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용철의 영화비평] <엘르>와 <토니 에드만>이 말하려는 것의 ‘일부’에 대해
2017-06-20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엘르>

영화의 역사에서 가족과 여성의 주제가 모던 시네마로 진입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례로 결혼이란 소재를 어떻게 영화화했는지 보자. 여성과 결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전기 영화는 프랭크 카프라의 <우리들의 낙원>(1938)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이 영화를 보면 남녀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을 비롯해 사회와 계층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순진한 무정부주의자 및 자유주의자가 우글거리는 집안과 냉혹한 자본주의자 집안 사이의 전투에서 살아남아야 여성은 자기 사랑을 결혼으로 확인받을 수 있다. 10여년 후 오즈 야스지로는 <만춘>(1949)을 연출한다. 여기서 결혼의 이슈는 홀아비와 외딸의 관계로 축소된다. <만춘>은 모던함을 지나 이상한 영화다. 결혼 이야기인데 결혼 상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결혼식도 묘사되지 않는다. 서로의 처지를 아는 까닭에 결혼 앞에서 마음 졸이는 부녀의 모습만 그릴 따름이다. 결국 그들은 부모, 자식으로 만난 것처럼 헤어져야 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인다. 60여년 후 클레르 드니는 <만춘>을 오마주한 <35 럼 샷>(2008)을 만들었다. 변한 건 없다. 홀아비를 두고 외딸이 결혼하는데, 그들은 삶에 주어진 운동의 법칙을 받아들인다. 홀로 되는 것인데, 기실 혼자가 인간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모던 시네마이면서도 마르코 벨로키오의 태도는 다르다. <만춘>이 철학적이라면, 벨로키오의 영화는 사회정치적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나란히 시작했으면서도 훨씬 급진적이란 점에서 고전기 영화들과도 선을 긋는다. 데뷔작 <주머니 속의 주먹>(1965)은 가족을 향한 분노로 가득 찬 작품이다.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남자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해 존속 살인의 운명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68혁명을 예고했던 벨로키오는 21세기를 지나면서 혁명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내 어머니의 미소>(2002)에서 어머니와 종교의 미스터리와 마주한 아들을 다루었고, <굿모닝, 나이트>(2003)에서는 정치의 시간인 1970년대로 돌아가 딸 세대가 아버지 세대를 다시 바라보게끔 했다. 이어지는 작품 <웨딩 플래너>(2006)가 지니는 의미는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다. 노장이 된 벨로키오에게 가족은 여전한 숙제다. 그의 태도는 얼핏 고전기 영화의 가족관과 헷갈릴 법하지만 둘을 나누는 명백한 기준은 개인과 사회의 구분이다. 고전기 가족영화의 태도가 사적인 욕심을 바탕으로 한다면, 그의 영화는 보다 넓은 세상의 이해를 목표로 한다. 그런 점에서 벨로키오의 태도는 지난해 등장한 두편의 주요한 작품, <토니 에드만>(2016)과 <엘르>(2016)를 연결 짓는 화두를 제공한다.

가족의 이야기라는 것

칸국제영화제에 선보이는 영화들의 중요 주제 중 하나는 가족이다. 지난해는 유독 심했다. 경쟁작을 나열해보면 가족영화의 거대한 전장을 보는 것 같다. 먼저 개봉한 <줄리에타>(2016), <단지 세상의 끝>(2016), <러빙>(2016), <토니 에드만>이 그렇고 <엘르>(2016), <아쿠아리우스>(2016), <시에라네바다>(2016)도 가족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 가운데 <줄리에타>와 <단지 세상의 끝>이 모녀 혹은 모자 이야기인 반면, <토니 에드만>과 <엘르>는 부녀 관계를 다룬다. 전자가 어머니와의 관계에 사적이며 심리적인 측면으로 접근한 것과 비교해, 후자는 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큰 그림을 그리는 쪽이다.

호기심의 시작은 ‘개입’이었다. 서구의 가족영화에서 부모와 자식은 약간의 호들갑을 떨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냉정한 관계를 유지한다. 너는 네 운명을 살고 나는 내 길을 간다는 식의 태도. 그런데 <엘르>와 <토니 에드만>에서 두 아버지는 딸의 삶에 심각할 정도로 끼어든다. 흡사 벨로키오의 질문을 들고 선 폴 버호벤과 마렌 아데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현대 여성에게 두 아버지는 ‘폭력적’이란 인상을 안길 법하다. <엘르>에서 미셸(이자벨 위페르)의 아버지는 평범하고 온순한 남자였으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뒤 딸을 세상에 남겨둔다. 30년 넘게 갇힌 아버지와 인연을 끊은 채, 미셸은 커리어우먼으로 성공적 삶을 산다. <토니 에드만>의 이네스(산드라 휠러)에게도 아버지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낭만적이고 괴이한 아버지의 태도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성공을 꿈꾸는 그녀의 삶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휴가차 방문한 아버지가 주변을 맴돌기 시작하자 그녀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토니 에드만>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코멘트처럼 보인다. 아데를 포함한 일군의 독일 감독을 일컫는 ‘베를린파’ 영화에서 신자유주의와 그것의 기원인 제국주의는 낯익은 화두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열망>(2008)이 그랬고 울리히 쾰러의 <수면병>(2011)도 그렇다. 읽어야 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태도와 방식일지라도, 그들 영화의 주제가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의 질서에 대한 서늘한 시선임은 분명하다. <토니 에드만>의 이네스와 <엘르>의 미셸은 신자유주의 질서의 첨병이다. 개발도상국의 산업과 노동자를 집어삼키면서, 출판사를 접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게임 산업에 뛰어들면서 그들은 욕망을 채워나간다.

아데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항상 비정상인 취급을 받는다. 첫 근무지인 학교에서 의욕적인 출발을 다짐했던 <나만의 숲>(2003)의 선생은 이웃과 학교로부터 이상한 인물로 낙인 찍혀 존재감을 상실한다. <에브리원 엘스>(2009)의 여성은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제발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 좀 봐, 그들처럼 행동하면 안돼?”라는 말을 듣는다. 일대일의 관계에서는 별 문제가 없던 개별 존재가 제3의 인물에게 노출되는 순간 따돌림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일상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공간이 아데의 영화에서는 긴장감 넘치는 곳으로 돌변한다. 인물들은 광장을 곧 공포와 두려움의 공간으로 느끼게 된다. <토니 에드만>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가족 내에서, 아버지와 딸로 만났을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던 아버지가 이상한 괴물처럼 느껴진다.

<토니 에드만>

<토니 에드만>의 아버지는 아데의 전작들의 인물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전작의 인물들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상한 존재로 따돌림당하는 것과 달리 여기에선 본인의 의지 아래 스스로를 이상한 인물로 탈바꿈한다. 그는 분장한다. 자기 얼굴이 아닌, 분신인 토니 에드만의 모습으로 딸의 공적 공간에 출현한다. 갈수록 거침없어지던 그는 클라이맥스에서 급기야 온몸을 털로 감싼 괴물로 나타난다. 천연덕스럽던 그가 마침내 털복숭이 탈을 떼어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의 탈진한 모습을 보았다. 그럼에도 카메라는 그의 얼굴로 카메라를 돌리지 않는다. 다만 땀에 절어 축축한 머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그의 속마음을 전달한다.

<엘르>의 미셸은 청결한 삶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바람과 반대로 그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매번 깨달을 뿐이다. 더욱이 그녀를 위협하는 건 모두 그녀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다. 어느 오후 그녀의 집에 들이닥쳐 그녀를 강간한 남자는, 그녀가 매력을 느끼는 이웃 남자다. 회사에서 지배적이고 폭력적인 그녀에게 위협적인 메시지가 전달되자 그녀는 직원들을 뒷조사하는데, 제일 혐오스러운 인간은 평소 그녀에게 호감을 드러냈던 직원이다. 게다가 친구의 남편이 시시때때로 미셸의 몸을 탐한다. 그녀는 자기가 만드는 게임에서 촉수 괴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여성에 다름 아니다. 이네스가 폭력적 시간의 가해자로 비친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잔인함과 사악함을 숨기지 않는 미셸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이네스의 아버지는 직접 딸의 인생에 등장해 무언가를 전달하려 한다. 그림자로 기능하는 미셸의 아버지는 다가올 징후에 대해 예언을 전하는 것 같다. 그 예언은 거꾸로, 미셸 푸코가 저서 <나, 피에르 리비에르>에서 다뤘던 2세기 전 사건을 기억하도록 이끈다. 1835년 6월 3일, 피에르 리비에르는 어머니와 누이와 남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한때 성직자를 꿈꾸었던 20살 청년은, (유산과) 재산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아버지를 괴롭히는 사악한 어머니와 그녀를 따르는 오누이를 죽임으로써 신의 의지와 정의를 행하기로 한다. 아버지와 다른 오누이를 위해 벌인 그의 야만적 행각은 정신의학과 편집증에 관한 중요한 사례 중 하나다. 푸코의 저서가 나오고 2년 뒤, 이 사건은 르네 알리오에 의해 <나, 피에르 리비에르>(1975)로 영화화되었고, 10년이 지나 일본 감독 야나기마치 미쓰오는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불의 축제>(1985)를 연출했다.

<엘르>의 유산

폴 버호벤의 영화에서 세상은 악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유럽과 할리우드에서 만든 모든 영화에서 그는 그 주제에 천착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돌아와 묻는다. ‘악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질문은 미셸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잔혹한 살인극을 벌였을까, 이다. 달리 말해 버호벤은 그간 자기 영화의 주제였던 것을 뒤집어 사유한다. 폭력의 순기능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의 리비에르와, <불의 축제>의 가장과, <엘르>의 아버지가 벌인 잔혹한 살인은 ‘과연 이타적 살인이 가능한가?’를 질문하게 한다. 그들은 살인을 하되 다른 가족을 살려둠으로써 구원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들의 야만적 죄와 정신병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그들의 행동이 지닌 이타성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토니 에드만>과 <엘르>는 유산에 관한 영화다. <토니 에드만>의 결말. 딸은 할머니 장례식에서 아버지와 재회한다. 아버지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언급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틀니를 자기 입에 끼우고, 할머니가 남긴 퇴폐적인 모자를 쓴다(할머니의 모자는 <에브리원 엘스>에서 파시즘의 시기를 통과한 어머니의 퇴폐적 수집품과 연결된다). 파시즘이 지배했던 시기를 살았던 여성을 어머니로 둔 아버지, 아마도 자유롭게 저항하며 살았을 남자를 아버지로 둔 딸. 카메라를 가지러 간 아버지는 다시 영화 속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딸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어떤 유산은 옳고 어떤 유산은 그른 것일까.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유산을 어떻게 할지 바라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세상에 복귀하려면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다, 그녀의 황망한 표정은 그 마음을 그대로 전한다. 그녀는 틀니를 뽑고 모자를 벗는다. 엔딩 크레딧에서 흐르는 그룹 ‘더 큐어’의 <Plainsong>은 아데 특유의 일상의 슬픔이란 주제로 나를 안내하려 하지만, 아데는 <토니 에드만>을 연출하며 야심을 품었을 성싶다. 이런 이야기라면 페촐트에게 남겨두는 게 좋았을 거다.

<엘르>의 유산은 더 가혹하다. 쓰러지며 “아빠를 만나라”고 했던 엄마는 죽었고, 아버지는 미셸이 수십년 만에 면회를 결심한 날 자살한다. <엘르>의 엔딩. 미셸은 어머니의 납골당에 꽃을 놓으러 간다. 그 곁으로, 사람들이 욕설을 써놓은 아버지의 것이 놓여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녀가 아버지와 주고받은 유산이 무엇일지 나는 결코 짐작할 수 없다. 필리프 지앙의 원작을 영화화했지만 <엘르>를 찍는 동안 버호벤이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눈 작품은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1939)이라고 한다. 르누아르가 “오늘날 부르주아의 정확한 묘사”라 소개했던 영화다. 부르주아의 시대는 분명 퇴폐적이지만 불멸의 매혹을 지녔다. <토니 에드만>과 <엘르>는 그런 시대를 근심한다. 정확하게 말해 근심하고 희생한 것은 그녀의 아버지들이다. 이네스와 미셸은 부르주아의 매혹에 빠진 존재들이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살아야 한다. 그들은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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