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도 이 영화가 영화 제작사 ‘광화문시네마’의 작품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족구왕>(2014)과 <범죄의 여왕>(2016)의 배우들이 대거 주·조연을 맡은 이 작품은 광화문시네마의 일원 전고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소공녀>의 미소(이솜)는 집이 없다는 점에서 광화문시네마의 이전 작품 속 캐릭터보다 상황은 더 나쁘지만, 담배와 위스키와 남자친구만 있으면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낙천성은 좀더 뚜렷하다. <소공녀>가 CGV아트하우스상을 수상하기 며칠 전 전고운 감독을 만나 영화와 캐릭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소공녀>는 어떻게 시작한 작품인가.
=택시비가 100원, 200원만 올라도 뉴스에서 난리가 나는데 담뱃값이 2천원이나 오른 것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더라. 담배가 아주 나쁜 것처럼 사회에서 격리시킨다. 하지만 담배는 돈 없는 노동자도 많이 피운다. 이런 상황이 내 입장에서는 거의 탄압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 하필 결혼을 했다. 부자 부모를 두거나 돈을 웬만큼 벌지 못하면 서울에서 집 구하기가 어렵더라. 의아한 건 왜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광화문시네마의 다른 작품에 계속 참여해왔지만 메인 연출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이전 작업과 어떤 차이가 있던가.
=원래는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냥 친한 사람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고, 한가하게 맨날 사무실에 모여 있다가 누군가가 영화 들어가면 도와주고 하는 일에 보람이 컸다. 그런데 그들이 영화를 찍을 때마다 생각보다 잘되고 하나씩 떠나가더라.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투자를 받아오고, 다른 영화와 비슷한 방식으로 스탭을 꾸렸다. 그래서인지 안재홍, 박지영 등 예전 광화문시네마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기쁜 마음으로 현장에 와서 한컷씩 찍고 가는 것이 굉장히 고맙더라.
-특별출연뿐만이 아니라 미소를 연기한 이솜도 <범죄의 여왕>에 출연했던 광화문시네마 멤버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원래는 주인공 나이 대를 30대 중·후반으로 설정했는데, 투자사가 적은 제작비로 유명한 배우를 캐스팅하기 바라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이 대가 내려오게 됐다. <범죄의 여왕> 캐스팅 당시 주변 분들에게 이솜이 ‘굉장히 유니크한 매력이 있고 사람이 괜찮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렇게 솜이씨와 인연이 됐고, 지금까지 함께하게 된 거다.
-미소가 친구 집에 갈 때마다 계란을 한판씩 사들고 가거나, 약을 먹지 않으면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설정이 인상적이다.
=미소는 가진 것은 없지만 멘털은 귀족이라고 생각한다. 또 예의 바르고 착한 친구다. 미소가 생각하는 선에서 가장 실용적이고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음식이 계란이라고 봤다. 캐릭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방문 선물이었던 것이다. 염색을 한 것처럼 보이는 미소의 머리는 영화에 엣지를 주기 위해 넣었다. 원래 엣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한다고 작품에 엣지가 없는 것은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현실 문제에서 시작한 작품이지만 집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미소의 태도는 가끔 현실성을 결여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현실에서 미소의 밴드 친구들처럼 무언가를 하나씩 포기하며 살지 않나. 그들이 영화에서 현실성을 보여준다면 미소처럼 비현실적인 인물이 있어야 영화가 재밌을 것 같았다. 이게 아주 신선한 주제도 아니고, 계속 현실만 보여주면 영화를 보면서 지치지 않을까. 어떻게든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이 캐릭터를 통해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소공녀>의 영어 제목인 ‘Microhabitat’는 ‘미소 서식지’라는 뜻이다. ‘미소’는 미생물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그런 그가 자기 살 곳을 찾아다니는 설정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도시에서도 인간은 서로에게 서식지가 되어줘야 한다. 미소가 있는 곳이 서울이 아닌 시골이었다면 친구가 찾아 왔을 때 다들 영화에서처럼 불편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서로에게 공간이 되어주는 여유가 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영화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수학을 잘해서 이과에 갔고, 집에서 2시간 거리인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지내다보니 굉장히 외로웠던 것 같다. 당시 유일한 위로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건국대학교 영화·애니메이션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다 졸업 후 광화문시네마를 만들었다. 영화 관련 회사에 취직하거나 감독 입봉에 도전하는 것과는 좀 다른 행보다.
=일단 보통 회사는 나와 너무 안 맞았다. 광화문시네마를 처음 만들었던 계기도, 상업영화의 기회를 잡는 것이 어렵다보니 우리끼리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지금도 어떻게 하면 상업영화를 하지 않고 먹고살 수 있나를 고민한다. 상업영화를 하려면 눈치를 많이 보아야 하니까 아직은 관심이 안 가더라. 배고프면 할 수도 있지만. (웃음)
-영화 속 미소처럼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성격처럼 보인다.
=반대다. 지금의 난 미소같이 못한다. 좋은 집에 살고 싶어서 먹는 것을 줄인다. 내가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캐릭터를 보고 싶어 미소를 만들었다. 미소는 내가 생각하는 용기를 가진 인물이다.
-20대 때는 어땠나.
=직진하는 청춘이었다. 지금은 청춘의 절반이 날아갔고, 절반은 남아 있는 상태다. 지금의 나는 더 나은 집에 살고 싶어서 식비를 줄이지만 미소처럼 여전히 친구를 좋아한다. <소공녀>는 나의 청춘이 마저 마비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모아 만든 작품이다. 이게 내 나이 대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 같다.
<소공녀> 시놉시스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미소(이솜)는 아무리 궁핍하게 살아도 위스키, 담배, 그리고 가난한 웹툰 작가 지망생인 남자친구 한솔(안재홍)만은 포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담뱃값이 2천원 올랐을 때 월세로 살던 집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미소는 학창 시절 함께 밴드로 활동한 친구들을 찾아가 짧게나마 신세를 지고, 계란 한판과 집안일을 제공한다. 그가 만나는 친구들은 가장 뜨거웠던 청춘을 이미 지나보낸 이들의 다양한 얼굴이다. 링거를 맞아가면서까지 회사 일에 전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요리에 재능이 없는 친구는 시부모의 눈치를 보며 산다. 부자 남편을 만나 풍족하게 살며 자식이 살면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라 말하는 친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