안 되더라. 신선한 자극이 필요했다.” 제대 복귀작으로 남들이 보기엔 모험이지 싶은 구혜선 감독의 <복숭아나무>(2012)에 하나의 몸을 가진 샴쌍둥이 역을 택한 것도, 그의 기준으로는 더없이 타당한 선택이었다. “누가 목만 가지고 연기하겠나. 너무 새로웠다. 지금껏 그런 소재는 다룬 적이 없었다. 시나리오 보고 바로 결정했고, 즐겁게 잘 찍었고, 감정들도 잘 나온 것 같다.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조승우에게 주연과 조연,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이제 30대 중반이 넘었으니 작품 선택을 신중히 하라는 충고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난 지금 안 하면 영화 안 들어올까봐 불안하다거나, 커리어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은 없다. 지금 집에 가서도 시나리오 좋으면 바로 결정해서 할 거니까. 주연, 원톱, 그런 거 상관없고 조연이라도 뭐든 한다. 단막극도 찍었고, 독립영화도 해보고 싶고 다 해보고 싶다. 그러니 난 참 꾀기 쉬운 배우다. (웃음)”

<맨 오브 라만차>가 끝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베르테르>로 공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내부자들>의 개봉까지 겹쳐, 조승우는 “지금이 연기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바쁜 나날”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스크린에서든 무대에서든, 그의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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