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겨우 제대로 보인다. 2012년 <은교>로 파격적인 데뷔식을 마친 김고은에겐 좋든 싫든 은교의 이미지가 잔영처럼 남아 있었다. 단발머리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 천진난만하게 보이면서도 속을 알 수 없는 행동들. 하지만 그녀는 한번도 비슷한 역할을 답습한 적이 없고 남들이 시도하기 두려워하는 영역에 성큼 발을 디뎌왔다. 진정 놀라운 건 이 도전적인 배우가 차분한 연기, 일상의 민낯을 아직 보여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계춘할망>은 그간 김고은이 선택했던 영화들에 비하면 한결 잔잔하고 따스해 보이는 영화다. 그럼에도 이 역할은 김고은에게 도전적이라 할 만하다. 동시에 <계춘할망> 속 혜지만큼 그녀를 위한 맞춤옷 같은 역할도 만나기 드물 것이다. 일상에서 또 한번 연기 영역을 넓혀가는 배우, 김고은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알고 싶은 미지의 소녀다.
-<계춘할망>은 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 전에 찍은 영화다. 드라마 현장을 경험해보니 다른 점이 보이던가.
=<계춘할망>을 지난해 7월 말경에 끝내고 <치즈 인 더 트랩>을 시작했다. 현장 분위기는 영화와 그렇게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내가 경험한 드라마 현장은 다른 드라마와는 조금 차별되어 있었다. 사전 제작이었고 호흡도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다만 찍는 양, 하루에 소화해야 하는 분량이 많아서 초반엔 정신없긴 했는데 금방 적응했던 것 같다. 배우들과의 소통도 자주 이뤄졌고 신마다 리허설도 자주 진행해서 도움이 됐다.
-<계춘할망>은 어떤 영화인가.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치유와 휴식의 시간이 될 만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잊고 살았던 감정들, 소소한 감성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해주는 이야기다. 극장을 나설 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촬영현장도 재미있었다. 그래서 좀더 특별했던 것 같기도 하고. 촬영을 하곤 있지만 눈앞에 제주도 바다가 펼쳐져 있으니 여행을 하는 기분도 들었다. 나 스스로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된 것 같다.
-전작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톤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 작품을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때그때 다른 것 같다. 그 시기에 어떤 감성에 대한 결핍이 있거나 문득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들 때가 있다. 전작들은 감정을 깊게 파고들거나 극단의 상황에서 쏟아내야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작품을 통해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이 작품을 만났고, 촬영하면서도 많은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치즈 인 더 트랩>에서는 대학생이었는데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갔다.
=기분 좋다. 더 어려져서. (웃음)
-그간 맡아온 캐릭터의 성격은 천차만별인 데 반해 이미지는 하나로 관통되는 것 같다. 트레이드 마크 같은 단발 스타일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아닌데? <협녀, 칼의 기억> 때는 긴 머리였다가 단발이 된 건데? (웃음) 절대 고수한 적은 없고 그냥 머리를 기를 틈이 없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하루아침에 긴 머리가 될 수 있다면 긴 머리도 해보고 싶은데, 머리를 기르는 중에 그 어정쩡한 길이를 못 견디는 스타일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후 긴 머리를 해본 적이 없어서 <치즈 인 더 트랩>에서 시도한 긴 머리가 개인적으로도 새로웠다. 머리 스타일은 그냥 작품에 따른 것뿐이다. 필요하면 삭발도 할 수 있다. (웃음)
-<차이나타운>의 김혜수, <협녀, 칼의 기억>의 전도연, <계춘할망>의 윤여정까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다.
=일단은 좋은 선배님들과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물론 프로로서 작품에 임하는 거지만 기회가 된다면 왜 이분들이 대단하고 특별하고 존경받는지, 곁에서 많은 걸 배워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싶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꿈꿔보기도 하고. 매번 내 몫을 찾아가야 하는 배움의 현장이었다. 그분들께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다보니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까지 뽑아져나오기도 한다.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했고 중요했다. 긴 호흡의 연기 인생을 위한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출 때 더 빛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 각각의 연기 호흡은 어땠는지.
=감히 연기 호흡이나 스타일을 말할 입장은 아니다. 공통점은 하나 있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생동감이랄까. 마주했을 때 늘 설레었던 것 같다. 진짜의 감정이 저절로 뽑아져나올 수밖에 없는 최상의 환경이다. 윤여정 선생님과 처음 마주했을 땐 긴장도 많이 했는데 너무 편하게 대해주셨다. 할머니와 손녀의 역할이다보니 현장에서도 그런 감정을 많이 느꼈다. 괜히 선생님을 보살펴야 한다는 마음이 우러나서 나도 모르게 몸으로 햇볕을 가려드리거나 비 오면 옷을 덮어드리거나.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알게 모르게 늘 시야 한쪽에 선생님이 계셨던 것 같다. 불편하신 건 없는지 항상 선생님을 주시하고 있는 내 모습에 가끔씩 스스로도 깜짝 놀라곤 했다. 정말 우리 할머니라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중국에서 10년 정도 살았는데 1년에 한번씩 한국에 왔었다. 그때 할머니를 뵙는 게 가장 큰 연중행사였다. 내겐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성이시다. 20살 때부터 함께 살게 됐는데 같이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다툼이 있지 않나. 그런 시간들까지 모두 감사하고 소중하다. 곁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그만큼 보듬게 된다. 그 감정선들이 <계춘할망>에서 보여준 흐름과 너무 비슷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터져나오는 울음을 절제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도 할머니는 내게 솔메이트 같은 존재다.
-작품을 고르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면.
=지금까지는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을 주로 골랐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모험이다. 20대 때는 연기의 기복을 없애는 시기였으면 좋겠다. 많은 것들을 경험해야 두려움이 없어지고 남들이 말하는 내공이란 게 쌓이지 않을까. 일상의 경험도 있겠지만 현장과 캐릭터에 대한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에 했던 실수를 다음 작품에선 반복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메워나가려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작품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작품 하나하나에 책임과 무게가 커지는 걸 느낀다. 40대 즈음 이른바 관록이란 게 생겼을 때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조금이라도 나이가 어리고 기회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해보려 한다. 나는 늘 내게 두려움을 주는 작품들을 골라왔던 것 같다. 내가 너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은 되도록 피했다. 스펙트럼이나 한계를 정하고 싶지 않다. 덕분에 지금은 도전이 조금 익숙해졌다.
-파격적이고 강한 역할들을 맡아왔지만 그럼에도 핵심을 관통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김고은스러움’이라고 해도 좋고, 어딘가 결핍이 있는 인물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
=솔직히 현재 한국에서 나오는 시나리오들이 대부분 반복적이다. 장르적인 반복은 물론 유사한 정서들로 넘쳐난다. 그 와중에 파격과 자극이 없는 영화는 또 찾기 힘들어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많지 않다. 피로감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 <계춘할망>은 반가운 작품이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수위의 차이가 있을 뿐 결핍이 없는 캐릭터는 없다고 본다. 내가 그 결핍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말이 되는’ 연기를 할 수 있으니 늘 끌리는 역할들에 몸을 맡겨왔다. 나는 <차이나타운>도 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겐 충분히 납득되는 섬세한 캐릭터였다. <치즈 인 더 트랩>도 그렇고, <계춘할망>은 현실에 가까운 캐릭터다. 그런데 정작 나는 이런 역할들을 안 해봤다. 내겐 또 다른 의미의 도전인 셈이다.
-배우로서 목표가 있다면.
=납득시키는 연기. 최근엔 <대니쉬 걸>의 설득력, 그 연기에 반했다. 아름다웠다. 누군가는 나를 ‘20대 여배우’로 분류하겠지만 ‘20대’와 ‘여’라는 수식어를 빼고 그냥 배우였으면 좋겠다. 역할이나 영역을 한정짓고 싶지 않다. 아직 해보지 않았다는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