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라는 왕국의 군주이자 독재자.” 한석규는 <프리즌>에서 자신이 맡은 캐릭터 정익호를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한다. 전직 꼴통 경찰 송유건(김래원)이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 교도소에 입소한 첫날부터 난동을 피우며 시끄럽게 굴자, 교도소장은 유건을 수감자들의 우두머리인 익호에게로 보낸다. 어둠 속에서 카메라를 등지고 나타난 익호는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부하들을 눈빛으로 지휘한다. 그러고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 송유건을 그 자리에서 제압한다. 한석규의 말을 빌리자면, 익호는 “폭력이 아니라 카리스마로 제압하는 자”이다. 그가 처음 스크린에 등장할 때부터 관객은 익호가 얼마나 못된 악역인지 확실하게 인지할 것이다.
<프리즌>의 우악스러운 이야기도 익호라는 인물에서부터 시작된다. 극중 익호는 출신과 죄명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장기수다. 그는 폭력 조직 출신 수감자들이 교도소 내에서 또 다른 세력을 키워 끼리끼리 군림하는 그 세계를 오직 카리스마 하나로 평정한 뒤 왕이 된다. 그가 교도소 내에서 꾸미는 범죄 행각이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 곳곳을 뒤흔드는데, 건달 세계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경찰 출신 송유건이 수감되면서 그의 사업이 확장됨과 동시에 점점 꼬이게 된다.
한석규는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익호의 행동을 보고는 자신이 예전부터 기억에 담아두고 있던 동물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그가 보기엔 원칙도 한계도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익호가 정글에서 한쪽 눈을 잃고도 생태계를 어지럽히는 하이에나 같았다. “다른 집단에 들어가려다 쫓겨난 하이에나가 처절하게 공격을 당해 코가 떨어져나가고 한쪽 눈알이 빠져서 절뚝절뚝거리는 모습”의 정서를 익호의 표정과 몸짓에 담아보고 싶었다.
사실 한석규가 떠올린 이미지와 나현 감독이 그리고자 했던 익호의 이미지는 잘 맞아떨어졌다. 교도소 내 권력을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도소 바깥세상의 범죄에도 관여하는 익호는 납치, 살인, 절도 등의 의뢰가 들어오면 수감자들 가운데 전문가를 엄선해 일을 지시한다. 나현 감독은 수감자들이 교도소 내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교칙 중에 어디든 혼자 걷는 것, 즉 독보금지령이란 게 있다는 사실을 교도소 취재를 통해 알게 됐고, 정익호를 유일하게 독보가 가능한 남자로 만들었다.
정익호라는 이름의 출처는 김동인의 단편소설 <붉은 산>의 등장인물인 ‘삵’의 본명이다. 극악무도한 캐릭터의 기운을 담고 있는 이름이라고 해야 할까. 이 캐릭터와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배우가 연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나현 감독은 한석규를 떠올렸고 그 이야기를 들은 한석규 역시 익호에 흥미를 갖게 된 것.
익호가 스크린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 어둠에 가려져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면 관객은 자연스레 표정 대신 그의 목소리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일단 낯설다. 그동안 들어왔던 한석규의 목소리가 분명 아니다. 묵직한 저음 베이스에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수많은 성대모사 달인들을 먹여살린 그 목소리는 이 영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한석규와 나현 감독은 익호라는 캐릭터를 만들어갈 때 그의 기존 목소리 톤이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판단해 반올림한 톤에 반 박자 빠른 리듬으로 이야기하는 익호만의 발성을 만들었다. 한석규가 본래 가진 특징에 비하면 약간 가볍다는 느낌마저 드는데 그의 무자비한 행동과 결합되니 장르영화 속 보스 연기의 전형을 비껴간 기분이다. 나현 감독은 한석규의 새로운 목소리 연기를 위해 대사량까지 줄여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했다.
무자비한 독재자 스타일의 보스 이미지의 악역과 한석규의 조합이 신선해 보이는 만큼, 배우로서의 부담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 역시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정익호라는 인물이 마음에 들었지만 한편으론 같은 이유로 부담스러웠다. 한석규의 90년대 시절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드라마 <서울의 달>의 제비 홍식에서부터 시작해 영화 <초록물고기> <넘버.3> <주홍글씨> <구타유발자들> 등 당장 수갑을 채워도 어색하지 않을 한석규의 캐릭터들을 여럿 떠올릴 수 있겠지만, 정익호는 그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좀더 나쁘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나 최근 종영한 <낭만닥터 김사부> 속 인물들로 배우 한석규의 이미지를 처음 그려본 이들이라면 정익호라는 인물이 한석규의 또 다른 도전이었음이 충분히 전달될 것 같다.
정익호는 23번째 한석규다. 데뷔작 <닥터봉> 이후 그동안 스크린에서 모두 23명의 인물을 연기했다는 뜻이다. <프리즌>의 익호가 끝내 무슨 일을 저지를지 기대되는 만큼, 아무도 모사할 수 없는 한석규만의 캐릭터 컬렉션을 위한 그의 24번째 도전 또한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