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김시스터즈의 음악 여정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
2017-02-08
글 : 이주현

<다방의 푸른 꿈>은 음악인 이난영·김해송 부부에서 김시스터즈로 이어지는 음악가족의 여정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한국 최초의 걸그룹, 한류의 원조로 알려진 김시스터즈는 1959년 미국에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김시스터즈의 막내 김민자의 인터뷰를 통해 김시스터즈의 성공담과 가족사를 듣는다. 영화 개봉에 맞춰 헝가리에서 내한한 김민자 선생과 김대현 감독을 만났다. 한국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나 김민자 선생의 한국어는 서툴렀지만, 순수한 표정으로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생생했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조용한 다방에서 뮤직을 들으며 가만히 부른다 흘러간 옛님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사라진 꿈을 찾을 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남아 블루스에 나는 운다.” _<다방의 푸른 꿈> 가사 일부

김해송(1911∼미상)이 작곡하고 이난영(1916∼65)이 부른 <다방의 푸른 꿈>은 1939년에 발표된 재즈풍의 창작가요다. 1930년대 식민시대는 모던의 물결이 넘실대던 때였다. 이 노래는 모던의 상징적 공간인 다방, 모던 음악인 블루스 그리고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사랑한 커피와 담배를 통해 시대의 풍경을 압축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을 만든 김대현 감독은 “이난영과 김해송에서 출발한 1930년대 한국의 모던 음악이 결국 김시스터즈에 의해 미국 본토에서 꽃을 피운다. 푸른 꿈이라는 단어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는데, 이것이 이난영과 김시스터즈의 삶을 관통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처음부터 영화의 제목은 <다방의 푸른 꿈>으로 정했다”고 했다. 다큐멘터리는 김시스터즈의 멤버였던 김민자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김시스터즈의 미국 진출 성공기를 돌아본다. 하지만 그에 앞서 가수 이난영과 작곡가 김해송 부부에서 시작된 음악의 여정을, 한국 대중음악사의 소중한 순간들을 소환한다. 그것은 김대현 감독이 이 영화를 “목포에서 시작된 한 음악가족의 사연이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거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이르는 이야기”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데뷔와 미국 진출 그리고 성공

이난영과 김해송은 한국 대중음악사를 이야기할 때 첫 번째로 언급되는 이름들이다. 1세기 전에 태어난 이난영의 이름이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겐 생소할지 몰라도, 어디선가 한번쯤 추억의 옛가요 <목포의 눈물>은 들어봤을 것이다.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지나간 옛 꿈> 등을 불러 1930~4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가 이난영이다. 이난영은 1936년에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다. 김해송은 뛰어난 기타연주자이자,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등을 만든 작곡가이며, KPK악단의 단장으로 뮤지컬 공연을 제작한 전천후 음악인이었다. 이들 부부의 피를 물려받아 탄생한 그룹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다. 김시스터즈는 이난영과 김해송의 두딸인 숙자(1939~)와 애자(1940~87) 그리고 조카 민자(1941~)로 구성된 3인조 걸그룹이다. 김민자는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인데, 김시스터즈를 결성한 뒤 이난영의 딸로 입양돼 본명 이향을 김민자로 개명한다. 이난영은 한국전쟁 도중 남편 김해송이 납북되자 가계를 책임져야 했고, 생계를 위해 10대 중반의 어린 딸들을 가수로 키운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이었을 나이에 김시스터즈는 <Candy and Cake>와 <Ole Buttermilk Sky> 팝송 두곡을 뜻도 모른 채 달달 외워 1953년 미8군 무대에서 데뷔 무대를 갖는다. 어린 세 자매의 미군 맞춤 공연은 이내 인기쇼로 자리잡는다.

“미국에 가면 충분히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에이전트를 소개해주겠다는 얘기를 미군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다. 처음엔 그 말이 곧 현실이 될 줄 알고 설레 잠도 못 이루었는데 실제로 연락이 온 적은 한번도 없어서 기대를 접고 있었다. 그러다 미국의 공연 기획자 톰 볼의 귀에 우리의 얘기가 들어갔는지, 마침 자신이 일본에 있으니 한국에서 우리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한국에서 오디션을 봤다. 톰 볼은 우리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겠다면서 석달 계약을 제안했다. 설마 성사될까 싶었는데 그 뒤 진짜로 계약서가 날아왔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인 남편과 함께 여전히 현역 가수로 활동 중인 김민자의 이야기다. 1959년, 김시스터즈는 미국에 진출한다. “미국 진출할 때의 꿈은 성공 하는 것, 그거 하나였다. 고모님(이난영)도 말씀하셨다. 가서 성공 해라, 성공해라.” 20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들은 이국의 언어도 문화도 모른 채 1959년 1월 미국 땅을 밟는다.

성공은 일찍 찾아왔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한 아시아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는 스타더스트 호텔과 장기 계약해 공연을 이어간다. 앞서 1950년대 미국에선 맥과이어 시스터스, 폰테인 시스터스, 앤드루 시스터스 등 여성 트리오들이 유행처럼 활동하고 있었는데, 김시스터즈는 여성 트리오에 대한 대중의 친숙함과 아시아 소녀들에 대한 신비함을 영리하게 활용해 성공의 발판으로 삼았다. 미국에 도착한 지 8개월 만인 1951년 9월엔 <에드 설리번 쇼>에 첫 출연한다. 미국 <CBS>의 인기 버라이어티쇼였던 <에드 설리번 쇼>는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비치 보이스, 롤링 스톤스 등 당대 최고 뮤지션들의 쇼케이스 장이었다. <에드 설리번 쇼>의 첫 출연 이후 아시아에서 온 세 자매에 대한 관심은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1960년 2월엔 미국의 유명 시사화보 잡지 <LIFE>에 김시스터즈에 관한 특집 기사가 길게 실렸다. 미국 진출 1년 만에 라스베이거스의 스타가 아닌 “전국구 스타”가 된 것이다.

‘아시아의 마녀들’로 불린 김시스터즈는 <Charlie Brown> <Try to Remember> 등 재즈와 팝을 리메이크해 선보였다. 능란한 악기 연주, 아름다운 화성, 타고난 리듬감, 귀여움과 섹시함을 강조한 퍼포먼스는 단번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려서부터 듣고 본 것이 음악이고 무대였기에 이들은 남들보다 빨리 악기를 익혔다. 기타, 드럼, 피아노는 물론 가야금, 장구, 트롬본, 색소폰, 클라리넷, 백파이프 등 수많은 악기를 익혀 단기간에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그랬기에 <에드 설리번 쇼>에 22번이나 출연하는 단골 게스트가 될 수 있었다. 멤버의 개성과 역할도 각기 달랐다. 맏언니 숙자는 섹시하고 멋있는 리더였고, 애자는 코믹한 표정연기와 퍼포먼스가 일품인 분위기 메이커였으며, 민자는 애자의 코믹 연기를 진중하게 받아주는 막내였다.

김시스터즈는 오리지널 음악을 선보이거나 음반 발매에 주력하기보다 공연 위주의 활동을 펼쳤다. 김민자는 그 이유를 “공연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연을 하면 바로바로 수입이 들어왔기 때문에 음반보다 공연에 더 집중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도 있다. 히트한 레코드가 있으면 영원히 히트한 아티스트로 기억됐을 텐데. 하지만 그런 후회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 도시 저 도시로 공연을 돌고 나면 돈이 수북이 쌓였다. 성공에 따른 부는 맘껏 즐겼다. “어렸고 철없을 때라 저축은 거의 하지 않고 소비를 많이 했다. 밍크코트도 사고, 주얼리도 사고. (웃음) 갖춰야 할 악기도 많고 의상도 많아서 슈트케이스도 100개씩 갖춰놓고 있었다. 공연하는 도시의 날씨와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가방만 들고 나가려고.”

“노래는 단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1965년엔 어머니 이난영이 세상을 떴고, 이후 멤버들은 결혼을 했으며, 1970년엔 미국 진출 뒤 첫 귀국 공연을 가진다. 1973년엔 공식적으로 그룹이 해체되는데, 이는 당시 라스베이거스가 공연 비즈니스 중심에서 도박 중심의 도시로 바뀌어가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호텔 전속 계약 가수들은 시대가 변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김시스터즈도 그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걸그룹, 한류의 시초, K팝의 선구자 등 김시스터즈를 수식하는 단어엔 ‘최초’라는 말이 빈번히 따라 붙는다. 하지만 이들 수식어는 김시스터즈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빈약해 보인다. 김시스터즈는 단지 처음이라서 주목받았던 걸그룹이 아니다. 어머니 이난영이 그랬고 아버지 김해송이 그랬듯 김시스터즈는 시대를 앞서갔고 시대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들이 무대에서 보여준 패션이며 퍼포먼스가, 이들이 무대 밖에서 보여준 라이프스타일이 그것을 증명한다. 김시스터즈의 무대 영상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세련되고 인상적이다. 이들의 무대는 주로 리메이크와 번안곡으로 채워졌지만 그것은 단순한 카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모던을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인 소녀들이 몸매가 드러나는 중국식 옆트임 드레스 치파오를 입고 영어로 팝송을 리메이크해 부르는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1963년에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에서 어머니 이난영과 함께 <마이클 노를 저어라>(Michael Row the Boat Ashore)를 부르는 감동의 무대 역시 김시스터즈의 도전적 면모를 확인시켜준다. 김시스터즈는 가사의 일부를 개사해 이렇게 부른다. “한국에서 온 실력 있고 매력적인 우리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그녀는 한국 무대에서 늘 정상에 있었답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지요.” 무대에 등장한 이난영은 한국어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이라고 노래를 이어간다. 세딸들은 “할렐루야~” 하고 다음 소절을 받는다. “할렐루야”와 “아리랑”을 주고받도록 편곡한 노래를 미국의 인기 TV쇼에서 당당히 선보이는 대담함에서 알 수 있듯 그들에겐 파격의 기질이 숨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음악하는 멋쟁이였다. <LIFE>에 실린 김시스터즈의 사진들을 봐도 알 수 있다. 화려한 무대의상, 한껏 멋부린 외출복, 편안한 일상복을 입은 이들을 관통하는 건 생기와 멋이다. 무대 위에서건 밖에서건 이들은 멋을 알았다. 시대의 기운이나 편견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워 보인다. 그래서 때로 이들의 정체성은 한국인이 아니라 음악인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들에겐 음악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1973년 김시스터즈 해체 뒤 세 멤버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살고 있는 김숙자는 남자형제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스와 함께 음악 활동을 이어갔고, 김애자는 1987년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김민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활동할 때 만난 헝가리 출신 뮤지션 토미 빅과 결혼해 현재 부다페스트에서 살고 있다. 그는 재즈 뮤지션이자 비브라폰 연주자인 남편과 함께 지금도 무대에 오른다. 목포에서 시작된 한 음악가족의 사연은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이들의 삶엔 늘 음악이 있었다. 영화는 김시스터즈가 부르는 <Try to Remember>를 엔딩 즈음 들려준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노래는 단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삶에서도, 우리의 삶에서도.

초창기 한국 걸그룹으로 등장한 ‘시스터즈’들

한국 걸그룹의 원조는 이난영이 몸담았던 저고리시스터라 할 수 있다. 오케 레코드에서 운영한 조선악극단에 소속된 여성 가수들인 이난영, 장세정, 박향림, 이화자 등이 몸담은 저고리시스터는 1939년부터 프로젝트성으로 결성돼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난영이 자신의 딸들을 데리고 직접 프로듀싱한 김시스터즈는 프로젝트성이 아니라 정식으로 팀을 결성해 공연과 음반 활동을 한 최초의 걸그룹이다. 김시스터즈 이후 이들의 성공을 벤치마킹한 ‘시스터즈’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듀엣 걸그룹이자 <마포 종점> <삼천포 아가씨> 등을 히트시킨 은방울자매가 1950년대부터 활동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엔 이시스터즈, 정시스터즈, 펄시스터즈의 노래들이 많은 인기를 얻으며 ‘시스터즈’ 전성시대를 열었다. 1970년대엔 리리씨스터스, 바니걸스 등 쌍둥이 자매 걸그룹이 활약했고 서울시스터즈, 국보자매 등이 1980년대에 활동했다. 한편 듀엣 걸그룹 김치캣은 김시스터즈에 이어 두번째로 미국에 진출한 걸그룹이다. 하지만 김시스터즈만큼 미국에서 성공한 걸그룹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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