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마자, 아니 듣자마자 반해버렸다. 음악과 액션이 동시에 눈과 귀를 연타로 때리는 감각적인 장르영화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액션도 액션이지만 <아토믹 블론드>의 음악 선곡은 그 자체로 영화의 장르적 완성도를 ‘레벨업’하는 데 일조한다. 많은 관객은 극장 문을 나서기도 전에 방금 흘러나왔던 노래 제목을 검색하게 되리라. <아토믹 블론드>는 한편의 영화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품고 있는 주제에 부합하는 시대의 명곡을 조합해 하나의 무대에 올린 록페스티벌 공연 같기도 하다. 어떤 노래들이 무대에 올랐는지, 영화에 등장한 순서대로 노래에 얽힌 사연과 영화에서의 쓰임에 대해 한곡 한곡 복기하면서 <아토믹 블론드>의 매력을 되새겨보자.
나는 스파이다
영화 <캣 피플> 사운드트랙 중 <Putting out Fire> / 조르조 모로데르&데이비드 보위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미국, 독일과 구소련 스파이들이 그들만의 전쟁을 벌이던 냉전 시대. <아토믹 블론드>는 냉전 시대가 종식한 데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자막으로 알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의 발단이 되는 어떤 사건의 배경으로 흐르는 첫곡은 체제 저항 정신을 노래하던 펑크의 시대가 가고 전자음악과 댄스 등 새로운 음악 장르가 태동하던 시기에 히트를 친 뉴 오더의 <Blue Monday>다. 음울한 시대의 이야기를 리드미컬하게 들려주겠다는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제시하는 선곡이다. 격변하는 독일 정세 속에서 유능한 MI6 요원 개스코인(샘 하그레이브)이 비밀 문건을 입수하려다가 의문사하자 본부에서는 다른 요원 로레인(샤를리즈 테론)에게 개스코인의 죽음을 조사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로레인의 첫등장은 지령을 받고 독일로 향하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본부로 소환당하는 길이다. 놀랍도록 탄탄한 근육과 체지방 제로에 가까워 보이는 그녀의 몸을 보여주며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순간에 들리는 노래 <Putting out Fire>야말로 사실상의 첫곡이자 로레인의 메인 테마다. 폴 슈레이더 감독의 <캣 피플>(1982) 엔딩곡으로 쓰인 이 노래는 조르조 모로데르가 만들고 데이비드 보위가 작사한 곡으로 인간이자 표범으로 살아가야 하는 주인공의 사랑과 절망을 노래한 곡이다. 이 곡을 무척 좋아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이런 명곡을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 쓴 것은 실수였다”라며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쇼산나의 메인 테마로 사용했다.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 역시 이 곡이 “<아토믹 블론드>의 초반에 등장해야 했다”고 말한다.
죽을 만큼 화려하게
<Father Figure> / 조지 마이클
모두가 기대하던 순간이다. 과연 로레인은 언제 어떻게 화끈한 액션을 선보일 것인가. 여기에 한 가지 궁금증을 덧붙이자면, 과연 어떤 노래가 그녀의 현란한 액션 장면에 삽입될 것인가. 베를린에서 개스코인의 사체를 수습하고 비밀 문건의 정체도 파헤치려는 로레인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스파이들의 타깃이 된다. 특히 비밀 문건에 관심이 많은 KGB는 그녀를 잠시도 가만 놔두지를 않는데 결국 로레인이 보기 좋게 기습을 당한다. 그때 흘러나오는 노래가 1987년에 발표한 조지 마이클의 첫 솔로 앨범 수록곡인 <Father Figure>다. 뼈와 뼈가 부딪치는 화끈한 근거리 격투 액션의 배경곡으로 조지 마이클의 감미로운 음색이 흘러나온다고 한번 상상해보자. 꽤 과감한 선곡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로레인의 액션 장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격투 컨셉이나 카메라워크가 아니라 그녀의 패션 스타일이다. 기습 당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녀는 옷차림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은 상태다. 물론 자신이 스파이라는 것을 광고하듯 짙은 색 계열의 롱코트로 몸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녀와 100m 떨어진 거리에서도 눈에 확 띌 것 같은 새하얀 코트와 번쩍거리는 가죽 스커트, 새빨간 하이힐 등 걸음걸이에서부터 몸에 두르는 모든 것이 그녀의 화려함을 부각시킨다. <Father Figure>의 뮤직비디오는 어느 택시 운전사와 패션 모델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를 담고 있다. 액션을 통해 스파이 로레인의 패션을 보여주는 선곡으로 탁월하다. 그리고 몸에 두른 그 모든 것이 액션을 하는 데 부적합할 것이라 여겨진다. 막상 그녀가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당신 눈동자에 담겨 있어, 오 베이비’라는 조지 마이클의 감미로운 가사와 상대의 관절을 부수는 로레인의 주먹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차가운 도시
<Cities in Dust> / 수지 앤드 더 밴시스
로레인이 작전을 수행하고 정보를 캐내는 베를린은 비정한 도시다. MI6의 영국지부장으로 오랫동안 베를린에 거주 중인 요원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은 같은 소속 요원이라고 해서 딱히 로레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정세의 파도에 몸을 맡긴 스파이들의 삶을 “게임”이라고 표현하면서 자기 살 길을 우선 모색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레인은 퍼시벌의 도움을 받으라는 본부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보망을 가동한다. 영국 펑크록의 산증인과도 같은 밴드 수지 앤드 더 밴시스의 노래 <Cities in Dust>가 흘러나오면, 로레인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가봐야 죽을 게 뻔한 동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으로 향한다. 영국 펑크록의 태동기에서부터 변화를 겪던 포스트 펑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밴드로 각광받던 수지 앤드 더 밴시스를 두고 <타임>은 “포스트 펑크 시대에 가장 대담하면서 결코 타협하지 않는 밴드”라고 평했다. <Cities in Dust>는 이들의 7번째 스튜디오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1985년에 발표됐다. 이 곡은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되어 사라진 폼페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잿더미에 휩싸인” 냉전 시대의 도시, 스파이가 사는 도시의 주제가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곡을 찾을 수 있을까.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곧이어 그녀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1979)가 상영 중인 극장에서 거구의 KGB 요원을 상대로 멋진 액션을 선보인다. 1980년대 당시 베를린의 지역적 개성을 상징하듯 등장하는 노래는 한곡 더 있다. 바로 밴드 애프터 더 파이어의 <Der Kommissar>비밀경찰)이다. 지금 들어도 익숙하고 딱딱한 랩과 댄스 리듬이 인상적인 이 곡의 원작자는 ‘팔코’라는 독일 뮤지션. 이 곡이 흐를 때 등장한 프랑스 스파이 델핀(소피아 부텔라)은 “베를린도 이제 한물갔다”고 이야기한다.
8분간의 원신 원컷
<Behind the Wheel> / 디페시 모드
이제 영화는 중반 이후 절정으로 치달을 준비를 한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비밀 문건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며 어디서 적들의 권총이 목덜미를 노릴지 모른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일종의 출격 준비곡으로서 디페시 모드의 <Behind the Wheel>이 흘러나오면, 영화는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8분 롱테이크 계단 액션 장면으로 관객을 잡아끈다.
샤를리즈 테론은 이 장면의 액션을 두고 “로레인이 겪는 상황이 관객에게 실제처럼 전달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이유는 카메라워크에 있다. 건물의 ‘ㄷ’자형 계단 구조와 가정집을 오가며 벌어지는 액션은 원신 원컷으로 이뤄져 있다(물론 기술적으로는 여러 컷으로 나뉘어 있다). 롱테이크 액션이 가능했던 건 샤를리즈 테론의 의지와 연습 덕분이다. 무술감독에 따르면 끊어 찍을까 고민했던 부분을 샤를리즈 테론이 한 테이크에 찍을 수 있게 모든 동작을 소화했다고 한다. 로레인의 액션이 멋있다고 느껴지는 건 배우가 한손으로 힘 있게 주먹을 뻗어 가격하는 순간을 편집 없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워크는 007 시리즈나 <본 아이덴티티> 같은 현대 액션영화의 스타일을 보란 듯이 차용했고, 로레인이 보여주는 맨주먹 액션의 박력 넘치는 타격감은 과거 <예스마담> 시리즈와 같은 홍콩 액션영화의 날것 같은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아토믹 블론드>의 로레인 이전에도 많은 여성 액션 캐릭터가 있었다. 가까이는 <원더우먼>에서부터 멀게는 무성영화 시절의 <미소짓는 마담 브데>(1922)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수 있을 만큼, 영화 역사에서 계속 있어왔다. <아토믹 블론드>가 훌륭한 이유는 단지 남성 중심 장르영화와의 차별화 전략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액션영화의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음악과 폭력이 섹시하게 어우러진 영화가 드물기 때문이다. 주먹이 섹시한 여성 스파이의 등장은 <아토믹 블론드>의 큰 성과다.
저항과 비관의 음악
<99 Luftballons> / 네나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이 <아토믹 블론드>의 사운드트랙에 공을 들이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관객을 그 시대로 실감나게 안내할 것인가”였다. 당시 음악 차트를 석권하고 유행을 선도했던 록스타들의 인기곡 위주로 사운드트랙을 구성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여러 후보곡 가운데 감독은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곡이 독일 밴드 네나의 <99 Luftballons>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밴드의 리드 싱어 가브리엘레 네나 케르너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 곡의 가사는 하늘을 수놓은 99개의 풍선을 UFO로 오인한 군대의 한 장군이 조사를 위해 파일럿을 파견하는데 그가 풍선은 남겨둔 채 난데없는 에어쇼를 펼친다. 이에 화가 난 장군이 풍선을 격추시킬 것을 명령하는데 마침 국경지대 상공으로 흘러가는 풍선 때문에 국가간 긴장 상태가 조성된다. 당시 나토군의 핵미사일 문제, 즉 인류의 핵전쟁에 대한 반대의 뜻으로 만들어진 노래로 알려진 이 곡은 역사적인 반전 노래 중 하나로 지금도 여전히 회자된다. 독일어 가사로 이뤄진 원곡 외에 영어 버전으로도 만들어져 영국과 미국 등에서 인기를 얻었다. 당대 가장 유행했던 음악을 통해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려 했던 제작진의 귀에 이 곡이 꽂힌 건 당연하다. 이 곡을 배경으로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았거나 혹은 아직 죽지 않은 스파이들이 이런 대사를 남긴다. “이제 질문은 하나 남았다. 누가 이겼나?” 황폐한 유적지를 배경으로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 이 곡의 뮤직비디오 장면이 머릿속에서 오버랩된다.
살아남은 사람들
<Under Pressure> / 퀸&데이비드 보위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돌아왔다. 해피엔딩일까? 잠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누가 이겼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스포일러가 아니다. 애초 영화는 런던으로 돌아온 로레인으로부터 시작한다) 로레인의 발걸음에 맞춰 거리에 낮게 깔리는 음악은 밴드 클래시의 <London Calling>. 이 곡은 밴드 클래시가 일렉트로닉과 댄스 열풍이 불면서 펑크의 시대가 끝났다고 여겨지던 1979년에 “여기는 런던이다. 가짜 비틀스 마니아는 죽었다. 좀비들아, 다시 숨을 쉬어라”라고 외치며 펑크 정신을 강조했던 곡이다. 앞서 흘러나왔던 <99 Luftballons>와 마찬가지로 이 노래 가사도 반전과 반핵을 주장한다. 이어서 엔딩 크레딧을 장식하는 노래는 퀸과 데이비드 보위의 <Under Pressure>인데 영화의 처음과 끝을 데이비드 보위가 장식한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과 제작진은 데이비드 보위가 로레인의 행적을 취조하는 MI6 상사 역할로 출연해주길 원했다. 아마도 격변의 시기에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로레인은 어떤 이유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로서 데이비드 보위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세계 곳곳에서 냉전이 다시 시작될 것만 같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지금 <아토믹 블론드>를 보게 된다면, 그리고 사운드트랙을 다시 듣게 된다면, 결국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음악과 영화, 문학과 스포츠, 펑크와 섹스가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변혁을 외치다 시간이 좀 남는다면, 차갑고 비정한 도시에서 홀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로레인 수준의 발차기 실력을 갖추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