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를 위한 대안 역사 영화 가이드를 통해 지금의 현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 상식을 쌓았는가. 그렇다면 이번 단계에서는 역사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태도를 확장해보자. 중급자에게 권하고 싶은 이 다섯편의 영화는 제목과 내용만 보아서는 역사와 큰 연관이 없어 보이기도 할 거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 작품은 역사에 관한 논쟁이 여전히 첨예하고 뜨겁게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잊지 말아야 할 태도와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
“적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해줘. 미안하다고 한번 말하는 걸로는 부족해. 적어도 세번 이상은 미안하다고 해.” 곤히 잠든 딸의 코트 주머니에서 금자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발견한다. 금자가 유괴살인죄로 교도소에 복역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딸 제니는, 13년 만에 비로소 만난 엄마에게 왜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길 원한다.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자신의 사정 때문에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게 된 이들에 대한 금자의 태도다.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길 원한다면, 사과를 받아야 할 상대방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먼저 주의깊게 헤아릴 필요가 있다. “제니, 아임 써리. 아임 써리. 아임 써리. 정말로 아임 써리.” 네번의 사과가 13년간의 세월을 보상해주지는 못하지만, 금자는 딸이 원하는 방식 그대로의 사과를 그녀에게 했다.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말하며 피해자들이 요청한 적도 없는 재단 사업을 위해 10억엔을 투자하겠다는 이웃 나라 총리와 그걸 용인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과의 방식이다.
<메멘토>
자꾸만 잊어버린다. 10분 뒤면 머리가 백지장처럼 깨끗해진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메멘토>(2000)의 레너드가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 선택한 건 사진과 문신이다. 그는 아내를 죽인 자를 쫓으며 자꾸만 아득해지는 기억을 부여잡기 위해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장소와 사람을 찍고, 더더욱 중요한 정보는 잊지 않기 위해 문신으로 몸에 남겨둔다. ‘기록’에 있어서라면 레너드 못지 않은 집요함을 보이는 이가 바로 ‘수첩공주’란 별명을 지닌 지금의 대통령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회의에 참여하든 메모하는 습관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녀는 왜 10년 전 역사에 대해 자신이 했던 말과 정확히 반대되는 정책을 추진하려 하는 걸까. “어떤 정권이 ‘역사를 막 다루겠다’ 하게 되면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그 정권의 입맛에 맞게 하지 않겠냐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고, 또 그 말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얘기도 됩니다.” 놀랍게도 이 말은 2005년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했던 말이다. 10년 전 자신이 반대했던 역사의 국정화를 다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기어코 추진하겠다는 그녀에게 <메멘토>를 권하며 묻고 싶다. 당신은 혹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게 아닐까. 혹은, 레너드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던 ‘그’ 페이지를 일부러 찢어버린 건 아닌지.
<12인의 성난 사람들>
“빨리 끝내고 갑시다! 난 오늘밤 야구경기를 보러 가야 해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어느 살인사건의 배심원으로 모인다. 그들은 아버지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소년의 유죄 여부를 가려내야 한다. 모든 정황이 소년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11명의 배심원이 유죄를 주장하고 단 한명의 배심원만이 소년의 무죄를 주장한다. 명배우 헨리 폰다가 연기하는 이 한명의 배심원은 논리와 이성을 무기 삼아 다른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국 TV드라마 연출자였던 시드니 루멧의 화려한 영화계 입성을 알리는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은 하나의 중요한 사안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기까지 치열한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이건 비단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에만 필요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역사학자의 90%가 좌파”라는 생각을 가진 여당 대표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지금 현재 가장 절실한 건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역사학자들의 ‘역습’이다. 영화 속 헨리 폰다가 말했듯 “서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단, 사사로운 감정과 이념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닌, 무엇이 가장 합당하고 납득 가능한 역사적 기술인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행복한 사전>
누군가 ‘오른쪽’이 무슨 뜻인지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가. 행동으로는가능할지 몰라도 글로 옮기기엔 녹록지 않을 거다. <행복한 사전>(2013)은 말의 의미를 예리하게 포착해 글로 옮기는 사전편집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이 부서에 새롭게 합류한 마지메와 그의 동료들은 묵묵히 하나의 사전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무려 15년 동안 말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사전에 실을 단어에 있어 완벽에 가까운 정확성을 기하는 편집자들의 태도다. 단 하나의 실수가 전체 책의 출간 일정을 뒤흔들 수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마지메는 다시 한번 교정을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무실에서 러닝셔츠 차림으로 밤을 새워가며 교정을 보다가, 마침내 끝이 다가왔을 때 모두가 함께 웃는 영화의 후반부 장면은 어떤 클라이맥스보다 인상적이었다. ‘프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한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은 오랜 교열과 편집 과정을 거친다. 당장 2017년 3월부터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면서, 아직까지 명확한 편찬 기준조차 세우지 못한 대한민국 교육부가 염두에 두어야 할 미덕이 아닐지.
<스파이 브릿지>
때때로 유능한 개인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스파이 브릿지>(2015)를 보며 새삼 절감했다. 오토바이 다섯대를 연쇄추돌시킨 고객이 단 한건의 보상만 해도 된다는 결과를 이끌어냈던 능수능란한 보험 변호사는, 모두가 사형이라고 확신했던 소련 스파이의 형량을 낮추고 나아가 베를린에서 자국민과 소련인의 2:1 맞교환을 이뤄낸다. 이때 변호사 도노반의 승리를 이끌어낸 건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지키고 변호해야 할 주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까지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는 도노반의 노련함과 집요함이 역사적으로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온 거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과정을 지켜보며 국가간의 역사적 합의에는 협상의 기술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요즘, <스파이 브릿지>의 베테랑 협상가 도노반을 떠올린다.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가 도출되지 않았냐고 자부하기에는 이르다.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절반 이상의 국민이 이번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