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을 빳빳하게 펴고 싶어요.” 설경구가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에 합류하게 된 건, 변성현 감독의 이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변성현 감독의 예전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그런 대답을 봤다. <나의 PS 파트너>에 지성을 캐스팅한 이유가 굉장히 반듯한 그의 이미지를 구겨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너무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에 나도 물어봤다. ‘그럼 나도 구겨버릴 거니?’ 그랬더니 변 감독이 이렇게 답하더라. ‘선배님은 워낙 구겨진 이미지라, 빳빳하게 펴고 싶어요.’ 얼마나 재미있고 솔직한 답변인가?”
<불한당>의 재호는, 변성현 감독이 새롭게 발견한 설경구의 ‘빳빳한’ 모습이다. 포마드를 바른 머리에 명품시계, 잘 재단된 슈트 차림의 불한당. 재호는 그동안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 <감시자들>의 황 반장 등을 통해 둔탁하고 선 굵은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온 설경구의 기존 모습과 여러모로 차이가 있는 인물이다. 그동안 그가 맡아왔던 배역이 일상의 투박함 속에서 날카로운 감각과 본능을 지닌 캐릭터의 매력을 깨닫게 해줬다면, <불한당>의 재호는 보다 만화적이고 양식적이지만 이 새로운 틀 안에서 움직이는 설경구의 모습을 발견하는 신선함을 주는 인물이다. 마치 코믹스의 한 대목에 등장할 것만 같은 만화적인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설경구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음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의상 피팅과 헤어, 메이크업을 하는데 죽겠더라고. 머리를 올릴 때마다 너무 어색해서 ‘내려주세요’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머리를 내릴 때마다 ‘올려 올려’ 했다. (웃음) 사람이 간사하다. 정갈한 옷을 입으니 자세가 달라지고, 자세가 달라지니 태도가 달라지더라.”
사람을 “쑤시고 썰고 자를 때도” 그 대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불한당’ 재호에게도 흔들림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가 예수처럼 군림하고 있던 감방에 새롭게 들어온 신입 현수(임시완)를 대할 때다. 누구도 믿지 않고 살아왔기에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재호가, 온전히 마음을 열 수 없다 생각했던 존재인 현수에게 점차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불한당>을 보는 묘미 중 하나다. 설경구는 현수에 대한 재호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남녀간의 사랑만 사랑인가. 누군가에게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면, 나는 그것 또한 사랑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불한당>은 누아르영화인 동시에 두 남자의 멜로영화인 셈이다.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으라”던 악한이 사람을 믿게 되고,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청년이 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그들의 관계 속에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진한 애정의 감정이 있다고 설경구는 말한다.
한편 <불한당>은 설경구의 새로운 결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루시드 드림>을 끝내고 나서였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난 끝이구나.’ 누굴 탓하려는 게 아니고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동안 영화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라는 게 답이 없고, 끝도 없이 생각해야 할 과제인데 말이다.” <서부전선>과 <루시드 드림>의 흥행 부진과 더불어 설경구에게 찾아온 배우로서의 위기의식은 그로 하여금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을 선택하게 만들었고, <불한당>이라는 모험을 하게 했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그에게 큰 자극을 준 건 젊은 영화인들과의 만남이었다. “변성현 감독, 조형래 촬영감독, 한아름 미술감독. 이 3인방에게 많이 배웠다. 인생에 오직 영화밖에 없는 친구들이다. 타성에 젖어 있던 당시의 나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어준 것 같다.” 다시 연기의 날을 벼리고 있는 베테랑 배우는 당분간 쉴 생각이 없다. 한 학생의 자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조명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감독 김지훈)가 그의 다음 작품. “배우들끼리 치고받는 연기를 기대하고 있다”며 설경구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첫 영화의 크랭크인을 앞둔 신인배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