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숙이 연기하는 인물은 대부분 누군가의 엄마다. 하지만 그가 연기한 엄마들은 누구의 무엇이란 설정을 뛰어넘는 강력한 개성을 가진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엄마의 숫자만큼 매번 차별화되게 연기해야 한다”라는 배우의 믿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해바라기>와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 이어 <희생부활자>까지 김래원과 세번 모자 관계로 조우했지만 모성을 실현하는 방식은 양극단에 서 있다. 자신의 친아들을 죽인 양아치 오태식(김래원)을 용서하고 기꺼이 양아들로 거둬들이거나(<해바라기>),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연인을 둔 아들을 포용하던(<천일의 약속>) 그가 자식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기 어린 눈빛으로 살아 돌아왔다.
-7년 전에 사망했다가 부활하는 비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했다. 시나리오에서 “신진대사가 없는 코마 상태”라거나 “원망과 복수만 남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묘사된다. 이런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나.
=원래 작품을 준비할 때 캐릭터의 외형이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며 준비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람은 외견상 이렇게 보여야 한다는 틀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비슷하게 기이한 현상은 일부러 많이 찾아봤다. 저승을 갔다 온 사람이 있다더라, 숨이 멎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더라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연기를 할 때는 강제로 믿어서라도 그 인물이 되어야 하니까.
-그렇게 돌아와서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설정이 파격적이다.
=처음에는 자식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시나리오에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대목을 읽고는 납득이 가더라.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결국 엄마는 엄마고, 엄마는 위대하다.
-“희생부활자는 비 오는 날 나타난다”는 설정 때문에 한겨울에 비를 맞으며 촬영했다고.
=정말 춥고 힘들었다. 영화 초반 오토바이에 끌려다니다가 죽는 장면도 직접 연기했다. 굉장히 아찔한 장면이 많아서 거의 액션배우가 된 것 같더라. 몸은 힘들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안 해봤던 캐릭터에 도전하는 것에 희열을 느꼈으니까.
-김래원과 함께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에서, 스스로를 작품을 못쉬는 성격이라고 설명하던데.
=사실 연기에 대한 불꽃이 조금 사그라들던 때가 있었는데, 영화 <무방비도시>(2007), <박쥐>(2009), <도둑들>(2012) 같은 작품이 불씨를 다시 피우게 해줬다. 조금은 한정된 캐릭터를 연기하다가 다양한 성격의 엄마를 표현하니 너무 좋더라. 다른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보니 계속 일을 하게 됐다. 혼자서 쉬고 있으면 우울하고 무기력해진다. 연기를 해야 내가 살아 있는 것 같다. 난 결국 배우인 것 같다. 배우로 살아야만 한다. (웃음)
-혹시 연기하는 캐릭터들이 대부분 누군가의 엄마라는 점이 아쉽지는 않나.
=한동안은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다. 내가 엄마 연기를 안 할 수도 없고.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에 만족하고 있다. <무방비도시>를 하면서 이런 얼굴을 가진 엄마도 있구나, 우리가 보기엔 악인이지만 이 악인도 자식에 대한 사랑은 똑같구나 하는 걸 알았거든. 모정은 하나지만 엄마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 <희생부활자>는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엄마, 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2017)는 비밀을 감추는 엄마, <박쥐>는 이상한 면이 있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다. 그런 식으로 엄청나게 많은 인물을 표현할 수 있다.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어떤 역할을 연기해보고 싶나.
=좀 센 캐릭터를 하고 싶다. 가령 마피아 조직의 보스? (웃음) 실제로 여자보스도 많다던데 왜 다 남자가 해야 하나? 남자들이 하는 역도 해내는 배우가 되고 싶다. 내가 또 엄마를 연기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외국영화를 보면 록스타, 편집장, 정치인, 정보국 국장 등 여성이 연기하는 캐릭터도 무수하지 않나.
-그렇지 않아도 요즘 영화계에서 여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폭이 좁다거나 출연할 작품이 많지 않다는 문제제기가 많다. 문소리 감독의 <여배우는 오늘도>(2017)에 대한 관심도 그런 맥락 위에 있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렇다. 남자들은 시나리오를 쌓아놓고 고른다던데 여배우들이 전면에 나서서 극을 이끄는 역할이 확실히 많지 않다. 한창 연기할 나이의 배우들이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아깝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처음 영화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엄마역할은 거의 단역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 캐릭터의 비중이 조금씩 커지더라. 우리 땐 결혼을 빨리 해야 하는 분위기였고 서른살 정도 되는 여배우들은 할 역할도 없었다. 지금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지 않나. 이런 식으로 세상이 바뀌어간다면 언젠가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흐름을 지켜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