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균의 작품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든 평범하지가 않다. <브레인>(2011), <미스터 백>(2014) 등 TV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하면서 광기 어린 눈으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에너지를 발산해 시청자의 혼을 쏙 빼놓곤 했다. 야심적인 사극 도전이었던 <순수의 시대>(2014)에서는 체지방률을 2%대까지 줄이고 데뷔 이래 가장 수위 높은 베드신을 연기했다. 주로 신들리거나 혹은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기대가 생길 즈음, 신하균은 힘을 쭉 빼고 <올레>(2016)에서 중년 남성의 지질한 면을 코믹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최근 출연한 작품이 흥행이나 비평 면에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할 때에도 신하균의 행보만큼은 결코 뻔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하균이 여성 원톱 액션영화 <악녀>를 선택한 것이 그리 의외의 일은 아닐 것이다.
-주도하기보다 보조하는 역할이고, 분량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악녀>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여성이 메인이 되어 멋진 액션을 보여주는 작품이 나온다는 게 반가웠다. 워낙 충무로에는 남성 위주의 거친 영화가 많았으니까 신선하더라. 영화계에는 여자배우들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영화가 많이 없다. 거의 소모되는 역할만 연기하지 않나. 그래서 난 <악녀> 이후 정병길 감독이 다르게 보이더라. 갑자기 툭 내민 시나리오가 여자 캐릭터가 끌고 나가는 액션영화이고 이걸 상업적으로 만들 시도를 하다니. 게다가 주연은 김옥빈이고. (웃음)
-한국에 여성 위주 영화가 많지 않아서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걸까.
=물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충무로에서 이런 영화도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배우가 마음에 안 드는 역할을 할 수는 없다. 주변부 인물들도 충분히 매력적이어서 조화가 잘된다면 내 분량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출연할 수 있고, 다른 배우들도 그럴 것이다. <악녀>의 경우 내가 연기한 ‘중상’이라는 캐릭터가 일반적인 악당은 아닌 것 같아서 계속 궁금증을 자아내더라. 도대체 어떤 감정을 갖고 숙희를 대했던 걸까 궁금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을 한다는 것에 대한 도전도 있었다.
-중상의 분량은 많지 않지만 적은 분량의 액션으로 고수의 느낌을 줘야 했다.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며 연기했나.
=많은 동작 대신 간결한 액션으로 캐릭터를 보여줘야 한다는 데 무술감독도 나도 동의했다. 이런 방향으로 서울액션스쿨에서 훈련을 받으며 연습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다. 고수처럼 보이게, 더 잘하고 싶었는데. <순수의 시대> 이후 액션연기 경험이 쌓이면서 전보다 합을 외우는 건 빨라졌는데 정교함이 좀 떨어진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번엔. (웃음)
-십수년 전의 신하균은 <복수는 나의 것>(2002), <지구를 지켜라!>(2003) 등 아주 강렬하고 센 캐릭터를 자주 연기했다. 최근의 <올레>, 지금 찍고 있는 <바람 바람 바람>처럼 제주도를 배경으로 일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흥미롭다.
=<올레>의 경우 어렸을 때 밝은 미래를 꿈꾸던 대학 동창생들이 아무것도 아닌 중년이 되어 비리비리한 현실을 살아가는 스토리가 재미있게 다가왔다. 지금 50% 정도 촬영한 <바람 바람 바람>은 제목 그대로 중년 남성의 바람을 다루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이병헌이라는 새로운 연출자가 만들어내는, 내가 안 해봤던 코미디의 뉘앙스를 찾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항상 작품을 선택할 때 내가 해보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든 새로움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인가를 1순위로 고려한다. 그래야 연기하는 나도 재미가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악녀>는 여성 원톱 액션영화이면서 섹시함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 시대의 관객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들을 계속 고민하며 작품을 하는 것이 배우가 해야 할 일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건 새로운 스타일을 가진 작품일 것이다. 내가 <복수는 나의 것> <지구를 지켜라!> 등을 찍을 당시엔 한국에 그런 영화들이 많았다. 이렇게 신선함을 줄 수 있는, 유행처럼 보이지 않는 작품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악녀> 이후에는 이용승 감독의 <7호실>이 개봉예정이다.
=DVD방에서 벌어지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야기다. 액션, 스릴러, 호러, 하이틴물 등 다양한 장르가 녹아 있다. 같이 나오는 도경수와 멜로 비슷한 것도 하고, 사회 드라마적 요소도 있다.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독창적인 장르물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찍었다. 아마 하반기에 인사드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