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 /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 제작국가 프랑스
프랑스영화의 현재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신작 <퍼스널 쇼퍼>는 줄거리를 들어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는 작품이다. 패션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이 업계에 완전히 질린 한 젊은 여성이, 몇달 전에 죽은 쌍둥이 형제가 신호를 주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고전 호러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라는 루머도 솔솔 들려온다. 여기까지 들어도 역시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아사야스의 전작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국내 개봉 당시 <씨네21>에 소개된 인터뷰 한 구절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이 영화를 만들며)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차별 없이 드러내 세상을 재창조하는 문제 혹은 무언가를 제거하는 것만큼 또 반드시 드러내는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 어쩌면 아사야스는 유령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패션이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예술이 만났을 때 예기치 않게 구현되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이어 다시 한번 미국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뮤즈로 나선다.
<언노운 걸> The Unknown Girl / 감독 다르덴 형제 / 제작국가 벨기에, 프랑스
5월의 칸에서 다르덴 형제를 목격하는 건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그들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할지보다 그들이 어떤 작품을 들고 칸을 찾을지가 더 궁금할 정도다. <언노운 걸>은 한 젊은 여성 의사의 이야기다. 그녀가 수술하길 거부했던 환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의사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어느 이름 모를 여성의 궤적을 뒤늦게 좇는다. <로제타>와 <더 차일드>, <로나의 침묵>과 <내일을 위한 시간>이 그랬듯 다르덴의 영화는 대개 사회적 시스템의 피해를 본 약자의 입장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도 모르는 새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어버린 인물이 주인공이다. 이런 경우 다르덴의 영화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자전거 탄 소년>의 세실 드 프랑스와 <내일을 위한 시간>의 마리옹 코티야르를 거쳐, 다르덴은 젊은 의사 역으로 아직 국제 무대에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여배우(그러나 세자르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아델 해넬을 선택했다.
<아가씨> Agassi(The Handmaiden) / 감독 박찬욱 / 제작국가 한국
1930년대 한국과 일본이 배경인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의 첫 시대극이자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2012) 이후 4년 만의 한국영화 복귀작이다. 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와 그의 재산을 노려 접근하는 백작(하정우) 그리고 백작에게 고용돼 히데코의 하녀로 일하게 된 소녀 숙희(김태리)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그린 이야기이다. 히데코, 백작, 숙희 세 남녀는 서로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하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진심이 서사 반전에 중요한 키가 될 듯하다. 무엇보다 원작 <핑거스미스>가 가진 매력적인 퀴어 코드가 박찬욱 감독의 손을 거쳐 어떻게 재해석됐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밋거리다.
<엘르> Elle / 감독 폴 버호벤 / 제작국가 프랑스
폴 버호벤의 영화 인생이 롤러코스터의 궤적을 그려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로보캅>(1987)과 <토탈 리콜>(1990)로 할리우드 최정상에 등극했다가 <쇼걸>(1995)과 <할로우맨>(2000)이 연달아 실패하자 할리우드를 떠나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그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신작 <블랙북>(2006)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다가, 범작 <트릭>(2010)으로 다시 주춤해 있었다. 다시 반등을 노리는 노거장의 신작 <엘르>는 비디오 게임 회사 대표인 미셸(이자벨 위페르)이 괴한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그녀는 복수를 하기 위해 괴한을 집요하게 찾아내 스토킹을 한다. 미셸과 괴한이 쫓고 쫓기면서 서사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할로우맨>이나 <원초적 본능> 같은 초기작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복수하기 위해 스토킹한다는 설정은 꽤나 대담하고 변태적이기까지 하다.
<줄리에타> Julieta /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 제작국가 스페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1999년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아들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어머니의 넓은 사랑을 다룬 작품이라면 신작 <줄리에타>는 애증의 모녀 관계를 그려낸 이야기다. 줄리에타는 남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다. 18살이 된 딸 아니타는 갑자기 가출한다. 줄리에타는 아니타를 찾아 나서지만, 어디에서도 딸을 찾을 수 없다. 딸을 키우면서 딸에 대해 잘 몰랐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딸을 12년 동안 그리워하던 줄리에타는 딸을 찾아 미처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줄거리만 보면 모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갈등의 골이 꽤 깊어 보이고, 그래서 그들의 사랑과 증오가 뜨겁게 느껴진다. 원래 제목은 ‘침묵’이었는데, 마틴 스코시즈의 신작인 <사일런스>와 혼동이 생길까봐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고 한다.
<러빙> Loving / 감독 제프 니콜스 / 제작국가 미국
2016년, 제프 니콜스는 메이저 국제영화제가 가장 주목하는 미국 감독이다. 그의 신작 <미드나잇 스페셜>은 올해 초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그의 또 다른 신작 <러빙>은 지금 막 황금종려상 레이스에 뛰어들려는 참이다. <러빙>은 1960년대 미국 버지니아주에 살았던 리처드, 밀드레드 러빙 부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이다. 이들은 다른 인종간의 결혼을 금지했던 버지니아주의 법에 위헌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연방 대법원의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평범한 법정영화가 아닐 거라 짐작되는 이유는 <샷건 스토리즈>(2007)와 <테이크 쉘터>(2011), <머드>(2012)와 <미드나잇 스페셜>(2016)이라는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스릴러와 재난영화, 어드벤처물과 SF. 그 어떤 장르에 몸담더라도 결코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제프 니콜스만의 독자적인 개성과 감각에 한표를 던져볼 만하다.
<아메리칸 허니> American Honey /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 / 제작국가 영국
올해의 칸 경쟁부문에는 세명의 여성감독이 포진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이름은 영국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다.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레드 로드>(2006)와 <피쉬 탱크>(2009), 시대극 <폭풍의 언덕>(2011)을 통해 영국 사회의 부유하는 인물들을 조명해온 그녀가 이번에는 미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메리칸 허니>는 미국을 횡단하는 로드 트립 여행을 떠났던 안드레아 아놀드의 경험이 반영된 로드 무비다. 미국 전역을 떠돌며 낮에는 하이틴 잡지를 팔고, 밤에는 격렬하게 파티를 즐기는 세일즈맨들이 주인공이란다. 그런데 그 세일즈맨이 바로 샤이아 러버프라면? 날것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데 장기가 있는 안드레아 아놀드와 할리우드의 소문난 악동 샤이아 러버프의 조합이 호기심을 자아내는 영화. 아놀드가 발굴해낸 뉴페이스 사샤 레인의 활약도 기대된다.
<스테잉 버티컬> Staying Vertical / 감독 알랭 기로디 / 제작국가 프랑스
지난 2013년, <호수의 이방인>으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프랑스 감독 알랭 기로디의 신작. 이번에는 영화감독이 주인공이다. 남부 프랑스에서 늑대를 찾던 레오는 양치기 여성 마리와 사랑에 빠진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녀는 레오의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린다. 마리는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남편과 아이를 떠나고, 레오는 혼자 남아 아이를 키운다. 그리고 차기작을 구상하며 예기치 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줄거리를 자세히 소개한다 해도 그게 다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 뒤를 짐작해보려 해도 예측 불가능한 샛길로 빠져버리고 마는 게 기로디 영화의 매력이니까. <스테잉 버티컬>의 수입사 와일드 번치는 이 영화가 <호수의 이방인>을 잇는, “야생 한가운데에서 비밀스러운 욕망이 드러나는” 작품이 될 거라고 예고했다. 그런 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관능주의자’라고 일컫는 알랭 기로디의 장기 아닌가.
<패터슨> Paterson / 감독 짐 자무시 / 제작국가 미국
뱀파이어마저 사색적으로 그려냈던(<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 짐 자무시가 시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꺼낸 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은 뉴저지주 패터슨시에서 살고 있는 버스 운전사다(패터슨과 패터슨시는 같은 이름이다). 그는 항상 틀에 박힌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매일 같은 코스를 운전하고,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며, 노트에 시를 쓴다. 반대로 패터슨의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는 꿈이 많다. 그녀는 매일 새로운 꿈을 꾼다. 패터슨은 로라를 사랑하고, 로라는 패터슨을 사랑한다. 이 영화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성취와 좌절을 담담하게 관찰하는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어쩌면 패터슨이 쓰는 시가 패터슨과 로라 부부의 일상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로 처음 작업한 짐 자무시와 애덤 드라이버의 조합도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대 요소.
<슬랙 베이> Ma Loute / 감독 브루노 뒤몽 / 제작국가 프랑스, 독일
브루노 뒤몽이 <슬랙 베이>를 연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한 시네필이 많았을 것이다. 성폭행 사건보다 그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인물)을 따라다니거나(<휴머니티>(1999)), 사막을 여행하고 있는 커플을 건조하게 그려내거나(<29팜스>(2002)), 생명력이 충만한 고향 플랑드르와 전쟁터인 황폐한 사막을 건조하게 대비시키는(<플랑드르>(2006)) 등 전작이 사건의 풍경과 인물의 표면을 상징과 암시를 통해 그려냈다면 이번 영화는 벌레스크(풍자극)다. 1910년 여름, 슬렉 만에는 사이가 서로 좋지 않은 가족이 산다. 한 가족은 어부고, 또 한 가족은 부르주아다. 어느 날, 어부 아들인 마 루트와 부르주아 집안의 딸인 빌리가 사랑에 빠진다. 한편, 여행자들이 해변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갑자기 사라진다. 마친과 말포이, 두 형사는 사건의 원인이 슬렉 만에 있다고 추정하고 두 가족을 불러 조사한다. 전작과 스타일이 다르지만, 브루노 뒤몽 특유의상징과 건조한 시선이 이야기 곳곳에 심어져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