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고 끝없이 불편하다.”(<가디언>) “쾌락의 광폭한 양면성을 보여주는 데 두려움이 없는 작품.”(<슬랜트 매거진>)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의 신작 <엘르>가 6월 15일 개봉한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처음 공개된 뒤, 전세계 평단에 충격과 놀라움을 선사한 이 작품은 금기와 욕망을 원천으로 하는 폴 버호벤의 영화 세계에서도 강렬한 족적을 남길 영화가 틀림없다. 전작 <블랙북> 이후 10년 만에 폴 버호벤이 복귀작으로 선택한 영화 <엘르>를 소개한다. 분명한 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이 영화에서 보게 되리라는 점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엘르>가 상영되기 전까지, 폴 버호벤은 거의 잊힌 이름이었다. 그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로보캅>(1987)과 <토탈 리콜>(1990), <원초적 본능>(1992) 등 20세기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가 고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근사한 스릴러영화 <블랙북>(2006)을 만든 것도 벌써 10년 전 일이다.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속편이 극장가를 점령하고, 2~3년에 한번씩 성실하게 차기작을 생산하는 수많은 작가 감독들의 물결 가운데 오랫동안 차기작을 고심 중인 유럽 감독의 이름은 금세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폴 버호벤은 뻔뻔하게 돌아왔다. 마치 10년간의 공백은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온갖 불균질한 요소들로 가득 채워진 서슬 퍼런 신작을 들고. 그의 영화 <엘르>는 단언컨대 올해 한국 극장가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 중 가장 불온한 작품일 것이다. 강간, 복수, 살인, 욕망, 비밀, 폭로. ‘금기’라는 카테고리가 있다면 그 안에 반드시 포함될 요소들이 이 영화에는 즐비하다. 하지만 “모든 클리셰를 비껴나가는 복합적인 영화”라는 <토털 필름>의 평대로, <엘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정의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영화다. 이어서 <토털 필름>을 한번 더 인용하자면, 그건 <엘르>가 “이런 유형의 게임에서 정상의 경지에 오른” 감독과 배우가 함께 만든 영화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폴 버호벤과 이자벨 위페르. 섣불리 드러낼 수 없는 인간의 불온한 욕망을 낱낱이 폭로하는 데에서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을 찾는 네덜란드 감독과 인간의 비틀린 욕망을 표현하기로는 그 이상의 대안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프랑스 배우의 만남이다.
<엘르>는 암전된 화면 속으로부터 들려오는 한 여성의 비명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미셸(이자벨 위페르). 그녀는 지금 막 강간을 당했다. 복면을 쓰고 집으로 침입한 괴한은 미셸을 광폭하게 범한 뒤 유유히 현장을 떠난다. 보는 이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건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 미셸의 태도다. 그녀는 경찰에 전화를 걸지도,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잠시 몸을 추스르더니 의연한 얼굴로 입었던 옷을 쓰레기통에 넣고 깨진 접시를 치운다. 그리고 욕조에 앉아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피가 목욕 거품에 뒤섞이는 걸 차분하게 바라본다. 이 오프닝 시퀀스만으로도 <엘르>는 관람자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미셸을 범한 자는 누구인가? 미셸은 왜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그녀는 왜, 이 상황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이어지는 영화의 서사는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 될 거라고 모두가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엘르>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관객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 여자’(Elle)라는 제목의 의미처럼, 이 영화의 초점은 미셸이라는 인물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데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에 이어지는 장면은 너무도 평화로워 보이는 미셸의 일상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는 다양한 유형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미셸이 대표로 재직 중인 게임 회사의 부하 직원은 익명의 단체 메일로 그녀가 게임 캐릭터에 강간당하는 영상을 발송한다. 불륜 관계에 있는 회사 동료는 미셸이 더이상 원하지 않는 육체적 관계를 요구한다. 철없는 어머니는 끊임없이 남자를 바꾸어가며 집에 들이고, 어리숙한 아들은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여자친구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키우려 한다. 폴 버호벤은 “당신 주변의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당신 삶의 일부가 되도록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이 <엘르>를 관통하는 중요한 물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엘르>는 다양한 유형의 폭력 가운데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다.
미셸은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면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는, 일상의 폭력적인 관계들에 대한 미셸의 대처 방식은 진취적이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뒤틀려 있다는 인상을 준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이를테면 익명의 단체 메일을 발송한 회사 직원을 찾아낸 뒤, 그녀는 그를 불러 바지를 내리고 자기 앞에서 자위를 하게 한다. 그리고 그가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천천히 음미한다. 미셸의 내면에는 그녀도 어쩌지 못하는 폭력성과 욕망이 있고, <엘르>는 그런 미셸의 면모를 보여주길 소홀히 하지 않는다. 자칫 피해자의 뒤틀린 욕망을 가해자에 대한 면죄부로 오인할 수도 있겠다는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피해자는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며, 가해자는 늘 권력 관계에서 피해자의 우위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는 선입견에 대한 저항의 제스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큰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눈여겨봐야 할 에피소드가 있다. 미셸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에게는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 연쇄살인범 아버지가 있고, 미셸은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의 핏줄을 타고난 존재다. 그녀의 과거사는 미셸의 DNA에 어쩌면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를 기이하고 어두운 힘에 대한 은밀한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지 희생자에 머무르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폴 버호벤의 말대로, 미셸은 성폭력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강렬한 개성과 굳건한 저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미셸의 저력은 등장인물들의 엇갈린 욕망이 폭로되는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엘르>에서 가장 유머러스하고도 씁쓸한 대목이라고 할 만한 이 장면에서 미셸의 집을 방문한 부르주아들은 점잖게 차려입고 우아하게 식사를 하지만 그들의 진면모를 아는 사람은 오직 미셸뿐이다. 불륜남, 얼뜨기, 과거의 연인,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강간범…. 아는 것이 힘이고, 시선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 권력자라면 미셸은 이 위선적인 파티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라 할 만하다. 시선의 권력을 획득한 여성 캐릭터의 눈을 통해 화려한 파티 사이로 은밀하게 흐르는 욕망과 비밀스럽게 구축된 관계를 지켜보는 건 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은밀한 즐거움이다. 이 장면을 보고 있자면 부르주아의 위선을 폭로했던 프랑스 감독 클로드 샤브롤의 작품들이 생각나곤 한다(공교롭게도 이자벨 위페르는 샤브롤이 아끼는 뮤즈였다).
‘그 여자’로 분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더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변태성을 탐험하는 작업을 하려면, 기쁨과 창의성을 가지고 (감독과) 저 멀리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이런 악보에 장단을 맞출 수 있는 배우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에 동의하는 바다. 스릴러와 블랙코미디 사이 어딘가에서,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독하게 쌓아올린 회사 임원과 은밀한 욕망을 지닌 여성의 복합적인 면모를 연기하는 이자벨 위페르는 마치 폴 버호벤의 변화무쌍한 장단에 유려하게 응하는 재즈 연주자 같다. 비틀린 욕망을 지녔다는 점에서 <엘르>의 미셸은 역시 그녀가 주연을 맡았던 <피아니스트>의 에리카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도 있는데,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가 에리카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면 폴 버호벤의 <엘르>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미셸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느낌이다.
본래 <엘르>는 미국을 배경으로 촬영하려 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투자자는 물론이고 배우들(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샤론 스톤 등이 물망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영화의 자극적인 소재와 도발적인 이야기에 부담을 느꼈기에, 버호벤은 유럽으로 눈길을 돌려 원작(프랑스 작가 필립 지앙의 소설 <오…>가 <엘르>의 원작이다)의 무대이기도 한 프랑스에서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엘르>를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엘르>는 폴 버호벤이 유럽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더 명확히 실감하게 해준 작품이 됐다. 온갖 종류의 금기에 노골적으로 현미경을 들이대는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모험심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게임을 깨부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언제나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믿는 폴 버호벤은 피해자와 약자의 서사에서 탈주해 상황 대신 자신을, 윤리 대신 마음의 움직임을 좇는 무시무시하고도 매혹적인 여성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저력을 입증해 보였다. 그의 다음 작품을 보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내야 할까. 부디 <블랙북>과 <엘르> 사이의 공백만큼 길진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