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STEP 01 초급. 지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2016-01-19
글 : 이주현
반드시 알아둘 것, 똑바로 알아둘 것
<26년>

5•18 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 고 김근태 의원의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사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5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이 작품들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직접적으로 비추는 거울 같은 영화다. 역사를 재현하고 변형하는 방식이 인상적인 3편의 극영화와 각자의 방식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에 다가간 2편의 다큐멘터리가 던지는 교훈은 명확하다. 아픈 과거를 기억하라는 것. 똑바로 기억하라는 것.

<26년>

강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26년>(2012)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현재로 소환해 비극을 초래한 ‘그 사람’(이라 쓰고 전두환이라 읽는다)을 단죄하는 영화다. 5•18 민주화운동과 연관된 조직폭력배, 국가대표 사격 선수, 현직 경찰, 대기업 총수, 사설 경호업체 실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암살’이라는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다. 실화/역사에서 출발하지만 영화적 상상력이 현실 논리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26년>은 역사를 다룬 영화로서 독특한 지위를 얻는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영화가 대신 청산하려는 의지, 즉 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26년>엔 담겨 있다. 영화 제작 과정에는 ‘보이지 않는 손’의 방해도 있었다. 제작자인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는 말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길 원하지 않는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개인들이 있었다. 결국 그 개인들이 이겼다. <26년>은 영화를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개인들의 힘(크라우드 펀딩)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해방 이후 한반도는 분열에 대한 불안으로 뒤숭숭했다. 사상과 민심이 분열됐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나라 또한 두 동강 났다. 1947년 3•1 경찰 발포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에도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엔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한다”는 소개령이 내려졌고, 11월엔 계엄령이 선포돼 중산간마을이 불탔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오멸 감독은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 2012)를 통해 영문도 모른 채 산속으로 피신했다 그대로 고립되고 학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큰넓궤동굴에 모여 감자를 나눠 먹고 집에 두고 온 돼지 걱정을 하는 마을 주민들, 영혼이 증발해버린 듯한 토벌대 군인들, 아직도 제주 땅을 떠돌고 있을 가엾은 영혼들을 위한 씻김굿이 바로 <지슬>이다. ‘연도’와 ‘인명’과 ‘사건’에 기반한 역사적 설명은 없지만 <지슬>은 그 자체로 훌륭한 역사영화다.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 영화적 언어로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제주의 언어, 제주의 풍경이 이토록 먹먹한 역사로 다가오긴 처음이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송신도 할머니는 1922년 충남에서 태어났다. 정략결혼이 싫어 결혼 첫날밤 집을 나왔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 열여섯. “전장에 가면 결혼하지 않고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중국으로 끌려가 위안부로 살게 된다. 몸과 마음에 셀 수 없는 상처들이 생겼다. 그 상처를 안고 일본에서 살았다. 그리고 일본 정부와 싸웠다.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에서 생존해 살고 있는 유일한 위안부 피해 여성이다.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7)는 송신도 할머니가 그녀를 지지하는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과 함께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10년간 법정 투쟁을 벌인 이야기를 따라간다. “바보 같은 전쟁 두번 다시 하지 마라!”고 시원하게 발언하는 할머니, “사람의 마음은 한치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사람을 믿지 않아”라고 톡 쏘아붙이는 할머니, “재판에 졌지만 내 마음은 지지 않아”라고 말하는 멋진 할머니를 보노라면, 할머니의 가슴에 또 다른 상처를 안기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에선 할머니들의 마음 다칠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제대로 된 ‘사죄’는 정말 요원한 걸까. 아닐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끝까지 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싶은 것>

<그리고 싶은 것>

권윤덕 작가는 2007년 ‘한•중•일 평화 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그녀는 3국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위안부 문제를 그림책의 주제로 꺼내든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통해 평화를 얘기하려는 권윤덕 작가의 결정에 일본은 난색을 표한다. <그리고 싶은 것>(2012)은 권윤덕 작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인 심달연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 <꽃할머니>를 출간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영화엔 성폭력을 경험한 두 여성 심달연 할머니와 권윤덕 작가가 등장하는데, 권윤덕 작가는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영화는 권윤덕 작가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꽃할머니>는 심달연 할머니와 권윤덕 작가를 잇는 매개인 동시에 한국과 일본,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를 잇는 매개가 된다. 결국 영화는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쟁의 참상을 직시하지 않으면 전쟁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현재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 남은 생존자는 46명이다.

<남영동1985>

<남영동1985>

고 김근태 의원의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만든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1985>(2012)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김근태가 19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간 당한 고문을 응시한다. 영화 속 인물 김종태는 다짜고짜 고문실에 끌려가 거짓진술을 강요받고 고문받는다. 지독하게 반복되는 고문을 끈질기게 묘사하는 영화는 관객을 고문실 안의 세계로 끌어들여 보다 직접적인 간접체험을 하게 만든다. 5공 정권의 이중적이고 야만적인 행태는 이근안을 모델로 한 이두한을 비롯해 영화 속 고문 기술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난다. <남영동1985>는 민주화 투사 김근태의 이야기를 빌려 야만의 시대를 고발하는 영화다. 영화 개봉 시점인 2012년 11월, 18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 정지영 감독이 인터뷰(<씨네21> 880호)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지금 우리가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는 부분이 과거사다. 대통령 후보들의 인식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박근혜 후보가 이 영화를 보기 바랐다. 사람인 이상 함께 아파하고 눈물이 나지 않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았을까. 눈물을 흘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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