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지난 <씨네21>과의 인터뷰(1100호)에서 신작 <옥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여러 영화를 언급했다. 그중에는 <옥자>와 직접 연관된 영화도 있고, 영화광 감독답게 대화의 주제를 실어나르는 수단으로 쓴 영화들도 있다. 봉준호 감독의 팬이라면 평소 그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그의 영화 취향이 궁금할 만하다. 좋아하는 혹은 주목할 영화 리스트에는 감독 개인의 성향은 물론 그 영화를 만났을 당시의 고민, 심지어 본인이 완성하거나 완성할 영화의 방향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옥자>와 함께 언급한 영화들과 봉준호 감독의 취향이 드러나는 사적인 영화 리스트를 따로 모아봤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옥자>의 스토리는 강원도에서 맨해튼까지 가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와 비슷한 여정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옥자>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시로 든 영화는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이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출세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우리에게 ‘필리버스터’란 이름으로 익숙한 의회 연설 장면 덕분에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리드미컬한 편집과 유려한 대사 등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연출도 돋보이지만 이 영화를 (<옥자> 관련 인터뷰에서)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당시 정치권에 대한 신랄한 묘사로 상영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몇몇 국가에서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을 정도로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옥자> 역시 봉준호 감독의 영화인 만큼 장르영화인 동시에 여러 메시지가 담겨 있으리라 기대되는 점에서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에 대한 언급은 호기심을 자극시키기 충분하다.
<프랭크>
“<프랭크>를 배꼽 잡고 웃고 울며 봤어요.”
<옥자>는 봉준호 감독이 <초(민망한)능력자들>(2009), <프랭크>(2013)의 작가 존 론슨과 공동으로 각본을 집필했다. 그래서일까, 존 론슨의 전작 중 <프랭크>를 재미있게 봤다는 봉준호 감독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착각일지 몰라도, 저는 프랭크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옥자>에 나오는 영어 쓰는 인물들의 느낌과 통하는 면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뭐 그렇게 상태가 좋진 않은 인물들이죠.” 봉준호 감독에 의하면 공동 각본가는 넷플릭스에서 지정해준 것이 아니라 감독 본인이 직접 팀을 꾸린 것이라 한다.
코언 형제
“코언 형제가 놀랍다고 생각해요.”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핀처, 데이비드 린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중에 누굴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못했는데, 코언 형제와 마틴 스코시즈 감독 중에서는 “개별 작품 말고 필모그래피 전체로 보면 코언 형제가 더 놀랍다”고 답했다. 실제로 조엘 코언 감독을 만났을 때 다른 어떤 영화인들을 만났을 때보다 더 긴장했다고. 참고로 폴 토머스 앤더슨과 웨스 앤더슨 중에서는 누굴 더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웨스 앤더슨 감독 영화 중에서는 <판타스틱 Mr. 폭스>를 가장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 영화의 노란색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조디악>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과연 <살인의 추억>을 봤을까요?”
영화 개봉 당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유사성이 거론됐던 영화를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베스트 영화로 선정한 것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봉준호 감독은 “직접 말을 나눈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답했다. 반면에 J. J. 에이브럼스 감독은 <슈퍼 에이트>와 <클로버필드>에 <괴물>의 오마주가 있다는 것을 알려왔다고 한다. 감독이 직접 봉준호 감독에게 <클로버필드> 프린트를 스탭들과 보라면서 보내주기도 했다고. 봉준호 감독은 2015년에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의 인터뷰에서도 10편의 영화를 선정하면서 <조디악>을 꼽았고,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도 추천작으로 내세웠다.
<카를로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두 영화 모두 러닝타임이 길어 가장 좋은 컨디션에서 보려고 벼르고 있어요.”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포장을 뜯지 않은 DVD와 블루레이 중 시간이 나면 1순위로 감상할 작품은 무엇인가”였다. 이 질문에 그가 꼽은 영화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카를로스>와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다. 최근 일본에서 개봉 25주년 기념으로 리마스터링 상영을 하기도 했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배우 장첸이 자신을 진짜 배우로 만들어준 영화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한 작품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카를로스>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테러리스트 자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로 러닝타임이 무려 330분에 달한다.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하다. 두 영화를 선정했다는 점에서 <옥자>와의 연관성을 짐작해본다면 억측일까.
봉준호 감독의 베스트 영화10
해외 매체에서도 봉준호 감독 인터뷰 때 그에게 그만의 베스트 영화 리스트를 종종 물어보곤 했는데 그가 내놓은 영화 리스트가 흥미롭다. 다음 영화들은 봉준호 감독이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영화들”이라며 언급한 영화들이다.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A City of Sadness, 1989)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Cure, 1998) 코언 형제의 <파고>(Fargo, 1996) 김기영의 <하녀>(The Housemaid, 1960)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Psycho, 1960) 마틴 스코시즈의 <분노의 주먹>(Raging Bull, 1980) 오슨 웰스의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Vengeance Is Mine, 1979)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The Wages of Fear, 1953)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Zodiac, 2007)
봉준호 감독의 소장하고 싶은 영화10
예술영화 전문 블루레이 제작사 크라이테리언에서 봉준호 감독을 초청해 소장하고 싶은 10편의 영화 리스트를 요청했다. 그는 <400번의 구타>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편 데뷔작이며, <화니와 알렉산더>는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결말을 지닌 영화라고 선정 이유를 소개했다. 물론 수집광답게 이 영화의 DVD 박스 세트가 대단히 아름답다며 디자이너를 수소문하고 싶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내슈빌>에 대해서는 <숏 컷>과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 등 이른바 ‘태피스트리 영화’라는 게 있다면서 그중 <내슈빌>이 단연 최고라는 찬사를 보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 잉마르 베리만의 <화니와 알렉산더>(Fanny and Alexander, 1982)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나라야마 부시코>(The Ballad of Narayama, 1958)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의 <다가올 세상>(Things to Come, 1936) 막스 오퓔스의 <롤라몽테스>(Lola Montes, 1955) 로버트 알트먼의 <내슈빌>(Nashville, 1975) 마이크 리의 <인생은 향기로워>(Life Is Sweet, 1990) 니콜라스 뢰그의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The Man Who Fell to Earth, 1976) 웨스 앤더슨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Rushmore, 1998) 스파이크 존스의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