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 나이로 70살. 늘 스웨트 셔츠에 에코백 차림인데, 그게 어색하지가 않다. 단지 차림새의 문제뿐일까. 그녀의 경력 앞에선 노년이란 규정을 잊게 된다. 워쇼스키 자매 감독이 제작한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에서는 초감각을 가진 배두나의 조력자로 출연하고,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늙은 창녀 역에 도전했다. 지금은 또 쉴 틈 없이 노희경 작가의 새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를 촬영 중이다. <계춘할망>은 지난 이맘때 제주도의 바닷바람을 맞고 고생하며 촬영한 작품이다. 이번엔 마을 사람 모두가 ‘할망’이라고 부르는 해녀 계춘 역이다. 낯이 까맣고 꾸부정한 할망, 손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내주는 그 정 많은 노인은 윤여정이 ‘입은’ 캐릭터 중 가장 어색하지 싶다. 그래서 나는 이 낯섦이 기대된다. TV, 스크린, 넷플릭스까지 도무지 윤여정을 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그런 한해가 시작됐다.
-지난 이맘때 안부를 빌미로 제주도 촬영장에 가서 뵀는데, 그 영화가 올해 이렇게 개봉한다. 말 그대로 할머니 역할이라 노인 분장을 세게 했었다. 윤여정이라는 배우도 늙나 싶었다.
=나도 늙었지. 그럼 나도 늙었지. (웃음) 그래도 이렇게까지 노인 역할은 처음이긴 하지. 사실 배역 나이가 아니라 이제 실제 나이도 많다. 지난해 69살이었는데, 사람들이 아홉수 이야기 하지 않나? 내가 정말 죽을 수인가 그랬다. 만만치 않은 역할을 둘씩이나 하고. (웃음)
-<계춘할망>을 보면서는 센 역할이 아니어도 ‘입을’ 수 있구나 했다. 다른 작품보다 선택의 이유가 더 궁금하다.
=간단했다. 누군가가 열심히 쓴 시나리오이긴 한데 이게 상업영화가 될까 싶더라. 잔잔하고 반전이라고는 한번밖에 없는 할머니와 손녀딸 이야기다. 처음에 제작자가 전화했길래 “글쎄 이걸 왜 나를 섭외해요. 나는 대체로 도회적인 이미지고 이런 할머니 역할은 안 어울릴 것 같은데요”라고 하니까, 그가 그러더라. “아, 도회적인 이미지 이제 소멸되셨습니다.” 그래서 “진짜요?” 하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예, 소멸되셨습니다” 그러더라. 그래서 만나게 된 거다. 하도 도회적인 이미지는 소멸됐다고 하니 그럼 한번 해볼까 한 거지. (웃음)
-해녀 역할이라 뙤약볕에 바람도 맞고 하루 종일 물에 들어가고, 고사리 캐고 했던 모습이 생각난다. 이렇게 노동강도가 센 촬영은 처음 아닌가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까지 찍고 나니 심재명 명필름 대표가 그러더라. “창녀 역할이 힘드세요? 해녀 역할이 힘드세요?” 늙은 창녀는 말하자면 심적인 고통이 컸다. 배우들이 역할을 하면 빠져서 힘들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그동안 ‘빠지기는 뭘 빠져. 역할이고 일이지’ 이랬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평생 가보지 않아도 될 곳들을 가보고, 듣도 보도 못한 일들을 연기하는데, 그게 나를 그렇게 우울하게 만들 줄 진짜 몰랐다. 어떤 인생이 이렇게 왔다가 먼지같이 사라져가는구나 생각하니까 밥을 못 먹겠더라. 촬영 때는 뭘 좀 먹으려고 종이컵에다 와인을 따라서 한 모금 마시고 밥을 삼키고 그랬다. 그런데 <계춘할망>은 반대로 몸으로 한 고생이 최고였다. 그러니 이건 무조건 먹어야겠더라. 먹어서 기운을 차려야 한다 어떻게든, 그랬다. (웃음)
-부상도 있었다.
=전문 해녀들도 바다에 들어가는 시간은 5분 남짓이라더라. 우린 촬영이니 하루 종일 해녀복을 입어야 한다. 해녀복이 지퍼도 없고 좀 입고 벗기가 힘들다. 벗다가 잘못해서 귓바퀴도 찢어지고. 한번은 뱀장어한테 물리기도 하고 온갖 일이 다 있었다. 전부 야외촬영이라 하루 종일 바람 맞고 얼굴도 새카맣게 타고… 몸이 힘들었지. 아, 이래서 배우들이 성질이 못되지는구나 싶더라. 촬영이 힘드니 평상시에는 좀전에 한 고생 때문에 막 끓어오르잖나. 그러니 짜증 내고 신경질 내고. (웃음) 말이 그렇지, 지나고 보면 그 고생도 순간이다.
-<디어 마이 프렌즈> 대본은 항상 가지고 다니나. 아까 들춰보니 대본 전체에 다 밑줄이 쳐져 있더라. 대사 많기로 유명한 노희경 작가 대본답다.
=글쎄 말이다. 내일은 하루 종일 대본 외워야지. 요즘 거의 매일 찍고 있는데, 출연배우들이 평균 몇살이야. 김영옥, 나문희, 김혜자, 고두심, 박원숙, 나 이렇게 6명이 몰려다니는데, 다 초등학교 동창이다. 내가 중간이고, 고두심, 박원숙은 동생뻘. 나문희, 김혜자는 언니뻘 된다. 에피소드별로 주연이 바뀌는데, 감독이 참 힘들 거다. 이번 작품은 정말 웃기고 슬프다.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나.
=내 이름이 ‘충남’인데, 내가 감독 보고 그랬다. “충남이 노희경 아니야?” 어른 가르치고, “오빠, 인생 그렇게 살지 마” 그러면서 오빠도 막 야단치고 그러는 캐릭터다. 꼭 노희경 작가 같다. (웃음)
-넷플릭스에서 제작, 배급하는 워쇼스키 감독들의 드라마 <센스8>는 벌써 시즌2 촬영 중이다.
=얼마 전에 베를린 가서 한 신은 찍고 왔다. <죽여주는 여자>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갔다가, 1주일 후에 그 장면 찍으러 베를린에 또 갔다. 비행기를 너무 타서 정말 죽겠더라.
-워쇼스키 감독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작업환경이나 스타일은 잘 맞더라. 그런데 문제는 그거다. ‘센스8’가 내 눈에는 안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거지 않나. 나에게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톤 맞추기가 좀 어렵더라. 게다가 워쇼스키 대사가 대화체가 아니라 <매트릭스> 때부터 문어체다. 굉장히 말하기가 거북하다. 입에 안 붙어서 밤을 새워 외웠는데 죽겠더라. 그런데 라나 워쇼스키가 촬영장에서 칭찬을 하더란다. “She’s amazing. She’s One take, Wonder!” 한번에 오케이 컷이 되는 놀라운 사람이라는 거지. 내가 라나한테 이런 칭찬을 다 들었다. (웃음)
-넷플릭스 드라마, 영화 두편 개봉, 그리고 한국 드라마까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글쎄, 그런데 함께 사시던 엄마를 실버타운에 모시게 됐고, 개인적으로는 정말 괴로운 한해였다. 지난해 <계춘할망> 찍을 때 엄마가 많이 안 좋으셨고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촬영도 못하겠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는데 그걸 내가 꾸역꾸역하고 있는 걸 보면서 나한테는 이 일을 하는 게 책임 완성 이런 게 아닐까 싶더라. ‘나 진짜 못해’라는 말을 하는 거를 우리 때 배우들은 못한다. 요즘 <디어 마이 프렌즈> 때문에 나이든 배우들이랑 같이 찍으면서 보니 우리는 뭐든 ‘미션 완수’를 해야 된다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예스를 한 이상 꼭 해야 하는 거다. 스탭 모두에게 중요한 일인데, 나 하나 때문에 안 되면 안 되지. 제주도 촬영 때도 거기서 살자 해서 숙소 얻어서 쭉 지냈다. 나이 들수록 점점 빨리 끝내자는 마음, 책임의식이 더 강해지더라.
-도발적이거나 섹시하거나! 윤여정이라는 배우만큼은 세월의 흐름을 비켜가길 원하게 된다.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나.
=나는 여배우다 아니다 이런 건 잊어버렸다. 나는 노배우. (웃음) 그냥 노배우로 하고 싶은 작품을 골라서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그러면 내 삶이 성공한 거 아닐까 했는데 그걸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 그건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영화는 할 때는 모르지 않나. 다 절반의 실패인데 우리 모두 그 절반의 성공을 기대하면서 하는 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싫은데도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것 같아서 그게 참 좋다. 내가 지금 40대면 이번에 실패하면 어떡하지, 다음 단계는 어떻게 하지, 여러 가지 복잡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제 난 그런 걸로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내 나이에, 내가 뭘 하든 간에 나싱 투 루즈다. 자유로워서 나는 지금이 좋다. 참 감사할 일이지. 내 나이에. 이 일 아니면 칠십 먹은 사람 다 은퇴했지 뭐.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