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류성희 미술감독이 말하는 <아가씨> 포토 코멘터리
2016-06-06
글 : 김성훈

류성희 미술감독은 <아가씨>에 합류하기 전에 두편의 시대극을 작업했다. 하나는 6•25 전쟁부터 이산가족찾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순간을 재현했던 <국제시장>(감독 윤제균, 2014)이었고, 또 하나는 항일운동이 한창이었던 1930년대 상하이와 경성을 스크린에 펼쳐냈던 <암살>(감독 최동훈, 2015)이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충실히 재현하고(<국제시장>), 장르영화의 스펙터클을 화려하게 전시했던(<암살>) 전작과 달리 <아가씨>는 류성희 미술감독에게 “재현을 넘어서 시대의 분위기를 공간에 내면화해야 했던 도전”이었다. 그녀를 만나 <아가씨>의 주요 공간 스틸을 함께 보면서 나눈 코멘터리를 전한다.

#1 양관 응접실

모든 등장인물(하인들까지)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공적 공간. 유럽식 건축양식으로 건축된 양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왼쪽에 응접실이, 오른쪽에 식당이 보인다. 응접실에 있는 소파, 테이블, 서랍장, 거울은 유럽식 가구다. 도자기, 그림 등 한국 작품들을 섞어 관객에게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했다. 사진의 벽에 걸린 그림을 포함해 영화 속 공간에 보이는 그림들은 대부분 겸재 정선과 이인성 화가(1930년대 활동한 서양화가이고, 천재 화가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편집자)의 작품들로 전시했다. 이 그림들을 통해 근대화에 접어든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응접실이 코우즈키(조진웅) 저택에서 가장 근대화된 공간이라고? 코우즈키 저택을 크게 본채, 별채(서재), 하인 숙소로 나눈다면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참고로 코우즈키 저택과 정원 그리고 대문은 일본 미에현 구와나시에 있는 육화원에서 찍었다. 코우즈키 저택의 별채(서재 외관)와 정원은 같은 지역에 위치한 모로토 정원에서 촬영했다. -편집자).

#2 숙희 방

숙희가 백작과 음모를 꾸미고 히데코의 집으로 하녀로 들어가면서 묶게 되는 방. 아가씨 방 바로 옆에 위치해, 아가씨가 부르면 곧바로 뛰어갈 수 있도록 설정한 건 감독님과 정정훈 촬영감독님의 아이디어였다. 실제로 당시 하녀들이 옷장 같은 작은 공간에서 자기도 했다고 한다. 요, 가방, 보자기 등 꼭 필요한 물건만 배치했는데, 그중 꼭 넣고 싶었던 건 요강이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알 만한 소품이지 않나. 영화 속 공간을 통해 일본과 서구 열강에 둘러싸인 조선을 그리고 싶었다. 단순히 시대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시대적 상황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3 히데코 방1_응접실

히데코가 처음 저택에 온 숙희를 미닫이문에 달린 작은 구멍으로 몰래 관찰하는 응접실. 히데코 방의 레퍼런스가 될 만한 공간이 없었다. 관객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품위가 있고, 무언가 있어 보일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같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대극을 많이 봤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1975) 같은, 묘사가 센 작품도 챙겨봤다. 이 영화의 미술이 굉장히 모던하기 때문이다. 숙희와 함께 보내는 공간이자 코우즈키의 손이 닿지 않는 장소인 까닭에 여성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윌리엄 모리스풍을 응용한 벽지를 보면 아름답다기보다 성적으로 정신분열적인 느낌이 들지 않나. 여성의 심벌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

#4 히데코 방2_침대

히데코와 숙희가 조금씩 가까워지게 되는 공간. 미술감독으로서 가장 어려웠던 건 이 영화가 애너모픽렌즈로 촬영된 까닭에 히데코 방을 포함해 모든 공간을 실제 크기보다 크게 지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공간이 커지면 그곳에 채워넣어야 할 물건도 많아진다. 그러면서 지저분한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이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소품들을 이베이에서 구매해 채워 배치하기도 했다. 공간이 크다보니 침대가 은밀한 느낌이 없었다. 침대 머리맡에 커튼을 쳐 은밀한 분위기를 조성했고, 쿠션과 작은 소파 같은 가구를 히데코와 숙희의 베드신에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침대 발쪽에 두었다. 시트는 차가운 색 계열로 설정했다.

#5 코우즈키 서재(별채)

1만권이 넘는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곳. 영국식 건축양식을 토대로 설계된 서재는 친일파 코우즈키가 버텨내기 위해 만든 방식이자 그의 착각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당시 많은 친일파 지식인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변명을 했겠나.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제정신으로 살기 힘드니까. 높이가 높았던 <암살>의 미쓰코시 백화점 세트를 제외하면 코우즈키 서재가 있는 별채는 공간이 온전히 재현된 공간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세트다. 숙희가 서재 복도를 걸어갈 때 복도 바닥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정정훈 촬영감독님의 카메라 동선을 배려해 복도를 계단식이 아닌 사선으로 제작했다.

#6 코우즈키 서재_실내 정원과 낭독 무대

백작이 코우즈키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참관하는 낭독 무대. 이곳에서 코우즈키는 일본 귀족들 앞에서 히데코의 이모(문소리)에게 낭독을 시킨다. 책장의 반대쪽에 위치한 실내 정원과 낭독 무대는 일본식 건축양식이다. 일본 구와나시를 헌팅해보니 연극 무대가 있는 가옥이 없었다. 전통적인 연극 무대를 재해석해 만든 공간인 셈이다. 이 공간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실내 정원이다. 정원이 없는 다다미방은 이야기에 기능적으로 충실한 디자인이긴 하지만, 코우즈키라는 인물을 드러내는 데 무언가 부족한 것 같았다. 자연과 조화롭게 존재하는 한국식 정원과 달리 일본식 정원은 구성요소마다 상징하고 있는 게 다르다. 가령, 나무와 돌은 산과 바위를 각각 상징하는 것처럼. 일본식 정원은 서재에 집착하는 코우즈키의 세계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7 양관 1층 계단

양관 현관문을 열면 2층 히데코의 방과 연결되는 큰 계단이 보인다. 계단 입구 앞이 넓은 영국 시대극 배경과 달리 우리는 예산 등 여러 이유 때문에 넓게 만들 수 없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각도를 5번 꺾는 것으로 설계했다. 계단 벽에는 어린 히데코와 성인 히데코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일본 로케이션 헌팅을 하다가 스페인 궁정 화가였던 벨라스케스의 전시회 그림을 헌팅 버스 밖에서 우연히 보고 ‘우리 영화에도 저런 그림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숙희가 히데코를 처음 만나기 전에 히데코의 초상화를 먼저 보게 하면 어떨까 하고 박찬욱 감독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괜찮겠다’고 하셨다. 한국 미술계에서 드물게 초상화를 그리는 김성윤 작가가 그렸다.

#8 전당포 보영당

유명한 여성 장물아비 복순이 운영하는 전당포. 복순의 손에 자란 숙희가 일찍이 이곳에서 “진짜 돈과 가짜 돈을 구분할 줄 알고, 자물쇠 따는 법과 소매치기 기술을 두루 익히고, 낳자마자 버려지는 핏덩이를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을 한다. 장물아비가 운영하는 전당포답게 많은 것을 테이블 위에 쌓아두고, 필요한 것을 꺼내 쓸 수 있는 실용적인 공간이다. 2층에는 다락방이 있을 수 있겠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건축양식이 혼재된 공간. 실제로 당시 경성에는 이런 양식의 건물이 많았다.

#9 정신병원

숙희가 백작과 히데코의 재산을 가로챈 뒤 히데코를 보내려고 하는 정신병원. 자료 조사를 하긴 했는데 특정 공간을 재현했다기보다 여러 특징을 조합해 대형 창고에서 만들어낸 공간이다. 유럽, 특히 독일의 옛날 정신병원을 보면 포로수용소 같은 느낌이 있다. 환자들이 창문쪽 벽에 매달린 사진도 있었는데, 박 감독님이 그 사진을 무척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