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 <슈츠> 등 평소 즐겨보는 미국 드라마 (이하 미드)에 참여한 사람들이 온다고 해서 무척 궁금했다. 지금은 영화 아이템을 드라마로도 기획할 수 있는 시대이지 않나. 우리가 가진 기획력으로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얘기가 있나 싶어 왔다.” 지난 8월31일 오후,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에서 진행된 방송작가 국제포럼 ‘세계가 공감하는 글로벌 드라마의 힘’(주최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참석한 사람 대부분은 용필름 이유정 프로듀서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인이 왜 방송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포럼에 참석하는지 의아해할 법도 하지만 그녀를 포함한 감독, 프로듀서, 시나리오작가, 촬영감독 등 젊은 영화인들에게 미드는 친숙한 매체다. 그들은 웬만한 인기 미드를 다 챙겨본 건 물론이고 시즌 하나를 밤새워 몰아보는 건 일도 아니다. J. J. 에이브럼스(<로스트>), 데이비드 핀처(<하우스 오브 카드>), 마틴 스코시즈(<보드워크 엠파이어>) 등 많은 영화감독들이 연출한 미드는 캐릭터가 무척 매력적이고, 다음 편을 곧바로 보고 싶을 만큼 ‘떡밥’이 강력했으며, 특수한 소재를 보편적인 메시지로 전달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들이 선보인 영화언어는 이후 등장하는 다른 미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덕분에 영화와 미드는 분명 다른 매체지만 미드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때가 있고, 영화가, 특히 장르영화가 미드보다 더 미드 같을 때도 있다. 이처럼 현재 영화와 미드의 크로스오버는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그것은 방송과 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할리우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감독, 시나리오작가, 기술 스탭 등 영화 인력이 방송으로 옮겨간 지 오래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나 충무로가 갈수록 텐트폴 영화(제작사의 라인업에서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영화) 제작에 주력하고 있다면, 현재 <HBO> <ABC> <CBS> <FOX> 같은 미국 메이저 방송 스튜디오들은 옛날 영화 판권을 확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FOX>는 버디무비 <리쎌 웨폰> 시리즈와 오컬트무비 <엑소시스트>를 리메이크 해 9월21일과 23일에 각각 첫선을 보인다. <CWTV>는 30년간의 시간을 뛰어넘으며 아버지의 죽음을 막는 내용의 영화 <프리퀀시>를 리메이크해 10월5일에 첫 공개한다. 또 <CBS>는 성룡의 액션 코미디 <러시아워>를 총 13부작 드라마로 리메이크해 지난 8월20일 방영했다. <FOX>가 제작한 10부작 드라마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지난해 가을에 방영이 끝났다. 지난해와 올해 공개된 작품만 놓고 보면 <더 나이트 오브>나 <미스터 로봇> 같은 오리지널 시리즈에 비해 상당히 실망스러웠다는 반응이 많지만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분위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미국에서 영화가 드라마로 리메이크되는 바람이 불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미드가 한국판으로 리메이크 되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동명의 미드를 원작으로 한 tvN 드라마 <굿와이프>는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얼마 전 종영했다. 11월4일 방영예정인 tvN 드라마 <안투라지> 또한 할리우드 쇼비즈니스 세계를 그려낸 동명의 미드 <안투라지>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또 내년 1월 사전 제작에 돌입하는 한국판 <슈츠>(제작 엔터미디어 콘텐츠)는 하비 스펙터와 마이크 로스 두 선후배 변호사의 우정과 변호사 세계를 생생하게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슈츠>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반대로 미드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는 한국 드라마도 몇 있다. <별에서 온 그대>와 <굿 닥터>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작업 중이다.
미국과 한국,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 미드와 한국 드라마의 경계를 넘나드는 움직임이 활발한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또는 시청자)은 갈수록 새롭고 신선한 작품을 보길 원하고, 스튜디오나 제작사는 라인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로운 작품을 확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CJ E&M 방송 사업부문에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한 PD는 “특히, 한국은 드라마 제작 편수가 늘어난 반면 실력 좋은 작가의 숫자는 적다”면서 “그러다보니 드라마 제작 트렌드가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하나는 출생의 비밀, 복수, 기억상실 등을 소재로 한 막장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굿와이프>나 <안투라지> 같은 검증된 원작의 판권을 구매한 뒤 한국 상황에 맞는 프리미엄 드라마를 내놓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국판 <슈츠>를 준비하고 있는 엔터미디어 콘텐츠 이동훈 대표 역시 “사실 해외 드라마를 리메이크 한 것은 최근의 움직임이 아니다. <노다메 칸타빌레>같은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해서 성공을 거둔 사례는 많다”라며 “하지만 최근의 방송 제작사들이 검증 된 미드 판권을 구매하는 건 기존의 드라마와는 품격이 다른, 그러니까 영화 같은 드라마를 제작하고 싶어서인 것 같다”고 말한다.
한편 <왕좌의 게임> <트루 디텍티브> 등 많은 드라마를 제작한 마이클 엘렌버그 <HBO> 드라마개발부문전 수석부사장, <슈츠>를 제작한 힙노틱필름 진 클라인 대표, <드라마월드>를 제작한 숀 리처드 서드컬처콘텐츠 대표, <미생> <시그널>을 연출한 김원석 PD 등 국내외 프로듀서 4명이 참석한 이날 토론은 한국과 미국의 프로듀서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일단, 한국과 미국의 드라마 제작 방식과 시스템이 상당히 달랐다. 보통 한명의 감독과 한명의 작가가 드라마를 이끌고 가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여러 명의 감독이 투입된다. 그러다보니 한 시즌에 투입되는 여러 명의 감독들은 일관된 톤으로 연출해야 한다.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감독과 작가진간의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진 클라인 대표는 “새롭게 합류한 감독에게 기존의 톤을 이해시키는 프로세스를 필수적으로 진행한다”고 말했다. 그 프로세스는 수많은 회의들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 개발 단계에서 프로듀서와 작가가 참여하는 두 차례의 미팅, 감독이 합류하면 그들에게 톤 앤드 매너를 전달하는 톤 앤드 매너 미팅, 감독이 프로듀서에게 어떻게 연출할 거라는 내용을 전달하는 컨셉 미팅 순으로 진행되는 식이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제작되는 파일럿 프로그램도 작가와 감독 그리고 프로듀서가 일관된 비전을 공유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마이클 엘렌버그는 “각각의 에피소드가 톤이 다르면 감독이 프로젝트의 비전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면 된다. 제작진이 하나의 비전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는 게 중요한 것도 그래서다”라고 설명했다.
시놉시스를 사전에 검토하고 회의를 한 뒤 투자를 결정하는 한국 방송계와 달리 미국은 라인업에 포함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피칭을 거쳐야 한다. 그 점에서 피칭 시스템은 충무로의 그것과 흡사해 보인다. 진 클라인은 “작가로서 절박한 진실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0분 안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전달해야 한다”면서 “피칭에 강점이 없는 작가라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피칭을 잘하는 좋은 조력자에게 조언을 구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또 김원석 PD는 미국에서는 보편적이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시도된 적이 없는 시즌제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았다. <미생>과 <시그널>이 종영했을 때 시청자들로부터 “시즌2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미생>은 원작이 존재한다. 원작인 웹툰이 시즌2가 끝나야 드라마의 시즌2도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그널> 또한 시즌제를 고려해 제작한 작품이 아니다. 다만 드라마를 만들면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추가적으로 해볼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논의된 부분은 없지만 말이다”라는 게 김 PD의 설명이다.
어쨌거나 현재 산업 분위기를 고려하면 미드를 한국 드라마로 리메이크하는 바람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미드가 옛날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미드를 리메이크하는 작품은 장단점이 분명하다. 대본이 나오기 전에 배우를 설득하는 데 이점이 있는 반면,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가 해외 판권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판권 판매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미드와 한국 드라마의 크로스오버는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