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서극과 <촉산전> [3] - 서극영화 베스트
2002-03-29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고전적 멜로부터 외팔이 검객의 비장미까지

상하이 부르스 上解之夜 1984년, 감독 서극 출연 장애가, 엽청문, 종진도

서극은 무협과 액션 전문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서극은 코미디와 멜로 연출에도 능하다. 능숙한 멜로 감각을 입증한 영화가 초기의 걸작인 <상하이 브루스>다. 1937년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젊은 아가씨 슈와 병사 퉁은 슈초우 다리 밑에서 우연히 만난다. 서로 반해 사랑에 빠지지만, 전쟁의 와중에서 서로 헤어진다. 10년이 지난 뒤 작가인 통과 나이트클럽의 쇼걸인 슈는 같은 아파트에서 만나고 살아가지만, 과거를 떠올리지는 못한다. 상하이라는 도시와 50년대에 만들어진 홍콩 뮤지컬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치는 영화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의 고전적 멜로영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

도마단 刀馬旦 1986년, 감독 서극 출연 임청하, 종초홍, 엽청문

한때 서극은 <영웅본색>을 여성 버전으로 만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꽤 구체적으로 했다. 그건 현실로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도마단>에서는 임청하, 종초홍, 엽청문이 연기하는 활기찬 여성 액션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1910년대 베이징을 배경으로 세 여인의 구국 활동을 그리고 있다. 베이징오페라에 관심이 큰 서극의 취향대로, 경극단이 주된 활동공간으로 설정되어 있고 경극의 춤과 움직임을 활용한 액션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웃음과 액션, 적당한 비장함이 오밀조밀하게 어우러진, 서극 영화의 초기 스타일을 만끽할 수 있는 영화다.

영웅본색3 英雄本色3 1989년, 감독 서극 출연 주윤발, 매염방, 양가휘

오우삼이 손을 뗀 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저주받은 걸작’.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세평은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애초에 <영웅본색>을 기획했던 서극은, 소마를 과거의 시간 베트남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젊은이들의 비극적인 싸움을 그려낸다. 아무런 비전이 없는 싸움에서, 그래도 무언가 긍지를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을. 주윤발의 검은 코트와 쌍권총이, 킬러로 나온 매염방의 의상과 버릇에서 연유했음을 알려준다.

황비홍 黃飛鴻 1991년, 감독 서극 출연 이연걸, 원표, 관지림, 장학우, 정측사

<동방불패>로 환상적인 무협의 세계를 열었던 서극이, 다시 정통 무술영화로 돌아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황비홍>은 세계열강의 위협 속에서, 천하의 중심이라고 믿던 중국인들의 혼란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이며, 젊은이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무술인 황비홍은 동과 서의 장점을 받아들여 중국의 정체성을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한다. 황비홍은 우연히 중국의 청년들을 미국의 광산에 팔아넘기려는 잭슨의 정체를 알아내고 제자들과 함께 그의 음모를 분쇄한다.

이소룡 이후 한동안 ‘사실적인’ 무술영화는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무술을 보일 수 있는 배우가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다. 어릴 때 중국의 무술대회에서 우승한 이연걸이 없었다면, 아마 <황비홍>도 없었을 것이다. 공중에 떠서 연속 발차기를 던지는 무영각은, 와이어 액션의 도움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연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중국 무술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이연걸의 야심과 중국인의 자긍심을 높이겠다는 서극의 동상이몽이 극적으로 맞아떨어진 영화.

서극의 칼 刀 1995년, 감독 서극 출연 조문탁, 혜천사, 상니, 주가령

호금전과 장철은 홍콩 감독이라면 누구나 숭배하는 거장이다. 서극은 호금전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신용문객잔>을 제작한 데 이어 장철의 <외팔이 검객>을 직접 연출했다. 칼을 만드는 평의 집에는 정안과 철두를 위시한 많은 제자가 있다. 칼의 축제가 열리는 날, 평은 정안에게 가업을 물려주겠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철두를 따르던 이들이 정안을 시기하자, 정안은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마침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비룡이라는 마적임을 안 정안은 복수를 다짐하며 떠나간다. 정안을 따라가던 평의 딸 소령이 마적떼한테 붙잡히고, 정안은 소령을 구하려다 한쪽 팔을 잃고 벼랑으로 떨어진다. 흑두란 여자에게 구출된 정안은 새로운 무공비급을 익혀 비룡에게 복수를 한다.

<서극의 칼>은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도’라는 원제처럼, 간단명료하게 사랑과 복수의 나날만을 그려낸다. 그리고 서극은 한쪽 팔로 최강의 무공을 익히기 위한 정안의 피눈물나는 노력, 한쪽 팔만으로 행하는 기묘한 음직임의 무공을 보여주는 것에만 혼신을 기울인다. 파랗게 빛나는 칼이 핑핑 소리를 내며 공중을 가를 때의 날선 느낌은 <서극의 칼> 후반부를 장악한다.

순류역류 Time and Tide 2001년, 감독 서극 출연 사정봉, 오백, 서자기, 노교음,

할리우드로 간 서극은 그러나, 투항한 것이 아니었다. 서극은 할리우드 자본으로 자신의 영화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블 팀>과 <넉 오프>로 몸을 푼 서극은 <순류역류>로 자신의 스타일을 과시한다. 난데없는 치정극으로 시작하는 서두, 하지만 카메라가 남미로 날아간 후부터 <순류역류>는 해일처럼 몰아친다. 타일러는 보디가드 일을 하다가 잭의 도움을 받고 친구가 된다. 잭은 남미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킬러. 과거에 잭과 함께 일했던 파블로는 홍콩의 거물급 인사를 타깃으로 입국한 뒤 잭을 찾아온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한 잭이 거부하자, 파블로 일당은 잭의 목숨을 위협한다.

<순류역류>의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때로 어떤 장면은 지나치게 신파적이고, 캐릭터들도 하나의 얼굴밖에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낡은 아파트에서 잭과 타일러, 그리고 파블로 일당이 펼치는 총격전은 어떤 무협영화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움직임’의 쾌감을 안겨준다. 로프에 몸을 매달고, 전후좌우로 날아다니며 관객의 눈을 어지럽히는 액션은 서극이 <황비홍>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사다리 액션과 의자 액션신을 능가한다. 서극의 ‘스펙터클’이, 그 자체로 경지에 올랐음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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