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더 킹>과 2010년대 검사 영화들
2017-02-08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더 킹>

1960년대 후반 일본 미술계에는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소니가 컬러TV를 발매(1968)하고 총천연색 영상이 일본의 각 가정에 전송될 즈음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경제가 살아나고 영상 매체가 돌풍을 일으키자, 첨단 복제 시대를 성찰하려는 일군의 미술가들은 가장 원초적인 복제 매체인 판화를 꺼내들었다. 작가들은 18세기 중엽 창안된 다색 판화, 그러니까 컬러 복제 매체인 우키요에(浮世繪)의 후손을 자처하며 영상 복제 시대에 질문을 제기했다. 70년대 요시다 가쓰로나 기무라 고스케 같은 작가들은 당대 도시 풍경이나 뉴미디어의 이미지 사진을 가져다 작품에 반복하거나 겹치게 배치하면서 새로운 판화 형식을 시도한다. 급변하는 현실 속에 미술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는 반(反)형식 실험으로, 200여년 전 자국 미술의 역사에서 성찰의 도구를 발견한 셈이다.

70년대 일본 판화는 이렇게 일본 현대미술의 부흥을 견인한다. 팝아트의 기운이 물씬한 당시 판화 작품들에는 어딘지 모를 쓸쓸함과 함께 시대에 대한 걱정이 스며 있었다. 얼핏 보면 포토숍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진 합성 작업 같기도 하다. 예술이 예술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데는, 현실과 맺는 관계와 맥락에 있을 것이다. 마르셀 뒤샹이 뉴욕 전시장에 소변기를 가져다놓고는 “미(美)는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한 뜻도 이와 같다. 맥락에 따라 변기는 예술이 된다. 여기서 나온 게 ‘레디-메이드’(ready-made) 개념이다. 이후 팝아트는 물론 20세기 예술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예술은 현실과 상응하며 기존의 것을 반성한다. 데칼코마니처럼 현실을 반영 또는 재현하다가 대칭이 깨지는 어느 순간, 툭 하니 예술만의 가치를 내놓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뒤샹의 변기 작품 <샘>(1917)이 전시된 지 올해로 꼭 100년이다.

요시다 가쓰로의 , 1970, 실크스크린, 74.5×78cm

<더 킹>이 선보이는 미디어아트

한국에 컬러TV가 유행하기 시작한 시절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더 킹>이 레디-메이드 영상을 활용하는 방식은 익숙한 듯 다르다. 뉴스 영상을 허구 속에 가져다 붙이는 편집은 한국 상업영화 가운데 손꼽힐 만큼 노골적이다. 술잔을 탑으로 쌓아올린 이미지 화면이나 앞뒤 대칭을 이루는 몇몇 조합에선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작업이 연상되기도 한다. 유머와 음모, 의리와 회한이 집약된 교통사고 프롤로그가 지나가면 현대사와 이 영화가 데칼코마니라고 선언하는 타이틀 몽타주가 펼쳐진다. 현실과 예술, 역사와 허구가 한몸이라는 입장 표명이다. 한재림 감독은 대놓고 “이 영화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서 시작됐다 ” (<씨네21> 1090호 씨네 인터뷰)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영상 사이로 허구 속 비리 검사들이 검찰청사 창밖을 내려다보고, 조폭들이 개를 풀어 사람을 뜯어먹게 하는 장면을 짧은 호흡으로 섞은 다음, 작심하고 “복수”를 말한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 아닌가. 영화적 방식이라기보다 덧셈에 가까운 편집으로 ‘이게 다 검찰 때문’이라고 밀어붙인다. “방아쇠를 당겼다”는 비유적 표현을 쓰면서 실제 총알이 날아가는 장면을 연출한다. 아예 연설문을 쓰지 그러나 싶을 때,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진짜로 연설문을 읽는다. “선거 결과는 당신의 몫”이라며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투표 똑바로 하시라고 메시지를 들이민다.

이게 예술인가, 라고 묻는다면 뒤샹의 변기나 70년대 일본 판화를 인용해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초호화 캐스팅의 상업영화는 전두환 정권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에두르지 않고 직진한다. 친절한 내레이션도 잊지 않는다. YTN 앵커를 기용한 가상 뉴스가 아니라 실제 아카이브 속 자료화면이 불쑥불쑥 허구에 개입한다.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 실제 뉴스가 삽입되는 경우는 많지만, 극 전개를 위한 연결고리일 뿐 <더 킹>의 태도와는 근본에서 다르다. 백남준의 브라운관처럼, 있던 것과 지어낸 것이 깍지 끼듯 관계한다. 탄핵과 특검 정국의 한가운데에서 <더 킹>을 보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실재와 창작의 만남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환기 시킨다.

<부당거래>

2010년대를 지배한 검사 영화

<더 킹>의 노골성이 우리에게 갑작스럽지만은 않다면, 그간의 경험이 계단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현실은 늘 허구보다 갑작스러웠고 이에 따르는 영화들이 세부 장르로 정착해왔다. <부당거래>(2010, 관객 273만명)를 기점 삼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 472만명, 이하 <범죄와의 전쟁>), <내부자들>(2015, 감독판 포함 916만명), <검사외전>(2016, 970만명), <아수라>(2016, 259만명)를 묶으면 ‘검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2010년대 한국영화’로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법정 실화를 소재로 한 <도가니>(2011, 466만명), <부러진 화살>(2012, 346만명), <변호인>(2013, 1137만명)이 모두 제작진의 목표를 뛰어넘으며 흥했다. 설 연휴를 지낸 <더 킹>의 1월30일 현재 스코어는 427만명. 나열한 영화의 관객수를 산술적으로나마 모두 더하면 검사를 비롯한 법조인이 5266만 관객을 끌어모았다는 셈이 나온다. ‘부패 권력’이 영화의 주역이라는 공통점에도 예외가 없다. 캐스팅이나 개봉 시기 등 복합적인 흥행 요인을 감안하더라도 몇 해 사이 특정 직업군이 이토록 급부상한 적은 없었다. <친구>(2001)의 조폭 이후 처음이다.

<내부자들>

사회현상으로서 이같은 흐름은 전세계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한국만의 특수 상황이다. 영화계의 제작 능력과 그 주변 문화는 줄곧 성숙해온 데 비해 부정부패와 권력에 대한 시민 불신은 반대편 끝으로 접근해가는 기이한 사태다. 일종의 지체 현상이다. 검사가 등장하는 작품뿐 아니라 <베테랑>(2015, 1341만명) 등 추악한 권력을 적수 삼은 영화들까지 모두 헤아리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그 바탕에는 말할 것 없이 법 체계에 대한 불신이 자리한다. <부러진 화살>이 흥행할 당시 진행된 한 설문조사 결과는 상징적이다(KBS <취재파일 4321> 2012년 2월5일자 ‘석궁이 말한 것’편). 전국 성인 남녀 1510명을 대상으로 사법 신뢰도를 조사했는데 ‘우리나라 법원 판결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법이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지’ 등 모든 문항에 부정적인 응답이 과반이었다. 예상된 결과였지만 수치가 놀라웠다. ‘권력이나 재력이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그렇다”고 한 응답은 전체의 99.1%였다. 당시 <부러진 화살>에 이목이 집중되자 대법원은 공식 브리핑을 자처해 “현실을 왜곡하는 영화”라며 유감을 표했는데, 설문에서 “영화가 현실을 왜곡했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은 2.4%에 불과했다. 법원을 비롯한 법조인들은 이 영화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일과 별개로 영화의 문제제기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뼈 아프게 들여다봐야 했다. 영화(예술)가 사회 인식(현실)과 조응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유기적인 것이다.

<변호인>

이같은 사회적 바탕 위에 잇따른 ‘2010년대 검사 영화’들은 어떤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났을까. 남성성과 구분되는 ‘수컷성’이 그 요체다. 최근 등장한 스크린 속 검사들은 <공공의 적2>(2005)에 나온 강철중 검사의 후예가 아니다. 이들의 조상은 차라리 <친구>의 조폭들이다. 그간 한국영화들이 남성성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잠시 짚어보자. <친구> 이후 거친 남성성-폭력성은 줄곧 스크린을 접수해오다 <품행제로>(2002)에서 달라지는 조짐을 보이더니 <말죽거리 잔혹사>(2004)에서 변곡점을 찍는다. 거친 남성성은 극중 선악 구분과 무관하게 정당화·심미화의 길을 걸어왔다. 과유불급의 폭력성이 현재까지도 충무로의 주요 배역을 도 맡고 있음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로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충무로는 수컷성을 관찰하고 반성하기 시작했다. “눈 깔어. 안 깔 어 ?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극중 선도부장 이종혁이 권상우에게)를 비롯해 “눈, 까, 세, 요!”(<아수라>에서 극중 검사 곽도원이 형사 정우성을 때리며)에 이르기까지, 영화들은 수컷들의 졸렬한 서열 다툼을 비웃는다. “일본원숭이들은 어느 쪽이 강한지 인정하는 절차를 거친 뒤 규칙을 만든다. 서열이 낮은 원숭이는 그것을 인정한다는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수컷들의 행동이며, 상대의 시선을 피해 옆으로 얼굴을 돌리는 것이 서열 낮은 원숭이의 표정이다. 이를 표시하지 않으면 상대는 계속 공격한다. 무리에 막 들어온 신입에겐 가장 낮은 서열이 주어진다.”(야마기와 주이치, <폭력은 어디서 왔나>) 원숭이들의 서열 다툼이 암컷과 먹이를 놓고 벌이는 짓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영화 속 검사들은 더욱 원숭이와 닮아 보인다.

현실이 뒷걸음질치면 영화도 나아가지 못한다

<더 킹>의 도입부에서 박태수(조인성)는 학교에서 ‘짱’이고 운동 좀 한다는 전학생이 올 때마다 방어전을 치른다. 이는 수컷 원숭이의 습성을 담은 ‘<동물의 왕국> 학교편’인 동시에 영화 전반을 가로지르는 유전자 배열이 된다. 극중 검찰청 생태계가 여기서 출발한다는 얘기다. 아버지가 검사에게 얻어맞는 걸 보고 검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태수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아버지가 붙들려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본 이후 검사로 임용되는 최익현(최민식)의 아들과 판박이다. 태수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아내가 도망갔다. 남자가 얼마나 짐승 같은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딸이 남자와 함께 있는 꼴을 못 본다. 아들 태수 역시 바람 피우다 집에서 쫓겨난다. 스크린에 수컷들의 욕망이 면면히 흐른다. 이들 영화에서 검사들은 예외 없이, 외부인이나 부하 직원들에게 큰소리치지만 부장검사 앞에 서면 바로 꼬리를 내린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을 구속 수사하려던 검사(곽도원)는 헬기 타고 날아온 선배 검사장의 말 한마디에 익현을 석방한다. 자기 사무실에서 호랑이처럼 행세하는 <아수라> 의 검사(곽도원)는 부장검사의 닦달 앞에서는 토끼처럼 고개를 조아린다. <부당거래>의 주양 검사(류승범)도 예외가 아니다. <더 킹>에서 한강식(정우성)-양동철(배성우)-박태수로 이어지는 조폭식 서열 묘사는 장면마다 일본원숭이를 연상케 한다. “수컷들끼리의 다툼은 항상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파급돼 직선적 서열이 유지된다.”(앞의 책) 그런 점에서 비리 검사들을 단죄하는 감찰부 여성 검사(김소진)는 군계일학이다. 진주처럼 담백하게 빛나는 이 캐릭터는, 수컷들의 정글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고 결국 승진하며 심지어 워킹맘으로 잘도 살아간다.

수컷들은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패거리 짓기를 일삼는다. <더 킹>에서 더없이 역겨운 대목은, 97년 대선에서 ‘DJ 라인’으로 갈아타는 장면이다. 그들에겐 정치적 소신도 이념적 지향도 없다. 오직 권력을 향한 유불리만 있다.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해 그간 시민사회가 흘린 피와 눈물을 생각하면, 무당 점괘에 따라 권력에 빌붙는 행태는 객석에 앉아서도 치가 떨린다. 라인 갈아타기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의 주특기이기도 하다. 기존 조폭 영화들이 은근히 미화하곤 했던 ‘의리’는 깡그리 무시한 채 간과 쓸개를 오가며 달라붙는다. <내부자들>의 우장훈(조승우) 검사는 족보가 없어 홀로 분투하며, 영화의 동력도 여기서 나온다. 패거리 짓기의 가장 큰 해악은 한 무리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의 명운이 해당 패거리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데 있다. 자신의 무리가 권력을 잃으면 다른 무리에 의해 죽게 되므로 죽기 살기로 패거리를 위한 싸움에 몰두한다. 모든 사안에 대한 판단은 무리의 이익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검사가 업무 판단을 내릴 때 이 지경에 이르면 ‘떡찰’ 또는 ‘견찰’이 된다. “이게 바로 복잡한 정치 엔지니어링의 철학”이라는 건데, 알고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 무리의 싸움질이다. 이렇게 패거리를 이룬 자들이 나라의 권력을 쥐게 되면 자신이 곧 국가라고 착각한다. “상업고 나온 조무래기”는 대통령일 수 없다. 자신의 파벌에 반대하면 국익을 해치는 행위다. 패거리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합리와 상식이 발붙이기 어려운 이유를, 영화는 놓치지 않고 비꼰다.

앞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스크린 속 검사들이 암흑가에서 활개 치는 동안 이들 영화는 상상과 창의의 땅을 넓혀왔는가. 나는 아니라는 쪽에 손을 들겠다. 거듭 말하지만 예술과 현실은 상응한다. 현실의 ‘수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양자역학의 최신 이론을 연구하려는 물리학 박사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지동설보다 천동설이 맞는 것 아니냐’고 따지는 상황이라면, 박사는 그들을 이해시키느라 수백년 전 학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양자역학 연구는 지체된다. 문제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가치 판단의 영역에서 수준 이하의 논의가 벌어질 때 심각해진다. 남성 직원의 의무 육아휴직제라든가 출산 직원의 급여 상향 보전제를 추진하려는데, 회사 간부들이 ‘여자가 결혼하면 집에서 애나 봐야지’라고 떠드는 상황이라면 직원들은 수십년 전으로 돌아가 싸워야 한다. 이런 게 수준의 문제다. 문제의 핵심은 저들의 수준이 낮아 열받는다는 게 아니라, 낮은 수준의 환경이 나의 발걸음을 가로막는다는 데 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수준 역시 나아가지 못한다. 유능한 영화인들이 창의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작품을 구상해도 현실은 “정치 편향적인 작품은 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없다”는 게 지금 우리 주변의 수준이다. 촛불 들고 나선 시민들도, 영화인들도, 과거로 돌아가 ‘수준’과 싸우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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