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의 시계가 빠르게 가고 있다. 국정 농단을 입증할 증거가 된다면 마지막 하나까지도 모두 밝혀야 한다. <씨네21>은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 일지를 다시 살폈다. 일지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근거한 정부의 <다이빙벨>과 관련한 외압(<씨네21> 1087호)뿐 아니라 <명량> <국제시장>에 대한 언급도 있다.
2014년 8월14일자에는 ‘長’(김기춘 전 비서실장), ‘CJ그룹, 명량 관련 고무’, 2014년 12월26일자 ‘長’, ‘영화 <국제시장> 保守(보수), 애국’, 12월28일자에는 ‘<국제시장> 제작 과정 투자자 구득난-문제 有. 장악, 관장 기관이 있어야’라 적혀 있다. CJ E&M이 투자·배급한 영화 <명량>은 2014년 7월30일 개봉했다. 그해 8월6일 박근혜 대통령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 비서관들과 함께 여의도CGV에서 <명량>을 관람했다.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민관군이 합동해 위기를 극복하고 국론을 결집했던 정신을 고취하고, 경제 활성화와 국가혁신을 한마음으로 추진하자는 의미가 있다”라며 청와대의 영화 관람 소감을 전했다. <명량>에 고무된 청와대가 앞장서서 <명량> 고무를 지시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다. 영화계 관계자는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운 게 박정희 정권이다(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졌다.-편집자). 이순신 장군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명량>의 흥행 고무를 지시한 것”이라고 전했다.
“장악, 관장 기관 있어야”
2014년 11월 말, 박근혜 대통령은 손경식 CJ그룹 회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CJ의 영화·방송 사업이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 방향을 바꾸라”고 말했고 손 회장은 “죄송하다. 방향을 바꾸겠다”고 답했다.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을 비롯해 영화인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을 풍자한 tvN의 <SNL코리아>의 시사 풍자 코너 ‘여의도 텔레토비’에 대한 보복으로 이미경 전 CJ그룹 부회장 사퇴를 요구했다”고 해석했다. 업무 일지에 <국제시장>을 두고 ‘구득난’이라 말한 건 청와대가 업계 사정을 전혀 모른 채 한 소리로 보인다. <국제시장>은 업계 1위인 대형 투자·배급사 CJ E&M과 다년간의 제작 경험으로 여러 편의 흥행작을 만들어온 JK필름이 만든 영화다. 정작 청와대가 하고 싶은 말은, ‘장악, 관장 기관 있어야’로 ‘구득난’은 제 입맛에 맞는 영화만 보고 싶다는 청와대의 명분용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이어지는 기사에서 이와 관련한 정치인, 영화인들의 해석을 들어봤다).
CJ그룹은 바로 다음해인 2015년 CGV 극장을 통해 ‘프리미엄 코리아’라는 극장용 광고를 내보낸다. 광고는 ‘우리 민족’을 강조하며 ‘이토록 큰 자부심을 주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마무리된다. CJ그룹의 비전이나 활동 소개는 전혀 없고 국가 홍보용 광고로 보일 정도라 관객 사이에서는 ‘국뽕광고’로 불렸다. CGV의 조성진 홍보팀장은 “CGV는 광고비를 받고 상영만 했다”며 “광고의 내용과 집행 과정은 CJ그룹에서 결정한 사항”이라고 말한다. CJ그룹 홍보실 한수경 부장은 “CJ그룹 사장단이 제작을 결정한 광고다. 2015년은 CJ그룹이 문화 사업을 시작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여러 기념행사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광고의 의미를 일축했다. 광고 내용에 대해서는 “2014년 <명량>으로 큰 사랑을 받아 국민들께 감사한 마음과 세월호 사고로 국가·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라 ‘다들 힘내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CJ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 광고가 ‘현 정부의 외압과 그룹의 몸 사리기에서 나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CJ E&M도 ‘창조경제를 응원합니다’라는 극장 상영용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씨네21>은 업무 일지의 2014년 12월10일자 메모, ‘바른사회(시민회의)와 행복한 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행변) 역시 주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청와대는 업무 일지에 ‘보수 법률가 단체 活用(7월7일)’, ‘보수 법률 단체 現況(9월25자)’ 등을 언급하며 세월호 유족쪽 변론을 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 변호사들을 주시해왔다. 행변은 2014년 9월16일 조희연 서울시 교육청 교육감의 자사고 폐지 주장을 국민의 교육권 침해라며 성명서를 내면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세월호 유가족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대리 기사의 무료 변론을 맡기도 했다. 청와대가 민변에 대항할 목적으로 결집시킨 보수 법률인 모임이 행변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행변에는 세월호 특조위가 대통령의 행적을 조사하려 하자 반발하며 특조위원직을 사퇴한 차기환 변호사도 있다. 그는 정호성 전 비서관의 변호사이기도 하다. 그와 사법연수원 17기 동기인 이인철 변호사 역시 행변 소속이다. 이인철 변호사, 그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비상임 감사다.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이 2016년 3월 임명한 2년 임기직이다. 차기환, 이인철과 연수원 동기에는 더블루케이 한국법인의 대표였던 최철 변호사도 있다. 최철 변호사는 행변의 발기인인 강래형 변호사와 같은 법무법인 웅빈 소속이다. 영진위가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충실히 실행에 옮겼음이 밝혀진 이상 영진위 내부의 ‘수상한’ 커넥션을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 충분히 가능하다. 영진위는 그동안 블랙리스트의 존재와 실행을 전면 부인해왔다. 지난해 국정감사와 문체부 특별감사로 위원장과 사무국장의 비위 사실까지 확인됐다. 사무국장은 직위해제됐고 김세훈 위원장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에 이의신청을 한 상태다.
영진위,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영화인들은 영진위를 국정 농단의 부역자로 보고, 김세훈 위원장과 부산국제영화제에 외압을 행사한 서병수 부산시장의 사퇴와 구속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영진위의 최고 의결기구인 9인 위원회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12월30일로 임기가 만료된 3인의 위원을 새로이 구성하기 위해 임명권을 가진 문체부가 영화인들을 상대로 인재 추천을 받고 있다. 영진위 주무부처인 문체부 영상콘텐츠사업과의 박정후 사무관은 “문체부에 등록된 60여개의 영화 관련 단체에 추천해달라고 요구서를 보냈다”며 “이중에는 현재 활동을 하지 않거나 영화와 상관이 없는 듯한 단체도 여럿”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임의적으로 (추천인 명단에서 활동하지 않는 단체들을) 빼버리면 불필요한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였으나 추천인을 제대로 받아보겠다는 문체부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되는 지점이다. 박 사무관은 “(영화인 추천제는) 2009년에 만들어진 시행령에 따른 것인데 별 효과가 없어서 2012년 이후로는 추천을 받지 않아왔다. 필요한 경우 영화계 원로들의 추천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문제를 개선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음을 자인한 셈이다.
영화계는 문체부의 추천인 제안을 전격 거부했다.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는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 임명하는 9인 위원을 수용할 수 없다. 시급한 사업이 아닌 이상 2017년 영진위 사업을 전면 중단하라. 새로운 정부 수립 이후 영진위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이 정권에 부역한 9인 위원회도 전부 사퇴하라”고 강력 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