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가수의 영화계 진출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끼 많은 스타들의 자연스러운 영역 확장이랄까. 어릴 때부터 연기와 음악을 겸했던 2NE1 출신의 산다라박은 가수로서의 이미지를 마치 정면 돌파하 듯 스크린 데뷔작으로 음악영화 <원스텝>을 선택했다.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음악을 붙잡으려는 소녀 시현과 슬럼프에 빠진 작곡가 지일(한재석)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이야기다. “뭐든 도전하는 것이 즐겁다”며 배우 인생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산다라박을 만나 영화와 연기에 관한 생각을 물었다. 배우로서는 생애 첫 인터뷰라서 “너무 떨린다”며 답변하는 내내 미세한 흥분과 떨림을 동반했던 그녀의 목소리를 전한다.
-첫 영화 출연을 음악영화로 결정한 것은 가수로서의 재능과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뜻이었나.
=결정 당시는 영화에 관해 아무것도 모를 때라 정말 단순하게,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까 음악영화에 출연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 같았다. 처음 리딩하기 직전에는 새로운 도전이란 생각에 마냥 들떠 있었는데 그날로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웃음)
-소리가 색으로 변형돼 전달되어 정신이 혼미해지는 ‘색청’이라는 독특한 질환이자 고통을 겪는 인물 시현을 연기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색청이란 질환이 실재한다는 걸 영화 찍으면서 처음 알았다. 흔치 않은 병이어서 정보도 별로 없었다. 영상 레퍼런스는 당연히 없어서 뭐든 상상력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슈퍼히어로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 같았다. 허공에 대고 상상만으로 연기해야 했으니까.
-영화에 삽입된 노래 중 두곡을 직접 불렀다. 한재석씨와의 듀엣곡 <기억 저편에>와 솔로곡 <한걸음>이다. 솔로곡의 경우엔 가수 산다라박의 노래하는 목소리를 다시 인식하게 해준 노래였다.
=음악의 쓰임새를 놓고 많은 회의를 했다. 삽입곡도 5곡 정도가 후보에 있었다. 2NE1 때는 YG 자체 스튜디오와 프로듀서, 작곡가들과 일을 해서 잘 몰랐는데 영화 찍으면서 처음으로 외부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환경이 바뀌니까 완전히 헤매게 되더라. 스튜디오가 낯설어서 노래하기 힘들었다. 첫날은 완전히 망치면서 적응기를 거쳤는데 지인들도 노래하는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더라. 그룹 시절의 빠른 템포의 멜로디와 랩에 비하면, 오로지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솔로곡 <한걸음>을 다른 어디에서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발판 삼아 다른 도전도 해보고 싶다.
-전재홍 감독의 촬영현장을 직접 겪어보니 어떻던가.
=아무리 현장이 춥고 힘들어도 감독님만 바라보면서 버텼다. (웃음) 촬영기간이 한달 정도로 촉박하게 진행됐지만 연기 디렉션도 눈높이 맞춤형으로 부족하지 않게 이끌어주셨다. 연기 강도를 1부터 5로 놓고 “이 장면은 3 정도로 해줘요”라고 이야기하는 식으로 설명해주셨다. 직접 연출한 영화와 다르게 너무 해맑으셨다.
-시현은 설정 자체가 복잡해서 내면 또한 표현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특히 연기하기 어려웠던 장면을 꼽는다면.
=영화 후반부, 한재석 선배와 싸우는 장면이 제일 힘들었다. 찍기 전에 이미 여러 번 합을 맞춘 상태였다. 재석 선배가 먼저 연습해보자고 제안해주셨다. 그런데 만족스럽지 못했다. 내가 추위에 정말 약한데 감정 잡고 흘리던 눈물이 몰아치는 찬바람에 말라버리더라. 감정이 복받쳐 올라와도 바람 앞에서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 이번 영화는 추위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고 색청이라는 희귀질환까지 앓는 시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 막막했을텐데 참고 삼은 다른 작품의 캐릭터가 있었나.
=뭐든 보고 나면 그대로 따라가버릴 것 같아서 보지는 않았다. 연습생 시절에 일본영화 <태양의 노래>를 봤는데 그땐 나도 그런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어서 그길로 저렴한 기타를 사서 메고 다니곤 했다. (웃음) 일본 가수 유이가 연기하는 주인공 카오루도 시현처럼 사연이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사실 나에게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영화이기도 하다. 이번 촬영현장에서도 <태양의 노래>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힐링했다.
-무대에서 청중을 내려다보며 공연을 할 때와 눈높이 위치의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의 차이가 느껴지던가.
=무대에서는 산다라박으로 공연을 하며 나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카메라 앞에서는 내가 맡는 역할을 부각시켜야 하기 때문에 성격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답답할 때는 음악을 들으면서 해소하기도 했다. 그런데 작품마다 다른 것 같다. 시현 역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고 음악을 못 듣는 역할이다 보니 적막함 속에서 촬영을 했다.
-악기에 대한 관심도 궁금하다. 드럼을 치는 유튜브 영상을 본 적 있는데 언제부터 연습했나.
=2년 전에 시작했다. 데뷔 초에 드럼을 배우고 싶어서 스틱도 사서 연습했는데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들었다. 기타도 함께 치던 시기인데 손가락이 너무 아파 잠시 쉬고 있었다. 마침 빅뱅의 대성이 드럼을 적극 추천하면서 선생님까지 소개시켜주기에 다시 시작했다. 드럼을 치고 있으면 정말로 스트레스가 풀린다. 게다가 드럼 연주 덕에 리듬감도 얻었다. 드럼은 앞으로도 계속 칠 것 같다.
-다음 영화에서 드럼 치는 캐릭터를 요구한다면 할 수 있겠나.
=물론이다. 화면에 나의 ‘쎈’ 모습이 나오는 걸 좋아한다. 2NE1 때 헤어스타일에 많은 변화를 줬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도 언젠가는 <조폭마누라>같은 영화에도 출연하고 싶다. <돌아온 일지매>라는 드라마에 일본 닌자역할로 일주일 동안 카메오 출연을 한 적 있는데 그때 감독님들이 액션연기를 잘한다고 칭찬해주셨다. 검술이나 와이어 액션도 할 수 있다. 영화 캐릭터에 필요하다면 담배나 욕설 같은 거친 설정도 할 수 있다. (웃음)
-연기에 대한 호기심은 언제부터 갖고 있었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룹 활동을 안 하니 배우로 전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연기는 그룹 데뷔 전부터 하던 분야다. 필리핀에 있을 때 영화와 드라마를 종종 찍었다. 그땐 어린 나이의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한정적이어서 대부분 로맨틱 코미디에 출연하는 정도였다. 한국영화로는 <원스텝>이 데뷔작이다. 촬영현장이 편하지 않았느냐고? (웃음)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는데 요새 지인들 결혼식을 다녀보면 상당수가 연예인이기에 일하면서 촬영하는 느낌이란 말을 많이 하더라. 그와 비슷한 것 같다. 부담은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것 같다.
-영화는 시현이 자신만의 핸디캡을 딛고 홀로 서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홀로 서기를 시작한 가수 산다라박의 상황과도 연결이 되더라.
=시현이 색청이란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그녀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나도 지금 뭐든지 혼자서 해나가야 한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어쨌든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이 앞으로도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도전 기질이 있기 때문에 시현에게 많이 공감했다.
-시현의 색청처럼 극복해야 할 과제나 약점이 있다면.
=배우로서는 배워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 가수로서는 사람들에게 산다라박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노래할 때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 없다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 아이돌 대부분은 완곡을 부를 기회가 없는데 완곡을 부르는 게 목표가 됐다. 앨범이 됐든 공연 무대가 됐든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숙제다.
-혹시 모를 혹평에 대한 대비도 하고 있나.
=그건 늘 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악플 정도를 제외하고 정말로 내가 고쳐나가야 할 부분에 대한 지적이라면 공부하는 셈치고 볼 생각이다.
-최근 영화화되는 <치즈 인 더 트랩>에 오연서, 유인영, 박해진, 박기웅 등과 함께 캐스팅됐다.
=<원스텝>의 시현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할 예정이다. 현장에 가봐야 알겠지만 지금은 보라라는 캐릭터도 잘 어울릴 것 같다. 감독님이 또래 친구들과의 작업이니 평소 노는 것처럼 편하게 연기하라고 하시더라. 주변에서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유인나 언니는 같이 봐줄 테니 대본을 가지고 오라더라. 다들 응원해줘서 든든하다.
-어느덧 선배의 위치에서 많은 후배들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다. 도착지가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 있나.
=가수로는 7년차여서 아이돌계의 시조새라는 말도 듣고 있다. (웃음) 필리핀 시절도, 2NE1 시절도 모두 지나가버렸지만 연기만큼은 신인이기 때문에 인생 3막의 시작점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름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산다라박으로 활동한다. 신인 같지 않은 신인이라는 애매한 위치일지 모르겠지만 연기 꿈나무로 대해주셨으면 좋겠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잘할 수 있는 걸 하나씩 늘려나가자는 자세로 다양하게 놀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