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는 진중한 편입니다. 말도 별로 없고.” 영화가 꼭 감독을 닮는 건 아닌 모양이다. 고봉수 감독의 <델타 보이즈>는 배꼽 빠지게 웃겼다가 제대로 감동 주는 영화다. 노래하는 게 꿈인 일록(백승환), 예건(이웅빈), 대용(신민재), 준세(김충길), 네명의 지질한 남자들은 사중창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 좌절된 꿈과 희망 없어 보이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볼품없어 보이는 네명의 캐릭터를 끝내 응원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좋은 캐릭터와 좋은 연기, 차분한 호흡과 독특한 코미디 감각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단편 <G4> <안나> 등을 만들었던 고봉수 감독은 250만원의 제작비로 완성한 장편데뷔작 <델타 보이즈>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 대상과 CGV아트하우스 창작지원상을 받았다. 정직하고 진심 어린 이 영화에 사람들이 감응한 결과다. 수상 결과가 발표되기 두어 시간 전, 전주에서 고봉수 감독을 만났다.
-오늘(5월5일) 저녁 경쟁부문 수상 결과가 발표된다. 내심 수상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나.
=이렇게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같이 좋은데, 만약 상을 받게 된다면 난리날 것 같다. (웃음)
-<델타 보이즈>의 출발점이 궁금하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 예전에 단편영화 작업을 함께했다. 처음 이 친구들의 연기를 보고 깜짝놀랐다. 숨은 연기 고수들이었다. 이렇게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왜 그동안 연기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이들과 함께라면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우들이랑 ‘우리 같이 장편 찍자’ 얘기 나누면서 막연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다가 델타 리듬 보이스라는 미국 흑인 남성 그룹의 노래 영상을 유튜브로 보게 되었다. 델타 리듬 보이스가 흑인 영가 <제리코의 싸움>(Joshua fit the battle of Jericho)을 부르는 영상이었는데, 그때 남성 사중창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침 우리 배우도 4명이고. (웃음)
-4명의 캐릭터 모두 매력이 넘친다. 어떻게 탄생한 캐릭터인가.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와 실제 배우의 모습이 똑같다고 보면 된다. 예건을 연기한 이웅빈 배우는실제로 시카고에서 살다가 연기가 하고 싶어 한국에 온 친구다. 동포 흉내를 정말 잘 낸다. 동포 연기에 있어선 최고가 아닐까 싶다. 일록은 뭔가를 해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아서 울분 같은 게 가슴에 남아 있는 캐릭터인데 내 모습이 가장 많이 반영된 캐릭터다. 대용은 실제 배우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캐릭터고.
-일록, 예건, 대용, 준세가 남성 사중창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이는데, 실제로 이들이 노래하는 장면은 마지막에 딱 한번 등장한다.
=음악영화지만 음악이 없는 건조한 느낌의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마지막에 이들이 노래하는 장면에 좀더 힘을 싣기 위해서 앞쪽에 노래 장면을 넣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실은 노래를 더 못 불러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촬영하는 날 배우들한테 이 장면은 딱 한번만 테이크를 가겠다고 얘기했다. 배우들이 긴장해서인지 원래 실력보다 노래를 더 못 부르긴 했다.
-캐릭터가 생생하고 그들의 대사가 절절해서 특정 순간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배우들한테 기본적인 설정을 줬고, 그 뒤엔 배우들이 마음껏 카메라 앞에서 놀 수 있도록 했다.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딱 만나는 접점을 찾으려고 컷을 나누지 않고 롱테이크를 많이 사용했다. 캐릭터에 감정 이입한 배우들의 모습을 살리려면 롱테이크로 담아야 했다. 리허설을 하면서 배우들의 연기를 점검했고, 거기서 부각하고 싶은 대사나 연기를 요구하는 식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각본, 연출, 촬영, 편집, 제작을 모두 혼자 했다.
=혼자서 적은 제작비로 고퀄리티의 영상 만드는 법을 십년 동안 연습했다. <델타 보이즈>의 제작비도 총 250만원 들었다. 그 돈으로 장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해야 했다.
-저예산으로 영화 제작하는 것의 고충이나 아쉬움도 있었을 텐데.
=단편의 경우 하루 촬영하고 하루 편집하면 결과물이 나왔다. 이번엔 장편이라 20일에 걸쳐 촬영과 편집을 했다. 총 9회차 촬영이었는데, 단편에 비해 촬영기간이 길어져 배우들이 좀 힘들어했던 것 같다. 아쉬운 건 정말 많았는데, 조명을 제대로 칠 수 없어서 밤 장면 촬영 때는 현장에 있는 형광등 두개 놓고 찍기도 했다.
-밥 먹는 장면에선 어김없이 라면이 등장한다. 캐릭터들이 라면만 계속 먹는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변함없이 라면을 먹는 모습을 통해서 일상의 지루함을 보여주려 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배가 고프기도 했다. 일단 제작비가 적었기 때문에 뭔가 먹으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웃음)
-뒤늦게 영화를 시작한 것으로 안다. 영화를 하게 된 계기는 뭔가.
=10대 때부터 영화광이었다. 하루에 한편씩 영화를 보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정도였다. 공부보다 영화가 좋았고, 대학 진학의 필요성도 못 느껴서 대학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를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을 하며 20대를 보내고 있었는데, 문득 이렇게 일만 하다 죽으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고, 3개월 정도 네오영화아카데미를 다녔다.
-미국 시카고에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살았다.
=유학은 아니고, 머리 복잡한 일이 있어서 잠깐 여행이나 갔다 올까 해서 시카고에 갔다. 거기서 카메라를 빌려 재미 삼아 단편영화(<A Cup of Coffee>)를 한편 찍었는데 그 영화가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재밌고 신기했다. 그러면 조금만 더 머물까 했는데, 결국 그 시간이 길어졌다. 그 후엔 애틀랜타로 넘어가서 라디오 DJ 일을 했다.
-코미디 감각이 좋은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코미디 장르에 애정이 컸나.
=누군가 액션영화 볼래, 코미디영화 볼래 하면 나는 주저없이 코미디영화를 택하는 사람이다. 어릴 땐 주성치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 주성치 외에 쿠엔틴 타란티노,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같은 감독들을 존경한다. 개인적으로 코미디가 일상의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웃을 수 있고,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할 수 있어서 코미디를 좋아한다. 계획된 차기작은 없지만 앞으로도 블랙코미디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