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리얼리즘이 뭔데? 사실이랑 사실적인 거랑 어떻게 다른데?”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그걸 알고 싶어 두서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글을 찾아봤고 생각이 정돈되지 않은 채로 이것저것 적다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왔다. 영화와 실제, 재현과 허구의 관계는 내가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 중 하나다. 시작은 <쥬라기 공원>(1993)이다. 그전까지 도감에서만 보던 공룡을 스크린에서 확인한 순간 나는 공룡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현실에는 존재하는 않는 공룡이 현실처럼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공룡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는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이 생겼다. 멸종한 공룡을 되살려 필름으로 찍은 건 아니지만 스크린에서는 공룡이 되살아났다. 1980년 무렵 탄생한 이래 30여년 만에 CG는 필름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영화를 데려가는 중이다.
영화는 사진에 근간을 두고 실제를 광학적으로 투사해 현실을 포착한다. 포토그래픽이란 찍는 순간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물리적 차이다. 굳이 믿음이라고 표현한 건 포토그래픽이란 것이 지금은 믿음이라는 심리적인 차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CG의 등장 이래 물리적으로 찍는 영화와 그리는 영화의 경계는 한없이 얇아지고 있고 이제는 구분이 무의미한 상황에 도달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처럼 일부러 아날로그 촬영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미학적 태도로 읽힐 정도로 ‘찍는 영화’에서 ‘그리는 영화’로 축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관객이 영화를 본다는 인식의 근간은 여전히 필름에 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가 실사라고 받아들여온 영상, 혹은 믿어온 질감이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결정한다. 주연배우 한명을 제외하곤 전부 CG로 그려진 <정글북>(2016)이 편의상 영화로 분류되는 건 실제 배우가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CG가 필름의 질감을 흉내냈기 때문이다. 단지 이미지를 새기는 도구가 광학적이고 화학적인 방식에서 컴퓨터의 연산 형태로 변화했을 따름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여전히 (변형된) 필름의 이미지인 것이다.
CG는 더이상 놀라운 기술이 아니다
다만 개념은 흐르는 물처럼 변하고 용어의 사용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뀐다. <쥬라기 공원>이 나올 당시의 ‘사실적’인 표현과 지금의 ‘사실적’이란 용어는 완전히 성질이 다르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CG의 변화에 맞춰 관객의 눈도 CG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어쩌면 우리가 필름 룩이라고 인식하는 건 실제 필름의 질감과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요컨대 시각적 차이, 질감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CG나 3D, VR 등 새로운 기술을 동원한 영화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미래를 이야기해왔다. 지금 구현된 기술이 언젠가는 미래의 영화가 될 것이라고, 미래에는 이런 영화가 대세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반대로 걱정해왔다. 항상 그렇듯 미래는 예상보다 일찍 온다. 우리가 미래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 눈앞에 도착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저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영화에 목소리가 처음 도착했을 때 무성영화의 정돈된 문법과 미학이 제자리를 찾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말이다. (물리적으로) 과거의 영화 역시 내가 목격하지 않았다면 아직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할 부분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영화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를 길들이는 것들에 대해서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하 <종의 전쟁>)을 보며 이 영화가 CG영화로서 미지의 영역에 발을 디디고 있다고 느꼈다. 새롭기 때문이 아니다. 완연히 익숙한데 인간과 CG 캐릭터가 서 있는 위치가 역전돼 있기 때문이다. 현재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는 CG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영역이 바로 인간의 얼굴이다. 공룡, 로봇, 동물, 미지의 생명체까지 무엇이든 재현할 수 있지만 인간만큼은 아직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불쾌함의 골짜기)를 뛰어넘기 어렵다(위의 <베오울프> 사진 참조). 인간이 특별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인간 표정의 미세한 이질감을 인간이 유달리 예민하게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빼어난 성취를 보인 CG영화는 대개 우회로를 선택한다. <아바타>(2009)가 자연스러운 건 나비족을 인간이 아닌 외계인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동물을 의인화한 존 파브로 감독의 <정글북>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을 닮은 대상을 선택해 이질감을 최소화한다. 나는 이 지점이 재미있다. CG영화가 필름의 질감을 흉내내는 것처럼 CG 캐릭터는 인간을 똑같이 재현하는 대신 한차례 경유하여 흉내낸다. <종의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유인원이 아니라 인간을 재현한 CG라고 해도 지금처럼 몰입해서 볼 수 있을까. 앤디 서키스의 디지털 캐릭터 시저의 연기는 한없이 사람에 가깝지만, 이는 달리 말해 결코 사람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넘을 수 없는, 혹은 넘지 않는 장벽의 존재는 관객으로 하여금 기술에 경탄하며 안심하고 극을 관람할 수 있게 하는 안전장치에 가깝다.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에 비해 맷 리브스 감독의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은 상대적으로 아쉽기 그지없다. 기술적 문제는 아니다. “1편이 인간적 동물의 반인간적 혁명으로 환호를 샀다면, 2편은 반인간적 동물의 인간적 전쟁으로 실망감만 안긴다”(<씨네21> 965호, 이후경의 영화탐독 ‘전편의 성취를 잇지 못한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는 평은 두 영화의 괴리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1편에서 시저는 유인원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하되 종종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며 관객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2편에서 적극적으로 인간의 전쟁을 수행하는 순간 유인원과 인간 사이를 오가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매력이 사라지고 인간을 흉내내는 원숭이만이 남았다. 다시 말해 흔히 ‘인간적’이라고 하는 건 단순히 표현 차원의 문제가 아닌 행위(혹은 서사)의 문제다. <종의 전쟁>을 보며 문득 ‘인간적’이라는 단어를 ‘영화적’이라고 치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머니즘을 강조한 적지 않은 영화(특히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는 흉내내는데 그치지만 <종의 전쟁>은 인간과 유인원의 위치를 역전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질문을 이끌어낸다. 인간적이란 건 무엇인가, 또 디지털 캐릭터는 실사와 다를 수밖에 없는가.
<종의 전쟁>이 클래식한 연출로 할리우드 고전 드라마의 풍모를 풍기는 건 그러한 인식의 연장인 것 같다. 시저가 얼마나 인간다운지, 앤디 서키스의 연기가 얼마나 사실적인지는 더이상 놀람이나 경탄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필름으로 실재하는 대상을 찍는 것처럼 당연한 행위다. 기술이 당위의 영역에 들어선 시점부터 영화는 시저라는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다. 외적인 충돌(시저와 대령의 대결)과 내적인 충돌(종족 수호의 대의와 사적 복수)을 이중으로 교차시켜 시저라는 캐릭터를 깊게 파들어가는 것이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안정적인 드라마 작법이 CG 캐릭터라는 기술 위에 재현될 때 새롭게 거듭나는 특이점. 비유하자면 <종의 전쟁>은 유성영화가 나온 이후 10여년 뒤에야 무성영화의 침묵을 배우기 시작한 유성영화처럼 보인다. CG라는 기술 자체를 대상화하지 않기까지 무려 30여년이 걸린 셈이다.
불투명한 인간과 선명한 유인원
최근 즐겨 듣는 팟캐스트 방송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153회 ‘LIFE 그리고 사진’편에서 흥미로운 쟁점을 접했다. 종군기자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전쟁 사진이 전쟁영화의 재현된 영상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두고 패널들이 논쟁을 벌인다. 한쪽은 원본에 대한 동경 내지 착시에 불과하다고 봤고, 다른 한쪽은 그럼에도 실제 전쟁터 한복판에서 찍었다는 정황과 정보가 그 사진을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한다고 반론했다. 아름다움이란 사물 자체에 기인하는가 하는 논쟁이다. 쉽게 단언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논제인데 원본의 유무가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질문은 CG와 필름의 비교와 맥이 닿아 있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은 취향과 믿음에서 출발하는, 평행선을 달리는 논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종의 전쟁>을 보며 CG와 필름이 꼭 충돌하고 대립하는 개념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근본적인 질문을 몇 가지 해보자. 디지털 캐릭터의 눈빛 연기라는 게 가능한가. 디지털은 그저 계산된 결과물의 이미지가 아닌가. 한편 배우의 연기는 계산된 결과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배우의 의도와 감독의 의도가 충돌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잘못된 표현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애초에 이미지는 잉여 정보의 총합이다. 그것을 판화 찍어내듯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한장의 이미지가 그럴진대 이미지의 연속, 영상과 움직임은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정보보다 읽어내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모래알 같은 순간들로 넘쳐난다. 영화가 단순한 이야기 전달 수단이 아니라 예술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있다면 바로 이 해석 불가능(혹은 불필요)한 정보들의 무수하고 미세한 틈에 기인한다. 필름은 이를 우연이란 이름으로 포착할 수 있지만 계산하고 그려진 CG는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착각해왔다.
존 파브로의 <정글북>이 동물을 최대한 인간처럼 묘사한다면 <종의 전쟁>에서는 인간을 불가해한 존재로 대상화한 후 대신 유인원을 재현하는 데 집중한다. <정글북>에서 가장 평평한 연기를 선보이는 주인공이 유일한 인간인 모글리 역을 맡은 닐 세티다(물론 주관적인 인상이다). 반면 능청스러운 발루, 미스터리한 카아, 듬직한 바기라 등 동물들의 표정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깊고 풍성하다. 하지만 이건 슬픔, 기쁨, 안타까움 등 정형화된 감정 모델들을 차례로 제시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전에 <정글북>에 관한 글을 쓰면서 “CG로 재현된 눈은 카메라만이 가능한 우연의 포착을 절대 재현할 수 없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정교한 계산을 통해 모사한 속임수가 얼마나 유의미할지 모르겠다”(<씨네21> 1059호, 송경원의 영화비평 ‘첫 번째 CG영화 <정글북>을 체험하며’)고 회의적인 입장을 밝혔었다(위의 <정글북> 사진 참조). 그러나 <종의 전쟁>을 본 후 그 의견을 일부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인간과 유인원의 위치를 역전시킨 <종의 전쟁>의 두가지 묘사, 포커스 아웃과 클로즈업을 활용하는 방식 때문이다. 해석 불가능한, 이해 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영화에 담는다는 것은 우연을 포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물리적인 접근과는 다른 차원의 연출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은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이며 감독이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 재현하는 관점에 관한 사유에 가깝다.
가령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2012)가 프레디(호아킨 피닉스)와 랭케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사이 흐르는 예민한 공기를 포착하는 방식은 배우의 연기를 카메라에 성실하게 담는 것과는 다르다. 유일무이한 감각은 배우와 카메라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의 호흡에서 발생한다. 즉 배우의 연기나 미장센 역시 영화의 구성 요소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접근하는 관점, 또는 세계를 축조해가는 태도다. 그 총합을 연출이라 부른다. 하지만 CG영화에 한해서 아직까지 우리는 개별 구성 요소를 분리해서 인지하려는 관성이 있는 것 같다. 디지털 캐릭터 역시 영화의 부분에 불과하지만 경탄하는 쪽이나 경계하는 쪽 모두 유독 그 부분만 따로 떼어 강조한다. 디지털 캐릭터가 기술적으로 얼마나 정교하게 재현되었는지에 대해 논하는 건 카메라의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따지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접근이다. 중요한 건 세계를 하나의 운동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종의 전쟁>은 세계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인지한다. 지금까지 디지털 캐릭터의 클로즈업은 얼마나 사실적인지가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종의 전쟁>에서 클로즈업은 여느 기술적인 전시와 다르다. 시저의 표정은 몇 가지 단어로 압축하기 어려울 만큼 매우 복잡한 감정을 동시다발적으로 담고 있는데, 관객은 주변의 조건과 상황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유추해나가야 한다.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잉여의 표정을 담고 있는 유인원의 표정은 배우의 그것과 구분되지 않는다. 반면 영화 속 인간의 표정은 매우 투명해 해석하기 힘들다. 대표적으로 순수를 상징하는 노바(아미아 밀러)는 마치 디지털 캐릭터 같은 비어 있는 표정을 선보인다. 설정상 바이러스에 감염돼 언어 능력을 잃어버린 인류의 미래를 대표하는 노바의 모습은 표정과 언어를 제거함으로써 모호함을 획득한다. 시저가 너무 복잡해서 모호하다면 노바는 너무 투명해서 모호한 셈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애초에 실사 배우와 디지털 배우의 관계였다. 기술적인 한계가 있는 디지털 배우는 상대적으로 여백을 통해 묘사되고, 실사 배우는 디지털이 쫓아오지 못할 복잡다단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종의 전쟁>은 인간-필름 중심의 관계가 이젠 손쉽게 역전될 수 있다는 선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당분간 계속될, 오래된 미래
영화는 심지어 유인원을 깊은 심도로 선명하게 잡는 반면 인간은 미지의 대상처럼 불투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Rise, Dawn, War’로 압축 정리된 오프닝 타이틀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일군의 무리의 뒷모습을 잡는다. 초점을 어디에 맞출지 몰라 뿌옇게 흐려진 화면은 점차 군인들의 헬멧에 시선을 맞추기 시작한다. 첫 번째 헬멧에는 ‘monkey killer’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이윽고 시선을 옮긴 다음 헬멧에는 ‘멸종 위기종’이고 적혀 있다. 카메라는 그제야 전체를 조망한다. 유인원 무리를 습격하기 직전의 군대를 따라가는 <종의 전쟁>의 첫 화면은 엔딩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대비되며 조응한다. 인간 무리를 잡아나가는 오프닝에서는 아웃포커스를 통해 이들을 불투명한 것으로 묘사한다. 헬멧에 적힌 문자로 정보를 차례로 준 후에야 이들이 누구인지 가까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엔딩에서 이상적인 안식처에 도달한 유인원의 무리를 잡아나가는 카메라는 처음부터 딥포커스로 모든 화면을 한번에 보여준다.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마치 한폭의 프레스코화처럼 유인원의 창세기를 화면에 수놓는다. 불투명한 것과 선명한 것의 대비는 이후 영화 전반에 걸쳐 묘사되는 인간과 유인원의 관계를 압축하고 있다. 유인원은 너무도 선명하고 인간(대표적으로 대령)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양 그려진다. 철저히 유인원, 시저의 시점에 맺혀 있는 영화는 인간이란 존재를 최대한 생략하거나 대상화함으로써 CG로 창조된 유인원을 관객에게 밀착시키는 것이다.
<종의 전쟁>은 시저의 영웅신화다. 고뇌하는 시저의 표정은 극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선명한 감정으로 정리된다. 동시에 이 영화는 대령을 맡은 우디 해럴슨의 눈빛이 생기를 잃어가는 영화이기도 하다(위의 ‘대령’ 사진 참조). 시저를 암살하기 위해 동굴에 잠입한 대령의 강렬한 눈빛은 시저에게 이해 불가능한 이미지다. 시저는 복수라는 미명하에 대령을 알고자 다가가고 그가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이 순간 시저가 느꼈을 충격, 혼란과 CG와 필름 사이에서 둘을 나누고 번민하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찍힌 것과 그려진 것, 포착한 것과 재현한 것 사이 영원히 메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골짜기는 의외로 간단하게 메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애초에 골짜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종의 전쟁>은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반인간적(혹은 인간적인 것 너머) 가치를 쌓아올린다. 그리하여 도착하는 건 우리가 인간적이라 믿어왔던 가치들에 대한 의심이다. 마찬가지로 원본이 있는 디지털 캐릭터는 매우 영화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영화적’이라고 믿어왔던 기준들을 해체한다. <정글북>을 보며 리얼리티에 관한 새로운 인지 방식을 고민했다면 <종의 전쟁>을 통해 그것이 고전영화가 쌓아올린 미학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예감한다. 목소리나 CG처럼 영화 기술의 역사 위에 완전히 새로운 갈림길이 나오기 전까진 당분간은 이 ‘오래된 미래’에 천천히 길들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