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세월호 이야기 담은 다큐멘터리 <망각과 기억2: 돌아 봄>을 계기로 대화하다
2017-04-17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밝혀야 할 진실이 많아서, 너무 많아서
안창규 감독, 권미화씨, 김성묵씨, 박종필 감독(왼쪽부터).

세월호 육상 거치 작업이 완료된 4월 11일, 목포신항으로 향했다. 목포대교 위에서도 옆으로 누운 세월호의 모습은 한눈에 들어왔다. 택시 기사는 익숙하게 목포신항 입구에 차를 세웠다. 노란 리본띠를 이정표 삼아 걸었더니 금세 세월호 거치장에 도착했다. 항구의 거센 바람에 철조망에 빼곡히 매달린 노란 리본은 파밧파밧 소리를 내며 어지러이 나부꼈고, 노란 리본이 물결치는 사이로 녹슨 세월호가 보였다. 배는 꿈쩍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도 위태로운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위태로운 공기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목포에 간 건 4·16연대 미디어위원회가 제작한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2: 돌아 봄>(이하 <망각과 기억2>)에 참여한 박종필 감독과 안창규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는 지난해 4·16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2016)을 선보였다. <망각과 기억2>에는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승선>(감독 안창규),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형제자매 이야기 <오늘은, 여기까지>(감독 박수현), 민간 잠수사 이야기 <잠수사>(감독 박종필), 참사의 책임자들에 대한 풍자극 <세월 오적>(감독 김환태), 참사 이후 거리로 나선 배우들의 이야기 <걸음을 멈추고>(감독 김태일, 주로미), 4·16 안전공원 설립에 관한 이야기 <기억의 손길>(감독 문성준) 이상 6편의 중편다큐멘터리가 담겨 있다.

박종필, 안창규 감독은 목포에서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유가족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의 카메라는 국가 주도의 망각화 시도에 대항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과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감독의 도움으로 세월호 마지막 탑승자이자 생존자인 김성묵씨와 세월호 희생학생 오영석군 어머니 권미화씨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에겐 아직 찾아야 할 진실이 있었다. 아직 들어야 할 무궁한 이야기가 있었다. 몇번을 혼자서 눈물을 삼킨 끝에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나와준 오영석군 어머니에게 특별히 감사를 전한다.

박종필 감독

뭍에 올라온 세월호를 보고 몸이 아팠다

-<씨네21> 육지로 인양된 세월호의 실물을 가까이서 마주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

=권미화_ 3년 동안 우리가 해냈구나. 한편으로는 또다시 긴 싸움이겠구나 싶었다. (육지로) 올리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복잡한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배를 지상에 거치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정부와) 부딪힘이 있었다. 이제라도 인양이 돼서 다행이지만 인양하기로 했을 때 좀더 빨리 꺼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지난 3년만큼이나 힘든 것 같다. 현실로 맞닥뜨리니까.

여기 미수습자 가족들도 있고 아이(의 시신)를 찾은 가족들도 있는데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이 애달픈 건 비슷하다 해도 그 깊이는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슬픈 마음을 다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이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하고 팽목항으로 향했던 그날처럼 목포에 오니 또다시 마음이 힘들고 복잡하다. 아이들이 다 나와줘야 하는데, 아이들이 저곳(선체 안)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서도 가족들은 매 순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중요한 건 유가족인 부모들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거고 그 과정에 국민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은 책임자들이 여전히 처벌받지 않았다.

우리가 아이들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또 다른 참사를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행동하면 정부에서 국민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다. 지금의 세대가 지나고 100년, 200년이 지나서 우리 가족들이 포기하지 않고 활동했던것들이 훗날에 회자되면 결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되지 않을까. 참사를 기억하고 제대로 진실을 밝혀야 안전한 나라가 되지 않겠나. 한때는 세월호 특별법이면 다 되는 줄 알고 반쪽짜리 특별법 제정을 위해 쫓아다니느라 다른 이들의 상황을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민간 잠수사들이나 동거차도 어민들의 고통을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세월호뿐만 아니라 참사를 겪은 피해자들은 늘 음지에서 살면서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이나 치유의 기회, 사과를 받지 못했다. 국가의 잘못으로 더이상 국민들이 피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들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국가를 믿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남들이 너무 강성이다 얘기하지만 아이의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안창규_ 3월 31일에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도착했을 때 배를 가까이서 처음 봤다. 몸이 좀 아프더라. <승선> 작업하면서 생존자 (김)성묵씨와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때 성묵씨도 만날 몸이 아프다 얘기했다. 어디가 정확히 아픈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이틀 정도 몸이 아팠다.

=김성묵_ 부모님 옆에서 움직였던 게 1년 남짓이다. 그 시간 동안 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내가 움직인 시간에 비하면 배가 빨리 올라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을 마중하러 간다는 느낌도 들었고. 그런데 목포에 와보니 현실은 여전한 것 같다. 3년 전이나 1년 전이나 지금이나. 해양수산부(이하 해수부)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쓰는 언론이나 의지를 보이지 않는 정부나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지금의 인양 과정에도 문제가 많이 불거지고 있다. 배를 훼손시켰으면서 유실 방지 대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배 안에 펄이 가득 차 있으면 펄이 마르기 전에 그걸 빼내야 하는데 계속 우왕좌왕하고. 펄 속에 유류품과 유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포대에 담아 방치하고. 그거 굳어버리면 어떻게 찾아내려고. 언론은 인양 작업이 순조롭게 잘되고 있다 하고 사람들은 또 그런 줄 알지만 여기 와서 보면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여전히 3년전 4월 16일에 멈춰 있는 대한민국이다.

희생학생 오영석군 어머니 권미화

“언론의 역할을 유가족이 하고 있다”

-<씨네21> 거짓말처럼 박근혜 탄핵 이후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인양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박종필_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수사>에도 나오지만, 2014년 7월 10일 11명의 실종자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민간 잠수사들이 시신수습 작업에서 철수한다. 해양경찰청(이하 해경)이 왜 그들을 쫓아냈을까 궁금했다. 사망한 고 이광욱 잠수사에 대한 책임을 민간 잠수사 구조 작업반장이었던 공우영씨에게 떠넘기기 위해 그들을 쫓아낸 거였다. 결국 해경이나 해수부의 최우선 과제는 시신 수습이 아니었던 거다. 시신 수습 의지가 있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베테랑 민간 잠수사들을 그렇게 쫓아낼 수는 없었다. 세월호 인양 과정에서도 비슷한 걸 느꼈다. 해수부가 정말 세월호를 최대한 빨리 안전하게 인양해 미수습자를 찾고 진실 규명하는 데 힘을 실으려 했을까. 그런 능력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권미화_ 처음부터 아이들을 살리려 하지 않았다. 그 이후 여러 과정에서 유가족들에게 오명만 씌웠고. 우리가 바라지도 않은 돈 얘기를 하면서. 정말 절실한 순간엔 법도 우리 편이 아니었고, 언론도 우리 편이 아니었고, 정치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세개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우리 편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참사의 진실과 우리의 진심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길 바랐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느낀다. 가족들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고, 국민들 또한 눈을 번쩍 뜨고 귀를 열고 있으니까.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깨우쳤다. 책임 회피만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국민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거. 세월호 인양 역시 국민들이 끊임없이 의문에 의문을 제기하고 세월호가 올라와야 답이 나온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진실이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언론이 해야 한다. 작은 진실, 작은 소식이 큰 움직임을 만든다. 지금 하루에 두번(오전 10시, 오후 3시) 육상 거치된 세월호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됐는데 그것도 우리가 싸워서 얻어낸 거다. 육상 거치 이후의 과정을 유가족 아빠들과 기록팀이 촬영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 찜찜한 마음이 든다. 정부가 가족들을 안심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라면 충분히 예단하고 방지할 수 있었을 문제들이 자꾸 터지니까 의심하게 되고 지켜보게 된다. 사실 우리가 여기서 뭘 할 수 있겠나. 들여다보는 것밖에 못한다. 그런데도 이게 해수부 및 정부 관계자들한테는 압박이 된다. 유가족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거. 그리고 국민들이 우리의 큰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는 거.

생존자 김성묵

김성묵_ 최근에도 선체 내부에 첨단 장비를 투입해서 산업용 내시경을 달아 수색하겠다고 했는데 셀카봉을 들고 들어가서는 내시경 달 위치를 확인하더라. 내시경이 들어간 곳도 한 군데밖에 없고. 부모님들이 직접 보고 확인한 사실이다. 그런데 언론 브리핑 때는 첨단 장비로 확인했다 한다.

-<씨네21> 언론이 해야 할 감시의 역할을 현장을 지키고 있는 유가족이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등 뜻있는 감독들이 카메라를 들어 현장을 기록해왔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의 경우, 3년의 시간 동안 활동의 방향성에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박종필_ 4·16연대 미디어위원회는 기존의 미디어 활동가들과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로 구성돼 참사 초기부터 팽목항, 안산, 서울을 오가며 유가족과 시민들의 활동을 기록했다. 나는 세월호 참사1주기를 앞두고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 결합했다. 초기엔 지역간담회, 집회, 문화제 등에서 틀 영상이나 4·16 가족협의회와 4·16연대가 필요로 하는 영상을 주로 만들었다. 그러다 1주기가 지나고 나서는 자체적으로 영상을 기획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2015년 9월쯤 <망각과 기억>을 기획했고, 7개의 중·단편다큐멘터리를 선보였다. <망각과 기억2>는 지난해 10월부터 기획했고, 6편의 다큐멘터리가 완성됐다. 영석 어머님(권미화씨)과 성묵씨가 4·16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했는데, 개인적으로는 3년 전보다 아픔과 고통이 심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유가족과 시민들이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권력에 진실이 가로막혀 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4·16 진실 규명 운동은 유가족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거기에 많은 국민들이 동참했다. 세월호 참사와 진실 규명 운동이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운동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힘든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3년 상 치렀으면 이제 된 거 아니냐고 하는데 정말 그렇냐고 묻고 싶다. 참사 초기 때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많이 했다. 그 말이 정말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고, 다시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안창규_ 나는 지난해부터 미디어위원회에 합류했다. 지난해 7월 대학생들의 세월호 도보행진 촬영을 도왔는데 그때 이상한 풍경을 마주했다. 그 땡볕에 모두가 힘든데 오히려 어머님들이 괜찮냐고 위로해주셨다. 도보행진을 마친 대학생들은 여기 와서 죄책감을 안고 새로운 다짐을 하고 약속을 하면서 돌아갔다. 그 풍경이 생경했다. 그런데 목포에 오니 그때와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무원들은 무언가 요구해야지만 그제야 마지못해 움직인다. 선체를 온전히 보존하겠다고 하고선 적은 돈 들여서 일단 그냥 해본다. 그러다 생각대로 안되면 다른 방식으로 해본다. 전문가라면 미리 예상을 하고 시뮬레이션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 세월호 육상 거치 과정에 쓰인 운송장비인 모듈 트랜스포터(MT)만 해도 처음부터 충분히 좋은 것을 사용하면 됐는데, 저렴한 MT를 사용하다가 제대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추가로 MT를 들였다. 돈은 돈대로 나가고 시간은 시간대로 지연됐다. 또 정치인들은 이곳에 와서 사진만 찍고 간다. 가족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관심 없어 보인다. 굉장히 웃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세월호를 이용해 회사 광고를 하고 돈을 벌려는 사람들도 있다. 화가 나더라.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풍경을 이곳에서 계속 확인하고 있다.

권미화_ 정부에선 우리가 알려주는 게 맞으니 다른 의문이나 답을 달지 말라고 했다. 정부가 제시한 답을 반박하고 비판하면 불이익을 줬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카메라의 존재가 있다는 게 고마웠다. 3년 동안 나는 이분들이 감독님인 줄도 몰랐다. 세월호 다큐멘터리 <나쁜나라>(2015)를 만든 김진열 감독님도 감독인 줄 몰랐다. 시사회 때 영화 보고서야 알았다. 그들은 달랐다. 내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을 때 옆에서 일으켜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고나 밴드를 사와서 소독을 해주는 사람이 있고, 그냥 바라만 보는 사람이 있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내가 넘어졌을 때 살갑게 다가온 고마운 사람들이다. 특종을 바라는 게 아니라 가족들의 아픔을 봤던 사람들. 그렇게 3년 동안 우리는 또 다른 가족을 얻었다.

-<씨네21> <승선>은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씨의 고백을 통해 생존자의 트라우마에 주목한다.

안창규_ <망각과 기억2>를 기획하면서 세월호 참사로 피해본 사람들의 외연을 확대해 이야기를 넓혀보자는 의견들이 있었다. 생존자 역시 세월호의 또 다른 피해자이지 않나. 그런데 그들에 대한 얘기는 부족했던 것 같다. 가족협의회 등 여러 방편으로 생존자들을 알아보다가 성묵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성묵씨가 참사 이후 2년 만에 유가족들과 함께 광화문광장에도 나가고 운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다른 생존자분들도 만나봤다. 대부분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세월호만 떠올리면 혈압이 올라간다는 분도 계셨다. 고맙게도 성묵씨는 다큐멘터리의 취지에 동감하고 용기를 내 참여해줬다. 사실 잘 모르겠다. 성묵씨가 세상으로부터 숨어 지내다 다시 나온 건데, 그 과정에서 조금씩 치유가 되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그럼에도 계속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픈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일이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김성묵_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참사 이후 2년 동안 혼자서 어찌어찌 살아보겠다는 욕심으로 외면해왔는데 그러면 안 되겠더라. 부모님들처럼 대단하게 활동하는건 아니지만 뒤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생존자로서 겪는 상처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생존자들이) 그 프레임에 갇혀 있지 말고 나와서 증언을 해주면 좋겠다. 영화를 통해서 세월호 침몰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내가 있던 구역 몇평에서의 상황이고 기억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당시의 상황이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 그 또한 진실을 찾기 위한 중요한 증거고 자료가 될 테니까.

안창규 감독

-<씨네21> <잠수사>는 고 김관홍 잠수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의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과정에 크게 상처 입은 그는 결국 지난해 세상을 떴다.

박종필_ 김관홍 잠수사가 했던 모든 활동은 민간 잠수사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이었다. 그런데 그 활동이 벽에 많이 부딪혔다. 그러면서 스스로 힘들어했고 그 트라우마가 병이 되어 먼저 세상을 떴다. 개인적 부채감을 느꼈다. 그래서 김관홍 잠수사를 비롯해 민간 잠수사들의 명예회복에 조금이나마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추모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관홍 잠수사는 사사로운 욕심에 양심을 파는 사람이 아니었다. 해경이 민간 잠수사들을 모욕하는 일도 많았고, 청와대 대변인은 민간 잠수사들이 시신 한 구당 500만원을 받는다면서 거짓된 말들로 선의에서 우러나온 행동을 매도했다. 잠수사들은 공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진실을 다큐멘터리로 말하고 싶었다.

끝없이 해야 되는 일

-<씨네21> <망각과 기억>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지는 건가.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 싶나.

박종필_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지만 단편뿐만 아니라 장편 제작과 극장 개봉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할 것 같다. 또 새로운 사람들이 미디어위원회에 결합하고 있다. 지난해엔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과 나이가 같은 친구가 합류했다. 자기 나이 또래의 시선으로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했는데 의미 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이 참사를 어떻게 경험했고 또 체험하고 있는지, 다음 세대의 이야기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창규_ <승선> 이후에도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좀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청년세대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씨네21> 앞서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아직 싸워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는 뜻으로 읽혔다.

김성묵_ 그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느꼈다. 인양 이후 기껏 할 수 있는 행동이 앉아서 바라보는 것밖에 없지만, 제대로 작업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진실 규명에 대한 압박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배가 육지로 올라오고 미수습자들을 찾고 예의를 갖춰 제대로 된 추모를 하는 것이 진짜 인양 ‘완료’라 생각한다. 그런데 세월호 인양이 완료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때는 내가 정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을지, 사실 많이 두렵다. 인양이 완료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무섭고 인양이 완료됐을 때 내가 정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을지 두렵다.

권미화_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먼데 우리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이 힘들고 아프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거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이거고. 종착역은 없다. 끝없이 해야 되는 일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 죄책감이 너무 크다.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부모를 찾았는데 대답을 못해줬다. 심지어 아이들과 통화한 사람들은 거기서 시키는 대로 하라 했다. 나 역시 일하느라 뒤늦게 소식을 들었고, 구조됐다는 소식에 ‘그럼 그렇지’했다. 그런데 눈앞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3일째 에어포켓 얘기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희망을 가졌다. 조명탄 쏠 때도 아이들이 구조되는구나 했다. 엄청난 인원이 투입돼서 구조작업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인 줄 알았다면 아이들한테 무조건 밖으로 나오라고 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매 순간 한다. 내가 조금 더 세상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 아이를 살렸을 텐데. 열심히 벌어서 자식 새끼 잘 가르치며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몸으로 깨우친 시간이었다. 지금까지도 집에 들어가거나 빈 아이 방에 불을 켜거나 장시간 밖에 나와 있거나 하면 착각하고 살 때가 많다. 저녁밥 해야 되는데, 학교 갔다 온 아들 얼굴 봐야 되는데. 그런데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우리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했던가, 그걸 이루어줄 생각만 하며 살아온 부모였는데, 아이의 꿈도 내 꿈도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우리 가족의 소박한 꿈은 전국일주였다. 우리 아들은 목표가 커서 ‘어머니 세계일주는 해야지’ 그랬는데…. 내가 우리 아이한테 해주고 싶었던 만큼 지금 움직이고 있다. 3년 동안 변한 건, 예전엔 1인다역을 소화했는데 지금은 1인1역만 하고 싶다. 우리 아이의 엄마로만 살고 싶다. 그러니 너무도 허접한 이유로 우리 아이들을 떠나보낸 거라면 용서할 수 없지.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런 부모들의 마음에 응답한 국민들도 고맙다. 힘든 일을 겪은 분들, 소외된 사람들,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역할, 그 중심에 영석이 엄마가 서 있었으면 좋겠다. 몸이 피곤한 일, 궂은일도 마다지 않는 영석이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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