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서극과 <촉산전> [1]
2002-03-29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오 위대한, 위대한 실패작이여!

서극은 아직도 꿈을 꾸는 사람이다. 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푸른 기운 서린 안개 속에 뿌리없는 산봉우리를 세우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웅들의 수천년 무용담을 한번의 숨결로 풀어놓는다. “여자에게 꽃을 꺾어주는 낭만은 모르지만 내겐 기억이 곧 로맨티시즘”이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속에선 아직도 장대하고 낭만적인 신화가 굳건한 벽처럼 버티고 서 있다.

그 때문에 <촉산전>은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와 쉬어갈 줄 모르고 강렬하기만 한 영상이 뒤얽힌 실패작이면서, 그의 대표작이다. <촉산>으로 첫마디를 뗐다고 할 수 있는 <촉산전>은 <소오강호>와 <동방불패> <선학신침> <청사> 등 중국신화의 흔적이 꾸준히 박혀 있는 서극 영화세계의 정점이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그렇다. <촉산전>을 마주한 우리가 부당하게 박대받아온 서극의 이십년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무모한 용기가 빚어낸, 꿈같은 영화. 이젠 잠을 자면서조차 꿈다운 꿈을 꾸는 어른이 없는데, 서극은 잊지 못한 꿈을 현실로 만드는 진정한 모험가다. 편집자

역사의 전환점이 만들어지는 것은 위대한 몽상가의 헛발질 때문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위대한 피츠카랄도가 오페라하우스를 밀림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갈 때의 그 무모함, 그 지독한 오만과 열정 같은 것들. 보통사람이라면 결코 생각하지 않을, 멍청한 짓이라고 비웃을 일을, 평생에 걸쳐 해치워버리는 몽상가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성취한 업적은 다르지만, 불가능한 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한니발, 마르코 폴로, 에드 우드 등은 비슷하지 않을까. 그들의 무모하면서도, 위대한 시도는 다음 세상을 바꾸어버린다. 수많은 영웅들, 혹은 역사에 남지 않은 무모한 모험가들과 몽상가들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서극은? 상업적이고 오락적인 영화의 제작자이자 감독인 서극에 대해서도,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촉산전>은 위대한, 위대한 실패작이다. 이 영화에는 캐릭터의 구축도, 플롯의 엄밀함이나 유려함도, 배우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연기도 없다. 오로지, 오로지 스펙터클, 그것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스펙터클뿐이다. 그냥 손을 뻗으며 공중을 날아다니고, 수천개의 비도(飛刀)가 하늘을 갈라놓으며, 검기(劍氣)가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하고도 몽상적인 스펙터클.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지극히 즐겁거나 혼란스럽거나 둘 중의 하나다. 중간의 무엇은 없다. 경탄하거나, 비난하거나. 하지만 반응이 어느 쪽이건 상관없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감독의 마음이 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 서극은 이 영화를 만들 날을 기다렸을까. 이런 영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왔을까.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판타지와 상상력만으로 가득찬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언제나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서극은 그 ‘의문’의 답을 영화로 구현했다. 바로 <촉산전>으로.

영화로 만나는 ‘중국 신화’로 가는 길

1983년의 <촉산>에서 <천녀유혼>, <소오강호>와 <동방불패>, <선학신침>과 <청사>, <황비홍>은 모두 <촉산전>으로 오는 징검다리였다. 그리고 아직도 그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서극의 필생의 꿈은 중국의 신화와 전설을 영상으로 옮기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와 고전 문학 속의 이야기들은 항상 나를 매혹시킨다. 그 속에는 나를 웃고 울게 만드는 강한 힘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영화로 만들어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이것은 서극 영화인생의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은 <촉산>에서 시작했고, <촉산전>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서극의 그간 행로는, 영화로 만나는 ‘중국신화’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서극와 비슷한 몽상가들은 물론 할리우드에도 있다. 필름 코멘트는 서극을 ‘홍콩의 스필버그’라고 불렀다. 다양한 장르의 환상적인 스펙터클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서극은 스필버그와 닮았지만, 지독한 고집은 오히려 조지 루카스와 근사(近似)하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개봉 20주년을 맞아 재개봉을 단행했다. 20년 동안 놀랍도록 발전한 디지틀 특수효과 기술을 이용하여, 당시 미흡했던 장면들을 손질한 ‘특별판’을 내놓은 것이다. 재개봉을 하는 주된 이유는 개인적인 욕망이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3부작을 만든 뒤, 감독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이 만든 특수효과전문 회사인 ILM에 집중했다. <스타워즈>의 나머지 이야기를 중단한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머릿속에서 용솟음치는 이미지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길 수 없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루카스는 서극과 닮은 ‘유아적인’ 몽상가다.

언젠가는 반드시 만들겠다고 서극이 공언했던 작품은, 중국신화의 정수라고 할 <서유기>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한 전초전이 1983년의 <촉산>이었다. 30년대에 쓰여진 무협지 <촉산검협전>을 원작으로, 산을 옮기고 하늘을 나는 신선과 마왕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긴 것이다. 마침 할리우드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상상을 영상으로 옮기던 스필버그와 루카스의 시대가 막 열린 참이었다. 서극은 조지 루카스의 ILM을 초빙하여, <촉산>의 특수효과를 맡겼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해외에서는 그런 대로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홍콩에서는 흥행에서 실패했고 서극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볼 때도 수준 이하였다. ILM의 특수효과는 나름대로 훌륭했지만, 도복을 입은 중국인이 펜싱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어색했다(구로사와 기요시의 공포영화 <스위트 홈>도 할리우드식 특수효과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동과 서의 ‘환상’은 다른 유형이었고, 자연히 특수효과도 달라야 했다).

<촉산>의 실패는 전환점이었다. <접변> <제일유형위험> 등 도발적인 작품을 만들어왔던 서극은, 이후 ‘상업적’인 영화의 제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것이 왕정처럼 오락 일변도의 작품을 만드는 노선은 아니다. “영화는 너무 심각해지면 안 된다. 무언가를 배우러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용적인 뭔가를 원하면 다큐멘터리를 보면 된다. 영화는 우선적으로 엔터테인먼트다. 그리고 실제의 삶과 그들이 원하는 더 나은 삶 사이에서 느끼는 지루함과 혼란의 갭을 메워주는 것이다.” 서극은 84년 전영공작실이라는 이름의 영화사를 설립한다.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화사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영공작실은 자신의 스타일을 가진 감독들에게 주목했고 오우삼, 정소동 등을 끌어들였다. 그것은 전영공작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오락적이면서도 어딘가 독특한 색깔이 있는 영화를 만드는 곳. 서극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홍콩액션의 정수 <순류역류>로 ‘세계화’ 이뤄

서극은 정말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 제작해왔다. 서극의 영화는 창조적이면서, 어디에선가 본 듯한 장면들도 많다. 심한 경우는 <철갑무적 마리아>처럼 <로보캅>의 기본 골격을 가져다가 주인공의 성별만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패러디나 차용에 대해서, 서극은 별다른 자책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가끔 작곡도 하는데, 어느 날 비행기에서 음악을 듣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왜 내가 발표도 하지 않는 곡을 누군가 연주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 잠을 자면서 음악을 듣는 버릇이 있다. 잠자며 들은 음악이, 내가 작곡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재현되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내가 영화를 찍을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재현된다.” 서극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인용과 변주도 서슴지 않는다. 서툴면 모방일 뿐이고, 잘 되면 모든 것을 아우르며 새로운 경지로 넘어간다. 그런 이유로 몰상식한 태작들도 많기는 하지만, <서극의 칼>이나 <순류역류> 같은 영화에서는 그 ‘인용’을 뛰어넘는 서극의 독창적인 스타일과 주제가 불길을 토해낸다.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홍콩영화계의 물길을 바꿔놓은 서극은 전혀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아류작의 홍수 속에서, 서극은 정통무협물로 자리를 옮긴다. 서극은 홍콩영화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호금전을 모셔다가 김용의 소설을 각색한 <소오강호> 연출을 맡긴다. 하지만 호금전의 선(禪)적인 스타일과, 서극이 요구한 휘황찬란한 ‘무협’은 아귀가 맞지 않았고 결국 호금전이 물러난다. <서검은구록>의 허안화까지 잠깐 촬영장을 기웃했다가 나간 뒤, 서극이 마무리를 지은 <소오강호>는 아쉬운 실패작으로 남는다. 서극은 <소오강호>의 가장 큰 문제를, 배우라고 생각했다. 허관걸은 뛰어난 배우지만, 무협영화의 근간인 무예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홍콩에서는 전혀 무술을 하지 못하는 배우라 해도, 와이어액션과 카메라 테크닉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붕붕 나르게 만들 수 있지만 서극이 원한 것은 그런 ‘속임수’가 아니었다. 서극은 중국인의 정수라고 할, 마음과 몸을 함께 다스리는 진정한 영웅이 등장하는 무협영화를 원했다.

서극이 찾은 배우는 이연걸이었다. 대륙 출신의 이연걸은 직접 고난도의 무술을 실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주연급 배우였다. 서극은 이연걸을 끌어들여 <동방불패>를 만들었다. <천녀유론>의 정소동이 감독한 <동방불패>는 바다가 갈라지고, 땅이 뒤집히는 호쾌한 무협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뒤 서극은 직접 감독을 맡아 <황비홍> 시리즈를 만들어낸다. 실존 인물인 황비홍은 초창기 홍콩영화에 100여 회 이상 단골로 등장하는 영웅이었다. 황비홍의 젊은 시절을 코믹하게 그린 <취권> 등으로 흔적이 남기는 했지만, 한동안 잊혀져 있던 황비홍은 서극과 이연걸의 손으로 부활했다. ‘중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서극과 이연걸은, <황비홍>에서 중국인의 자긍심을 맘껏 펼쳐보인다(이후 이연걸은 역시 실존 영웅인 방세옥과 홍희관을 차례로 연기한다). 그러면서도 비극적인 홍콩의 현실을 토로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97년이면 다시 중국으로 귀속되는. 홍콩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짓지 못하고, 끌려다녀야만 하는 심경이 <황비홍>에서 잘 드러난다.

<황비홍>을 만든 뒤 서극은 두 가지 전략을 택한다. 하나는 <선학신침> <청사> <서극의 칼> 등 ‘중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왕조현과 장만옥이 출연한 <청사>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푸른 뱀의 설화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다. <청사>의 특수효과는 조악하지만, 이 영화를 굳이 만든 이유는 확실하다. 이리저리 우회한 듯하지만, 서극의 꿈은 변함이 없었다. 중국의 신화와 전설을 영화로 만드는 꿈은, 세월이 흐를수록 강고해진 것이다. 또 하나의 전략은 세계화였다. 서극은 할리우드에 가서 <더블 팀>을 만든다. 뻔한 B급액션영화. 다음 작품의 주연 역시 장 끌로드 반담이었지만, 배경은 홍콩이다. 장 끌로드 반담을 홍콩으로 데리고 와서, 홈그라운드에서 액션영화를 찍은 것이다. 다음 수순은, 배경만이 아니라 배우까지 홍콩배우를 쓰는 것이다. 콜롬비아에서 제작비 전액을 투자한 <순류역류>는, 홍콩영화다. 홍콩배우가 홍콩에서 활약하는 정통 홍콩액션영화. <촉산>처럼 어설프게 동과 서를 결합시켰던 전작과는 달리 <순류역류>에서 비로소, 서극은 자신의 실력을 발휘한다. 화려한 와이어액션으로 상하좌우 모든 공간을 100% 활용하는 홍콩액션의 정수를 <순류역류>에서 보여준다.

신화와 전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잡다

<순류역류>로 건재를 과시한 서극은, 마침내 과거의 꿈을 이루는 <촉산전>을 만들었다. 서극은 <스타워즈>나 처럼 특수효과 일부를 수정하고,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원작을, 발전된 특수효과를 이용하여 ‘완성’하고 싶어했다. <촉산전>은 <촉산>의 업그레이드판이다. 단순한 특별판이 아니라, 과거 그가 만들고 싶어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들을 비로소 실현시킨 완성본인 것이다. 그 힘은 물론 특수효과다. <촉산전>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찬란하게 볼거리가 펼쳐지지만, 단순한 볼거리의 향연만은 아니다. 서극은 자신의 ‘스펙터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서극은 어린 시절부터 글로 읽었던 광대하고, 유려한 중국신화를 눈으로 보기를 원한다. 그건 <와호장룡>처럼 육체를 고도로 활용하여 자연의 이치에 맞닿은 영웅들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촉산전>의 영웅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신선이다. 신선의 자태와 무용을 스크린에 담는 것. 그것이 서극의 이상이었다.

“나는 로맨티시즘과 철학과 몽상이 합쳐진 영화를 만들고 싶다.” 서극의 영화는 그 모든 것의 총합이다. 그 모든 것들이 가장 완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세계는, 신화와 전설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세계처럼, 중국신화의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 서극이 영화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 완벽함이다. 하지만 완벽함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촉산전>은 리얼리티에는 무감하다. 한번 수련을 쌓기 시작하면 수백년이 흘러가고, 이미 죽은 사람의 정기를 모아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 광활한 상상의 세계가 <촉산전>에서 무위롭게 펼쳐진다. 어떤 것도 가능하고,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는 세계. 애초에 서극은 불가능한 영화를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촉산전>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펙터클에만 집착하는 것은 그 이유다.

서극은 이제 출발점에 서 있다. 그동안 돌아온 길은, 1983년에 만들었던 <촉산>의 출발점에 다시 서기 위한 여정이었다. 1983년에 꿈꾼 영상을 이제 실현했고, 신화와 전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막 잡은 것이다. <촉산전>은 서극의 20년을 기념하거나, 마감하는 영화가 아니다. <촉산전>은 첫걸음을 다지는, 제자리에서 뛰는 일종의 몸풀기 정도다. 서극은 아직 본 게임을 뛰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스파링에 불과했고, 신화와 전설을 영상으로 쓰는 메인이벤트가 남아 있다. 국내에서 유난히 저평가받고 있는 서극의 내일을 기대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것은 빙산의 일각, 아직도 9할 이상이 물 속에 잠겨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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