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사이> If You Were Me
최익환, 신연식, 이광국 / 한국 / 2015년 / 94분 / 코리아 시네마스케이프
최익환, 신연식, 이광국 감독의 옴니버스다. 최익환의 <우리에겐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는 떡볶이에 빠진 여고생의 유쾌한 학교 탈출기이자 떡볶이 사수 드라마다. 소녀들은 오늘도 교문 앞 떡볶이 가게로 맹렬히 향한다. 학교는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등교 후 교문을 폐쇄한다. 선생님은 “여기에 있는 한 너희들을 그냥 좀비라고 생각하라. 대학가면 사람된다”고 한다. 영화는 좀비가 돼 선생님을 물어뜯는 소녀의 꿈, 선생님과 친구들의 저지를 뚫고 교문을 뛰어넘어 떡볶이집으로 향하는 소녀의 상상으로 이어진다. 신연식 감독의 <과대망상자(들)>에서 우민은 자신이 말하지도 않은 속마음을 다른 사람들이 안다는 데 놀란다. 그러다 독특한 무리와 맞닥뜨린다. 그들은 권력 집단이 독재를 위해 개인의 기억을 파괴하고 전세계를 우민화한다, 인간을 통제하려는 모든 조직에 저항한다고 말한다. 우민도 이들과 함께 뭔가를 해보려 한다. <소주와 아이스크림>은 이광국 감독의 작품이다. 보험판매원 세아는 우연히 길에서 아이스크림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여자와 만난다. 세아는 그녀에게 보험을 팔아볼까 하다 되레 그녀가 모은 빈 병들을 팔아 소주를 사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빈 소줏병에 바람을 불어넣어보던 세아는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 지원했다.
<24주> 24 Weeks
안네 초라 베라체드 / 독일 / 2016 / 102분 / 시네마페스트
아스트리드는 특유의 당당한 모습으로 사랑받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만삭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올라 “아이는 나를 막지 못한다”며 자신의 일에 남다른 긍지를 드러낸다. 임신 5개월차에 그녀는 뱃속 아이가 다운증후군을 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스트리드 부부는 다양한 경로로 다운증후군에 대한 이해를 키우며 차분히 상황을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얼마 후, 아이가 평생 인공심막을 달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또한 새롭게 알게 된다. 어린 첫째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갈리고 더불어 확고하던 부부의 신념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는 임신 24주차에 접어든 산모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출산과 낙태에 관한 다양한 차원의 딜레마를 그리고 있다. 꼬리를 물고 파생되는 문제들과 인물간에 깊어지는 갈등, 고비마다 산모 혹은 가족들이 내리는 결단을 차분한 톤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임신부가 유명인이란 설정은 산모의 결정에 얹히는 수많은 시선들까지 담아낸다. 우중충한 도시의 풍경과 중간중간 삽입되는 복중 태아의 모습은 주제가 갖는 무게를 한층 더 묵직하게 만든다.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후보에 올라 독일예술영화조합상을 수상했다.
<암울한 거리> Bleak Street
아르투로 립스테인 / 멕시코, 스페인 / 2015년 / 100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마스터즈
두 늙은 창녀와 쌍둥이 소인(小人)을 주인공으로 한 멕시코의 거장 감독 아르투로 립스테인의 신작. 밥을 먹을 때도 담배를 피울 때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프로레슬러 쌍둥이 난쟁이들이 창녀의 집을 나와 자신들의 집으로 향한다. 새벽의 골목 한켠에선 일을 마친 중년의 창녀가 포주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얻으려 한다. 그녀의 집에는 살아 있는 시체 같은 노파가 기거하고, 그녀는 구걸해서 돈이라도 벌어오라며 노파를 거리로 내몬다. 또 다른 창녀는 문제아 딸에 호모 남편으로 마음이 편치 않다. 세월이, 혹은 가족이 누추한 삶을 더욱 누추하게 만들자 두 창녀는 쌍둥이 레슬러의 돈을 훔칠 계획을 세운다. 아르투로 립스테인의 영화 세계에서 빈곤과 타락의 악순환에 놓인 인물들은 제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가곤 한다. <암울한 거리>에서도 약자가 약자를 갈취하고, 악수(惡手)가 또 다른 악수를 불러오는 세계가 다시금 반복된다. 건장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난쟁이들처럼, 삶 자체가 아이러니인 인물들과 삶 자체가 생존의 투쟁인 인물들에게 영화는 싸구려 동정과 위로 따위는 건네지 않는다. 삶은 원래 쓸쓸하고 부조리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보여줄 뿐이다.
<더 이벤트> The Event
세르게이 로즈니차 / 네덜란드, 벨기에 / 2015년 / 74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마스터즈
<마이단>(2014)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을 기록했던 세르게이 로즈니차가 1991년 8월로 시간을 거슬러 소비에트연방 체제 붕괴를 기대하는 민중의 모습을 갈무리했다.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촬영된 아카이브 필름을 로즈니차가 다시 배열한 <더 이벤트>는 세상의 변화를 체감하기 위해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는 스펙터클한 풍경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초반엔 거리에 모인 군중에 집중하던 영화는, 러시아에 민주주의의 기운이 커져감에 따라, 무리 안에서 뚜렷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개인’을 보여준다. 웅성거림, 연설, 노래로 가득하던 러닝타임 가운데 광장에 모인 민중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해 묵념을 할 때 순식간에 정적이 퍼지는 그 순간의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스페셜 포커스 모던 칠레 시네마: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영토
영화의 영토에는 미지의 땅이 너무도 많다. 아직 우리에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들려준 적이 없는 칠레영화는 현재 라틴아메리카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 중이다. 현실 참여적인 영화가 다수였던 2000년대 중반과 달리 칠레 사회를 조망하는 다양한 형식과 관점이 폭발하고 있다. ‘모던 칠레 시네마’ 섹션에서는 특정 스타일로 범주화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개성과 화법을 선보이는 젊은 세대의 영화들을 만날 수 있다.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한 <더 클럽>은 해안가 외딴 마을 가톨릭 신부들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을 배경으로 칠레 사회의 불안을 해부한다. 유력 정치인 아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청년의 진실게임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 <헛소동>, 칠레 남부 리조트를 무대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환기시키는 <한여름> 등 색깔도, 주제도 겹치지 않는 다채로움을 맛볼 수 있다. 독재자의 고문기술자였던 남자의 은퇴 후 삶을 그린 <도그 플레쉬>도 주목할 만하다. 사회의 단면을 해부하는 날카로운 솜씨와 개인적 고뇌를 다룬 드라마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다채롭고 흥미로운 영화들이 넘쳐나지만 장르 공식을 따르는 영화는 한편도 없다. 1.33:1의 화면비로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는 <한여름>처럼 형식적인 고민을 감독의 개성하에 녹여낸 작품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영화언어의 가능성을 들려준다. <호랑이의 해>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녀> <날치의 여름> 등 칠레의 오늘을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유일한 목소리들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