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해녀들로부터 배운 것…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와라’ - <물숨> 고희영 감독
2016-05-16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물숨’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바다 속 해녀들이 더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 마지막 한번을 더 참을 것인가, 물 밖으로 나갈 것인가를 가르는 마지막 숨이다. 때론 그 숨이 삶과 죽음을 나눈다. 고희영 감독의 <물숨>은 바다와, 물숨과 싸워나가는 제주 우도의 해녀들을 7년간 좇은 다큐멘터리다. 한국경쟁부문 특별언급상과 CGV아트하우스상 배급지원상을 수상했다. 감독은 수상의 소회를 이렇게 전했다. “촬영하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독해졌다를 무수히 반복했다. ‘그만둬야 하나’ 싶을 때 ‘걸어서 별까지’라는 한 시구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작업이 딱 그랬다. 너무 더딘데, 가다보면 어느 별인가에 닿아 있는.” 7년의 촬영, 2년의 후반작업으로 고희영 감독이 가닿은 <물숨>에 대해 들어봤다.

-2관왕을 축하한다.

=전혀 예상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첫 상영을 함께 보고 헤어진 스탭들에게 시상식까지 함께 있자고 할걸. (웃음) 거의 재능기부로 7년을 버텨줘 고마울 따름이다.

-제주 우도의 해녀들을 무려 7년이나 좇았다.

=고향이 제주라 제주의 정서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제주 사투리도 100% 이해해 걱정 없었다. 근데 자만이었다. 초반 2년은 카메라 버튼도 못 눌렀다. 해녀분들이 ‘카메라를 부숴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민감했다. 번번이 거절당했다. 25년간 온갖 현장을 다 취재해온 나다. 무인도에서 원숭이 100마리와 살며 다큐를 찍기도 했고 장기매매 현장도 가봤는데도 이번이 제일 힘들었다.

-해녀들은 독립심 강하고 외부에 대한 경계심이나 조심성이 있을 거라는 예상을 어느 정도 했겠다. 그럼에도 해녀들을 찍어야 했던 이유는 뭔가.

=어릴 땐 제주가 너무 싫었다. 수평선 너머로 갈 수 있을까 싶어 막막했다. 스물네살에 처음으로 대구로 가 일간지 사회부 기자가 됐다. SBS 개국 때 <그것이 알고 싶다>의 작가로도 합류했고. 이후 올해까지 13년째 베이징에서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살았다. 그러다 마흔살 때 암 진단을 받았다. 욕심만 부리며 산 게 부끄러웠다. 갑자기 제주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힘차게 자맥질하는 해녀분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일할 때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나 역시 죽음이 두려웠던 거다. 해녀분들을 보며 ‘어떻게 두려움 없이 무덤이 될 수도 있는 바다로 뛰어들까’ 궁금했다. 나도 저분들처럼 내 인생에 뛰어든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2008년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숨을 오래 참아 깊은 바다로 갈 수 있는 순서대로 해녀들 사이에 상군, 중군, 하군이 나뉜다는 걸 <물숨>으로 처음 알았다. 해녀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기까지 어떻게 설득했나.

=첫 2년간은 나도 그들 사이에 계급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해녀는 저승에서 돈을 벌어 이승에서 쓰는 사람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어 굉장히 예민하다, 카메라가 얼쩡거리는 게 싫다’고만 하셨다. 생각다못해 빵 배달을 시작했다. 제주, 특히 우도는 빵이 귀하다. 베이징에서 인천과 김포공항을 거쳐 제주공항, 다시 성산포에서 우도까지 들어가면서 빵을 샀고 자전거로 배달을 했다. 내가 진짜 빵집 배달원인 줄 아는 분도 있었다. (웃음) 겨우 마당 안에 들어가서 조금 앉아 있겠다고 하고, 그러다가 자고 가겠다고 하는 식이었다.

<물숨>

-<물숨>은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했다.

=상군, 중군, 하군은 해녀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세상에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라고 하면 해녀 할머니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안 돼, 하늘이 주시는 거야.’ 해녀들은 늘 물숨을 넘어서서 좀더 해산물들을 캐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해녀들 사이에서 물숨은 금기의 말이다. 해마다 바다에서 해녀들과 관련된 사고가 나는데 7년간 지켜본 바로는 50% 이상이 물숨 때문이다. 노장 해녀가 초보 해녀에게 말하길, ‘바다 가면 욕심내지 마라,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와라. 그러면 바다는 놀이터가 되지만 뭔가를 더 갖겠다고 하면 바다는 표정을 바꾼다.’ 그것이 <물숨>의 주제다.

-해녀들이 숨을 참았다가 물 위로 올라와 터뜨리는 숨인 숨비의 소리가 중요하게 촬영됐다. 직접운영 중인 제작사명도 ‘숨비’다.

=금지된 숨 물숨은 종종 죽음을 부른다. 반면 숨비는 ‘살았다, 살아 있다’는 걸 알린다. 해녀들은물질하러 간다는 말을 ‘숨을 비러 간다’고 한다. 오래 촬영을 하다보니 할머니들의 숨비 소리만 들어도 누구의 것인지 알겠더라. 살아 있다는 그 힘찬 소리가 어찌나 좋던지.

-송지나 드라마작가가 글과 구성을, 양방언 음악감독이 음악 작업을 재능기부로 맡았다.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송지나 작가님은 <그것이 알고 싶다>의 1기 작가셨던, 존경하는 멘토다. 술자리에서 해녀이야기를 찍는다, 꼭 언니가 작가로 함께해주면 좋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그로부터 7년 뒤 진짜로 부탁했다. 그때 언니도 드라마 <힐러>를 집필 중이었고 함께 작업해온 김종학 감독님의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까지 들은 상황이라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양방언 음악감독님은 처음에는 일정이 안 맞았다. 그때 ‘영화를 7년 걸려 완성했다. 10년을 채워도 전혀 상관없다. 존중받지 못해온 해녀분들을 품격 있게 담고 싶다’고 설명드렸다. 작업실로 직접 오셔서 작품을 보시더니 바로 하겠다고 해주셨다. 감사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이 있다.

-사회부 기자, 방송작가를 거쳐 베이징을 근거지로 해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1990년대 초•중반 <경북일보> 사회부의 유일한 여성기자였다. 취재로 기관장을 그만두게 한 적이 있는데 전혀 기쁘지 않더라. 방송작가 일도 보람됐지만 반복되는 일이 주는 불안감, 수입만큼의 원고만 쓸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정글로 가야 했다. 그때 찾은 곳이 베이징이었다. 다큐멘터리 작가에게는 그곳의 역동성과 다양성만큼 매력적인 게 없었다.

-중국 문화대혁명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뒤 누드모델이 된 할아버지와 부인과 자살을 시도했다 자신만 살아남아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한 교수의 이야기다.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인의 현재를 만드는가가 궁금하다. 또 올해 연말 틴틴파이브의 이동우씨와 그분에게 눈을 기증하겠다고 한 한 남자의 로드무비 <시소>(가제)를 개봉한다. <물숨>은 하반기 개봉이다. 영화 속 해녀분들이 바다로 들어갈 때 관객도 잠시 숨을 같이 참아보면 어떨까. 해녀 공동체의 훌륭한 문화를 한국의 관객이 가슴으로 기억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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