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오래 볼수록 맛있는 멜로드라마의 거장
2015-12-16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나루세 미키오 감독 회고전, 12월20일부터 내년 2월2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 부산 영화의 전당,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부운>

일본 멜로드라마의 거장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회고전이 내년 2월28일까지 열린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부산 영화의 전당, 한국영상자료원과 공동으로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을 개최한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대표작 26편이 상영되는 이번 회고전은 그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1905년생인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총 90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쇼치쿠 가마타 촬영소 영화 스탭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이후 도호영화사 전속감독이 되었고 그의 작품 대부분은 도호영화사에서 제작되었다. 그의 무성영화 작품들 상당수는 필름 프린트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므로 이번 회고전에서 마련된 목록은 사실상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중요 작품이 망라된 규모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의 인생사를 그린 대표작 <부운>

이번 회고전에는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1930∼40년대 나루세 미키오 감독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 그의 영화들은 멜로드라마, 코미디, 사극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고 소재도 전통음악, 전통극, 떠돌이 극단, 궁술 등 다채롭다. 첫 유성영화 <세자매>(1935), <쓰루하치 쓰루히로>(1938), <일하는 가족>(1939) 등 1930년대 영화들은 이전 무성영화 시기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어 무성영화 미학과 소리가 결합된 느낌이 강하다. 초기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떠돌이 배우>(1940)는 떠돌이 극단에서 말탈 안에 들어가 연기하는 두 단역배우의 이야기가 중심인 코미디물이다. 두 사람은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말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급기야 진짜 말 앞에서 말 연기를 펼친다. 진짜 말은 혼비백산하여 우리에서 뛰쳐나와 도망가고 두 배우가 연기하는 가짜 말은 진짜 말을 뒤쫓아가며 행인들을 겁준다. <버스 차장 히데코>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 다수 출연한 다카미네 히데코가 신인 시절이던 17살에 출연한 작품이다. <산주산겐도 궁수 이야기>(1945)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로는 드물게 사극인데 궁술대회 우승을 목표로 한 젊은이의 도전기를 그리고 있다. 동시대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등 다른 감독들의 사극 작품과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어 이채롭다.

<흐르다>

1950∼60년대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전성기로 자신만의 멜로드라마들을 선보인다. 여성 멜로드라마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이 시기 작품들은 소재별로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부부의 갈등과 화합 등을 다룬 일련의 작품이 그 한 가지인데 여기에는 보통 ‘아내 이야기 3부작’이라 불리는 <밥>(1951), <부부>(1953), <아내>(1953) 등이 속한다. 세 작품 모두 일상의 권태를 느끼는 부부가 우연한 일을 계기로 오해하고 갈등하다가 시간이 흘러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비슷한 이야기다. <밥>은 ‘밥’처럼 매일 마주하지만 특별히 흥미로울 것은 없는 부부의 집에 젊은 조카가 찾아오면서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부부가 주인공인 작품에서도 여성의 심리에 초점을 두고 전체 사건을 펼쳐나가는 특징이 있다. <취우>(1956), <아내의 마음>(1956)도 부부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취우>는 서로 소원해진 부부가 새로 이사 온 옆집 부부를 통해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로 부부가 공놀이를 하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산의 소리>(1954), <안즈코>(1958), <흐트러지다>(1964)는 미묘한 관계에서 펼쳐지는 심리적인 긴장을 그려낸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아버지와 딸, 시동생과 형수라는 이 영화들의 인물관계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위태롭게 느껴지지만 나루세 미키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성격처럼 표면적인 폭발을 억제하고 긴장을 수면 아래로 끌어내린다. <산의 소리>에서 시아버지는 애정이 없는 아들과 함께 사는 며느리에게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일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시종일관 매우 잔잔하고 맑은 분위기이지만 표현되지 않은 감정의 흐름은 충분히 감지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이 원작이다.

<야성의 여인>(1957)과 <방랑기>(1962)는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 영화들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여러 차례 영화화했다.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방랑기>는 카페에서 일하는 가난한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을 따라 나서지만 결국 홀로 남게 되는 인생 유전을 생생하게 그린 영화다. 두 영화의 여성들 모두 남자에게 버림받고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지만 좌절하지는 않는다. 나루세 미키오 영화 속 여성들은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불쌍한 여인들도 아니다. 자신이 떨어진 땅을 담담하게 다시 딛고 일어서서 묵묵히 앞을 향해 다시 걸어가는 여성들이다. 게이샤집 여주인과 카페 마담이 주인공인 <흐르다>(1956),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에도 같은 부류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세계, 여성 캐릭터의 진수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로 동시대 다른 어떤 일본 감독과도 차별되는 독특한 정서가 가득하다.

<산의 소리>

<흐르다>는 몰락하는 게이샤집 여주인과 그녀의 딸, 그 집에 속한 여성들, 가정부 등 다양한 여성들이 한집에 모여 사는 모습을 그린다. 여주인은 과거 자신이 배신한 남성에게 돈을 빌리러 가기 위해 가장 화려한 옷을 차려입기도 하지만, 돈 때문에 자존심을 내버릴 수는 없어 마음에 들지 않는 남성을 식당에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다지 넓지 않은 집에는 여성 인물들 각자의 사연이 뒤엉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주인과 가정부 사이에 형성되는 연대감도 매우 섬세하게 그려진 수작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여주인공은 나루세 미키오가 그리고자 하는 여성의 표본이다. 카페 마담인 여주인공은 가게 적자 때문에 주인에게 매일 시달리고 외상값을 받기 위해 전전긍긍하지만 도무지 타개책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라는 말은 여주인공이 삶에 지쳐 쓰러질 지경인 날에도 그날의 삶을 위해 카페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말한다.

<부운>(1955)은 나루세 미키오의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이자 멜로드라마의 정수다. 나루세 미키오 영화 중 가장 스펙터클한 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동남아에서 도쿄, 일본의 남단까지 여러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점령지였던 동남아 섬에서 만난 두 남녀의 질기고 기구한 인연을 그린 대하드라마다. 여자는 만날 때 이미 유부남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둘은 결혼을 약속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남자는 허망하게 약속을 저버린다. 실망한 여자는 나락으로 떨어진 생활을 하지만 남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마침내 남자가 일본 남단 섬으로 발령을 받아 떠날 때가 되어서야 둘은 오롯이 남게 된다. 화려한 도시나 번듯한 집에서는 절대 허락되지 않았던 둘의 결합은 전기도 없고 일년 내내 비가 오는 섬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이 작품 역시 하야시 후미코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권적운>(1958)도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첫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사는 여주인공은 우연히 알게 된 신문사 기자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여자는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자신의 애정을 감추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부운>과 <권적운> 모두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결론은 사뭇 다르다. <부운>이 뜬구름 같은 한 여성의 인생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면, <권적운>은 일시적으로 하늘을 덮은 구름처럼 한때의 폭풍 같은 연정이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을 담는다. 나루세 미키오의 멜로드라마 속 남성들은 무미건조하거나 우유부단하고 지질한 인물이 대부분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옛 연인들은 대부분 돈을 꿔달라고 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남편들은 아내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둔한 남성들이다. <만국>(1954)의 여주인공은 옛 연인에게 실망하는 가장 강렬한 예라 할 수 있다. 가장 드라마틱한 멜로드라마 <부운>의 남자주인공 역시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하며 바람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인공은 그를 향한 일관된 정념을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멈추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유작 <흐트러진 구름>(1967)은 이례적인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주인공은 우연히 남편을 죽인 남자와 만나게 되고 그에 대해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을 품게 된다.

화려하지 않은 오묘한 조화

담담하고 성숙한 나루세 미키오의 멜로드라마는 자신만의 확실한 색을 가지고 있다. 두드러지게 화려하거나 진한 색이 아니어서 언뜻 보면 오묘한 조화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지만 두고두고 볼수록 맛있고 멋있는 멜로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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