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감독 7인③] <이월> 김중현 감독 - 내가 바뀌면 영화도 바뀌리라
2017-10-30
글 : 송경원
사진 : 이동훈 (객원기자)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감독상 /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

<이월>은 나쁜 선택을 반복하며 조금씩 궁지로 내몰리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됐던 전작 <가시>에 이어 다시금 부산을 찾은 김중현 감독은 오랜 고민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가시>보다 조금 온화해진 듯하지만 김중현 감독이 마주보는 세계는 여전히 춥고 엄혹하다. <이월>은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한줌 온기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영화를 통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과정에 있다는 김중현 감독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진심이 묻어난다. 오랜 침묵을 깨고 신중히 내디딘 두 번째 걸음은 단순한 듯 묵직하다.

-<가시> 이후 5년 만이다.

=벌써 그렇게 됐다. 그동안 바쁘게 지냈는데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니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다. <가시>를 찍고 이런저런 제안들을 꽤 받았다. 그중에 상업영화 시나리오도 있었고 3, 4년 정도 거기에 매달렸다. 결과적으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첫 번째는 나 스스로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막연하게 대중이 좋아할 것들을 맞춰야 했는데 정작 그게 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한참 헤매다가 결국엔 손을 놓았다. 아직 준비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영화 속 민경이처럼 거의 막다른 곳에 몰렸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밑도 끝도 없이 판을 벌였다. (웃음)

-<이월>은 점점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가시>처럼 묵직하고 어둡다.

=기본적으로 어두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작에 비해 무척 밝아진 세계라고 생각한다. 내 예상보다 답답하고 어둡다고 받아들이는 관객이 많아 되레 조금은 당황스럽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딸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화에는 전사(前史)처럼 짧게 나오는데 이야기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어 딸에 관한 이야기로 좁혀서 접근했다. 때마침 조민경(영화 속 민경 역) 배우를 만나면서 이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결심했다. 아버지와 문제가 생겨서 혼자 겨울을 나야 하는 여자에 관한 영화다.

-전작 <가시>가 겨울 한복판에서 버티고 있는 영화라면 <이월>은 겨울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영화 같다.

=마침 시나리오를 쓸 때가 12월 초순이었다. 지금부터 이 사람이 겨울을 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고 어떻게 이 겨울을 통과할까만 생각하면서 썼다. 결론적으로는 긍정적이지 않은 선택에 다다른다. 겨울을 나는 데 실패하는 이야기라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그걸 꼭 실패라고만 보고 싶진 않다. 현실을 살아가는 데 더 큰 상처를 받고 버텨야만 한다면 그것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엔딩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희망이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드린 경험이 있다. 그 순간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바라봤던 세상의 풍경은 어떨까 늘 궁금했다. 엔딩 장면의 다소 환상적인 묘사, 예를 들면 비현실적인 사운드는 지금 고통으로 가득 찬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안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담은 상상이다.

-아직 두편밖에 만들지 않았지만 삶의 어두운 면, 팍팍한 현실 등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결국 영화는 나의 반영이다. 내가 살아온 환경이나 체험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징글맞았던 내 삶의 경험들이 곧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됐다. 때문에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런 소재나 상황들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것 같다. 첫 번째 영화를 찍고 나서 사실 그런 지점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려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것 같기도 하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전혀 다른 주제나 색깔의 영화를 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상업영화에 대한 첫 도전을 아쉽게 끝내고 난 뒤 깨달은 건 아직 더 준비가 필요하다는 거다.

-민경은 적당히 나쁜 사람이다.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을 하는 건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사소하게 잘못된 일들이 쌓여서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내몰린다.

=내가 인물을 몰고 가는 게 아니라 인물이 걸어 들어가길 바랐다. 민경이가 어떻게 변하고 어느 정도로 잔인해질 수 있을까 나 또한 걱정하면서 인물을 따라갔다. 환경은 세팅에 불과하다. 내가 고민하는 지점은 그 상황에 놓인 인물의 감정이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을 보면 왜 저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대신 변명해주고 싶어진다. 최대한 인물을 이해하려다 보니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만약 내가 민경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더 심각한 선택을 했을 거다. 민경이라서 그 정도까진 가지 않은 것, 아니 가지 못한 거다. 처음에는 위험하고 자극적인 행동들도 찍긴 했는데 그게 더 거짓말처럼 느껴지더라. 초고를 쓰고 ‘이 선택이 맞을까’ 하는 자문을 끊임없이 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경험이랄까. 영화를 찍다보면 스스로의 상처를 비롯한 삶의 여러 일면들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작업이다.

-왜 2월이 아니라 ‘이월’인가.

=2월은 애매해서 잔인한 계절이다. 조금만 버티면 따뜻해질 것 같지만 사실 꽤 춥다. 일종의 희망고문이랄까, 그래서 도리어 그 추위가 더 길고 뼈저리게 느껴진다. 내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2월만 견디자, 라는 건 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원래는 숫자 2월이라고 하려 했는데 한글로 바꾸면 ‘넘어간다, 넘긴다’는 중의적인 느낌을 줄 수 있어 최종적으론 ‘이월’로 결정했다.

-척박하거나 극단에 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뤄왔다. 차기작은 어떨까.

=<이월> 작업하는 중간에 촬영감독과 커피를 마시다 문득 생각나 한 말이 있다. 이제는 굳이 이렇게 하지 않고도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가시>가 겨울 한복판에 있었다면 <이월>은 겨울의 끝자락에 서 있다. 다음에는 봄에 싹이 틀 즈음 소소한 이야기들을 다룰 수 있지 않을까. 롤모델이라고 하면 부끄럽지만 오즈 야스지로 감독처럼 영화를 찍고 싶다. 영화는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쉼표 같다. 매번 찍을 때마다 미안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분명한 건 어떤 식으로든 내가 바뀌면 영화도 바뀔 거라는 거다. 다음에는 봄이 될까, 여름은 올까. 나도 궁금하다. 기다려진다.

<이월> 시놉시스

민경(조민경)은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틴다. 도둑강의까지 들으며 탈출을 꿈꾸지만 상황은 점차 나빠지고 급기야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처지다. 갈 곳 없는 민경은 대학 친구의 집에서 잠시 머물지만 이내 거리로 내몰린다. 결국 돈을 받고 성관계를 가진 남자의 집에 몸을 의탁한 민경. 남자의 아들 성훈은 민경을 따르며 엄마가 되어주길 바라고 민경 역시 자신에게 의지하는 성훈이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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