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박쥐> 확장판이 품은 거대한 세계
2017-08-31
글 : 김나희 (클래식음악평론가)
이미 당도한 걸작

인간이 중력을 극복할 수 있을까? <박쥐>(2009)의 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 나왔던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력은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삼라만상의 존재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불가항력적인 섭리다. 인간은 아니지만, 뱀파이어는 중력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으나 다시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는 없다. 상승과 하강 사이에 놓인 명백한 차이를 통해 <박쥐> 속 뱀파이어는 ‘하강’만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태주(김옥빈)가 “뭐긴, 인간 잡아먹는 짐승이지”라고 말하며 상현(송강호)과 함께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는 장면은, 은유적으로 인간에서 뱀파이어가 된, 그들의 지위 하락을 보여준다.

<박쥐>는 다른 걸작들이 그렇듯 시대보다, 관객보다 한 발짝 앞서 어떤 지점에 당도한 영화다. ‘복수 3부작’ 시리즈 이후 박찬욱은 그간 천착해온 ‘복수’ 대신 ‘사랑’을 소재로 선택했다. 그가 전작들을 통해 선보인 세계는 <박쥐>에서 보다 선명하게 구현된다. 층위가 다양한 무국적의 공간은 곳곳에 신화적 대비를 이루는 이미지를 숨기고 있다. 삶과 죽음, 해와 달, 상승과 하강, 밤과 낮, 생성과 소멸, 죄와 구원, 플라토닉한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이미지들은 이국적인 배경 요소들로 인한 낯선 분위기에 가려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그렇기에 <박쥐>는 유심히 바라보아야 하며, 관객이 능동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확장판에서 늘어난 장면들은 겹겹이 싸인 서사의 층위에 윤기를 더하고, 그 사이에 놓인 아름다움이 보다 선명히 빛난다.

음악 역시 박찬욱의 과감한 변화를 보여준다. 쇼스타코비치를 연상케 하던 단조의 왈츠(<올드보이>), 비발디와 파가니니의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친절한 금자씨>)을 과감하게 사용하던 박찬욱은, 이 영화의 시작에 단정한 울림의 리코더로 바흐의 칸타타를 들려준다. 이어서 서사가 고조되어갈 때 과감히 무조의 현대 음악이 나와 낯선 긴장을 자아낸다. 바흐가 안정적으로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에서 매주 곡을 써내려 가던 중기의 칸타타에서, 한달음에 20세기의 현대음악으로 시대를 건너뛰고 달음질친다. 상현이 미사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 앞에서 긋는 성호처럼, 이 영화 속 에너지는 수평과 수직이 교차되며 만들어지는 십자가처럼 영화 속 세계를 점차 확장해 나간다. 적절히 배치된 클로즈업, 하나로 연결되는 장엄한 롱숏, 과감한 카메라워크, 독특한 부감숏들은 각기 다른 길이의 음표처럼 이 장대한 사랑 이야기의 흐름에 매우 인간적인 호흡을 불어넣는다.

중력을 거스르는 에너지, 영화의 리듬을 바꾼다

주도적으로 화면을 장악한 태주 역의 김옥빈은 탁월한 몸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대사를 하지 않고 서 있는 그녀의 어깨나 등, 손가락 끝, 서 있는 자세에서까지 감정적 몰입이 전해진다. 피나 바우슈, 마기 마랭, 트리샤 브라운같이 20세기 누벨 당스의 새로운 문법을 선보인 안무가들의 몸짓이 떠오른다. 상현은 성당 고아원 출신으로 신부가 되었다.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이타심과 타인을 향한 동정심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바이러스 실험대상에 지원하고, 사망선고까지 받았다 살아나 뱀파이어가 된 그는 인간 내면의 모순을 표상한다. 모든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느끼며, 성욕에 눈뜨고 정념에 사로잡힌 순간에도 끝까지 신부로서 자의식을 내려놓지 못한다. “이러다 우리 둘 다 지옥 가요”라고 말하면서도 병원에 찾아온 태주의 몸을 탐하고, 동시에 태주의 육체에 새겨진 상처와 흉터, 고통 어린 신음을 견디지 못한다. 상처와 고통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며, 그는 “버림받은 고아”라는 태생적 결핍을 공유하고 있는 태주를 금방 알아본다. 둘 사이에 퍼져나간 무언의 동질감과 비밀스러운 결속은 상현이 가로등 불빛 아래 태주의 어깨를 내려다보는 순간, 강렬한 육체적 갈망으로 나아간다.

미사에서 포도주를 나눠주며 그리스도와 같이 “이것은 나의 피요”(ceci est mon sang)라고 읊조리던 상현은, 피를 마시지 않고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뱀파이어가 된다. 지독한 딜레마에 처한 그가 당면한 현실의 순간들은 날카로운 예각의 모서리를 지닌 파편이 되어 보는 이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상현이 노신부로부터 속죄의 경을 받고 와인 오프너를 송곳처럼 펴서 살인을 저지르고 피를 마실 때, 예민한 후각으로 태주가 다른 남자와 섹스했는지 의심할 때, 그를 성자로 우러르던 사람들의 텐트를 찾아가 여신도를 강간하려고 시도할 때, 존재의 모순은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덩이처럼 묵직하게 날아온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주는 밤거리를 맨발로 달린다. 발 뒤꿈치가 갈라져도 상관없다. 맹렬하게 세계의 끝을 향해 달리는 한 마리 야생마처럼 질주하는 그녀의 신음은, 섹스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와 유사하다. 태주의 질주가 수평으로 달려나가는 에너지를 영화에 부여한다면, 상현이 그런 태주 앞에 나타나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올려, 중력을 거스르고 자신의 신발을 신겨주는 순간에는 상하 방향의 수직적 움직임이 더해진다. 그 자체로 성호를 긋는 행위의 재생이며, 십자가의 형상이 영화 전체에 드리운다. 상현이 태주를 품에 안고 뛰어내릴 때, 뱀파이어가 된 후 통제할 수 없게 된 태주와 충돌할 때에도, 이들 사이에는 잠시 중력이 휘발한다. 이 중력을 거스르는 수직적 움직임은 장대한 서사 곳곳에서 관객이 상현과 태주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온몸의 근육을 사용해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이 에너지는 종횡무진하며 영화의 리듬을 바꾼다.

태주와 상현이 육체적인 방식으로 가장 가까워지기 전, 사랑은 이미 상현이 태주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에서 탄생한다. 두사람이 각자의 삶에서 오랫동안 내면에 품어온 고독과 폐허가 서로 맞닿은 지점이기도 하다. 사랑은 이미 시작되었다. 상대방을 보호하고, 상처를 감싸주고, 구원해주고자 마음먹게 되는 순간에 이어서 상대의 육체를 욕망하는 정념이 차례대로 그들의 내면에 도착한다. 두 인물의 감정과 그들의 변화하는 내면 세계, 그들의 육체가 느끼는 감각이 켜켜이 쌓이며 수평,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에너지와 만나 <박쥐> 속 세계는 점점 확장된다. 이 거대한 세계는 걸작만이 당도할 수 있는 종착지이기도 하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그러하듯이, <박쥐>는 ‘잠시 맹렬한 사랑에 미쳐 친구의 아내를 탐한 뱀파이어의 사랑 이야기’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장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마지막은 모두의 기억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끝과 같은 황폐한 절벽 너머 바다가 펼쳐져 있고, 어둠을 건너 아스라한 빛이 도달한다. 서서히 솟아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며, 모든 것이 타들어가고 빛에 닿아 바스러진다. 상현이 신겨줬던 신발은 태주의 발에서 툭 하고 떨어진다. 애초 그녀의 것이 아닌 맞지 않는 신발이었다. “지옥에서 만나요”라는 상현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스쳐간다. 수평선 끝까지 한껏 달려 절벽에 도달한 그들의 최후는 다시 또 하강이다. 또 다른 성호를 그으며 영화는 끝난다. 가로등 불빛 아래 태주의 둥근 어깨를 내려다보던 상현의 마음속에 들어차던 정념도, 늘 굳은살이 박인 발로 달리다 처음으로 타인에 의해 그 발을 감싸줄 신발을 신은 태주의 기억도, 그 발에 입맞추고 핥고 애무하던 상현이 갈구했던 쾌락과 육체적 욕망도, 모두 그렇게 중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내려앉고 사라진다. ‘죽으면 끝’인 이 지상에서, 모든 것이 허무하고 덧없다. 걸작을 만난 후 밀려오는 벅찬 감정이 남아 오로지 영화만이 전 장르를 모두 품을 수 있는 ‘제7의 예술’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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