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박찬욱 감독의 ‘소녀 3부작’ 그 마지막 장 <아가씨>를 보니
2016-06-06
글 : 장영엽 (편집장)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꽃이 제 색깔을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지금의 자신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어. 이것을 깨달을 때만 자유로워질 수 있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거지.”

박찬욱 감독의 전작 <스토커>(2013)에서,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믿었던 소녀는 자신이 아빠의 벨트와 엄마의 블라우스, 삼촌의 구두를 물려받은 존재라는 점, 그리고 자신에게 불온한 광기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포기하는 순간 현실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박찬욱 감독의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의 성장과 도약은 종종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복수에는 성공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친절한 금자씨>의 이금자(이영애)가 그랬고, 현실을 바꾸는 대신 아예 영원히 몽상의 세계에 머물기로 결심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임수정)과 일순(정지훈)이 그랬다. 폭주하는 연인 태주(김옥빈)를 막지 못하자 함께 생을 멈추기로 마음먹은 <박쥐>의 상현(송강호)은 어떤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 법칙을 위반하고 그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것은 ‘박찬욱 월드’의 오래된 테마지만 그 탈주의 끝에 이르러 어쩐지 개운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건 박찬욱 감독의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와 멈춰야 할 지점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토커>를 잇는 ‘소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아가씨>의 주인공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는 좀 다르다. 이들의 야심은 박찬욱 감독의 전작을 통틀어 그 어떤 캐릭터보다 원대하다. 그녀들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도 잃지 않으려 한다. 사랑에 있어서, 관계에 있어서, 힘에 있어서의 완벽한 승리. 그리고 박찬욱 감독은 이 야심만만한 소녀들에게 기꺼이 그 승리를 내어준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가 선사하는 놀라움은 그의 영화 세계에서 유례없이 명쾌한 해피엔딩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토록 온전한 승리를 거머쥔 여성 캐릭터를 한국영화에서 목도했던 순간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칙과 틀을 경쾌하게 뛰어넘는 여성들의 활약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가씨>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며, 이러한 목적이야말로 영국 작가 세라 워터스의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2002)와 <아가씨>의 방향성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소설 <핑거스미스>와 영화 <아가씨>의 차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서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과 일본으로 시대적 배경을 바꾸었지만, <아가씨>는 <핑거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총 3부의 이야기로 구성된 영화다. 1부는 아가씨의 저택에 하녀로 들어오게 된 숙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아가씨와 결혼한 다음, 그녀를 정신병원에 넣어 아가씨의 막대한 재산을 가로채려는 사기꾼 백작(하정우)이 있다. 보영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소매치기로 키워진 숙희는 백작의 계획을 도운 뒤 제 몫의 수고비를 든든히 챙겨 조선을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계획은 그녀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2부는 아가씨 히데코의 사연을 다룬다.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를 비롯해 그녀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가족 구성원들의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가운데 종종 1부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만 숙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건의 이면이 히데코의 시선을 통해 밝혀진다. 3부에 이르면 이 영화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맞이하게 되는 결말은 <핑거스미스>가 아닌 <아가씨>의 버전으로 온전히 새로 쓰여진 이야기다.

1부의 반전과 몇 가지 기본적인 설정을 차용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가씨>는 <핑거스미스>와 사뭇 다른 길을 가는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것을 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앞으로도 당신은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소설 속 수의 전언은 <아가씨>의 중요한 실마리다. 영화가 시작되면 갓난아기를 팔에 안고 등에 업은 초췌한 행색의 보영당 사람들이 숙희를 배웅한다. 숙희와 비슷한 또래의 소녀는 울먹이며 “그 왜놈 집엔 내가 가야 하는데!”라고 외친다. 이 장면을 보고 그 누구라도 딱한 사정으로 부유한 일본인의 집에 팔려가는 소녀의 기구한 운명을 짐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가씨>의 이 오프닝 신은 이어지는 숙희의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의 기대를 보기좋게 배반한다. 거대한 사기극에 성공하면 제대로 한몫 챙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보영당의 모든 사람들은 숙희를 부러워한다. 일본인의 집에 가고 싶다는 친구의 말은 안타까움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 질투의 다른 표현이다. 사건의 이면을 보기 전까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들을 속단하지 말 것. 이는 <아가씨>가 제안하는 게임의 규칙이며,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플레이어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같은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재구성하는 정정훈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수많은 놀라움과 반전으로 가득한 <아가씨>의 서사 구조를 뒷받침하는 일등공신이다.

무엇보다 <아가씨>는 스릴감 넘치는 케이퍼무비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인 숙희와 히데코, 백작이 각자의 계획을 은밀하게 설계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예기치 못한 일들은 장르적 쾌감과 재미를 동시에 선사한다. 원작 <핑거스미스>와 비교하더라도 이 영화의 케이퍼 장르적인 색채는 한층 짙어졌는데, 그건 3부에서 <아가씨>가 취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두 여성의 사랑과 자유를 실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세라 워터스의 원작 소설을 본 독자라면 <핑거스미스>의 3부에서 두 여주인공이 어떠한 감정의 격랑을 경험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브라이어의 대저택을 벗어나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진흙탕 같은 사회에서 제대로 쓴맛을 본 그녀들은 배신감과 악에 받쳐 스스로 추락한다. 이러한 삶의 진창 속에서도 어찌할 수 없이 느끼게 되는 본능적인 사랑의 감정을 조명하는 게 <핑거스미스> 속 3부의 역할이었다면, <아가씨>의 숙희와 히데코는 2부에서 서로의 마음을 빠르게 확인한 뒤 완전한 자유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둘만의 계획을 도모하고, 3부에서 모두를 속여가며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 한다. 원작의 강렬하고도 파괴적인 사랑을 <아가씨>에서도 목도하길 바랐던 관객이라면 원작과는 다른 이 영화의 선택에 아쉬움을 느끼겠지만, 그 선택에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두 여성의 애틋한 로맨스를 더 오랜 시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아가씨>가 주는 새로운 즐거움이자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대중적 성취일 것이다.

매 작품을 거치며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무섭게 확장해나가고 있는 김민희와 이 영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신인배우 김태리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는 것은 <아가씨>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김민희의 복합적인 표정과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은 김태리의 정직하고 거침없는 에너지와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을 선보인다. 이들이 지닌 특유의 사랑스러움은 종종 이 영화의 웃음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백작과 아가씨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두려워 이젤을 집어던지고 부리나케 백작이 주문한 물감을 가지러 뛰어가는 하녀가 귀엽고, 새초롬한 말투로 돌아누워 하녀에게 동침을 제안하는 아가씨도 사랑스럽다. 이미 잘 알려진 배우이든 한번도 존재감을 드러낸 적 없는 무명의 신인이든, 박찬욱 감독의 세계로 걸어들어온 여배우들은 저마다 나름의 개성과 매력을 부여받는 듯하며, 그 점은 <아가씨>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인 두 여배우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정서경 작가, 류성희 미술감독, 조상경 의상감독 등 그 어떤 남자감독보다 많은 여성 스탭을 기용해 오랜 협업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친절한 금자씨> 이후 거의 매 작품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은 박찬욱 감독의 신작을 기다리게 되는 또 다른 이유다.

선악 구도가 명확한 이 영화에서 악당은 남자배우들의 차지다. <아가씨>는 백작의 그림과 아가씨의 이모부 코우즈키의 서재로 대변되는 왜곡된 에로티시즘의 이미지를 숙희와 히데코가 몸을 섞어 공유하는 사랑의 행위로서의 에로스와 대비시킨다. 백작과 코우즈키가 오랜 시간 머무는 대저택의 서재에서 펼쳐지는 가학적인 낭독과 역할극은 <올드보이>의 근친상간과 <박쥐>의 신부가 행하는 정사처럼 금기의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을 통해 박찬욱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한계를 모르는 악당의 무시무시함이 아니라 여성들의 치밀한 계획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우스꽝스러운 패배의 순간인 듯하다. “그래도 X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백작의 말은 마지막 순간까지 악랄하고 잔혹했던 <핑거스미스>의 젠틀맨과 <아가씨> 속 백작의 간극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사일 것이다.

충돌과 파괴의 에너지, 그 행방은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스토커>를 만든 이후, 스스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한 적 있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는 확실히 <아가씨>에 이르러 어떤 변화를 겪게 된 것 같다. 7년 만에 그가 충무로로 돌아와 만든 이 상업 장편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 이후 가장 명쾌하고 대중적인 미덕을 지닌 박찬욱의 영화로 기억될 듯하다. <스토커>를 작업하며 다른 스탭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하는 과정의 어려움과 성취를 깨달았다는 그는 이번 영화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보다 많은 이들에게 납득 가능한 화법을 치열하게 고민한 듯하다. 혹자는 <박쥐>나 <복수는 나의 것>(2002)이 담고 있었던 불균질한 요소들이 발산하는 충돌과 파괴의 에너지가 <아가씨>에는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해 보이는 건 감독 박찬욱이 작가로서 성취한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시선과 발길을 돌리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소녀 3부작’을 마무리한 그는 또 어떤 영화적 모험을 기다리고 있을까. 박찬욱의 차기작이라는 <도끼>가 당도하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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