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동 연립주택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사건의 범인을 반드시 자기 손으로 잡겠다는 이 사람. 그런데 형사도, 젊은이도 아닌 70대 노인이다. 그가 팔 걷어붙이고 사건에 매달린다. 백윤식은 전직 형사 박평달(성동일)과 팀을 이뤄 사건 조사에 착수한 동네 터줏대감 심덕수로 분해 영화 전체를 이끈다. 노인이 주인공이고, 노인이 액션을 하고, 노인이 전면에 부각되는 독특한 시도. 액션 스릴러로 볼 때 가장 멀리 해야 할 ‘삐그덕거리는’ 설정에 백윤식은 과감히 자신의 필모그래피 한줄을 내놓는다. <지구를 지켜라!>(2003)부터 우리가 보아온, 이후 단 한번도 정형화되지 않은 백윤식이라는 배우의 존재감만이 줄 수 있는 최상의 도전이다.
-늘 일반적 의미의 ‘아버지’ 유형의 캐릭터에서 비껴나는 선택을 한다. 스크루지를 형상화한 것 같은 심덕수 역시 개성이 강한 캐릭터다.
=지금까지와 또 다른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전의 한국영화에서 미처 다루지 않았던 캐릭터를 그렸다는 점이 내게도 신선한 자극이 됐다. 어릴 적에 명국환이 부른 <아리조나 카우보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원작자가 그 오래된 유행가의 정서를 알고 있었고, 심덕수 캐릭터에 그 이미지를 넣었더라. 이 사회의 보안관, 정의의 사나이 같은 거다. 나이는 들었지만 정의를 위해 몸을 불사르는 카우보이 같은 모습이 너무 멋지더라.
-심덕수는 괴팍함이 극에 달한 비호감 캐릭터다. 자신이 가진 가치관, 살아온 철학을 신봉하고 그걸 타인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고, 가르치려 든다. 한국 사회가 가진 노년층과 젊은 계층의 이분법적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캐릭터인데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나.
=다들 열심히 살지만, 열심히 산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닌데. 사회가 가진 틀과 한계가 있는데, 그 사람은 그걸 인지하지 못한다. 원작에는 심덕수가 고집불통에다가 소통하지 못한 전사가 그려졌다. 한국전쟁 때 동생이 자기 실수로 죽게 되고, 그러면서 생긴 트라우마들이 표현된다.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가면서 심덕수를 그려보았다.
-외형적인 면에서는 기존의 ‘노인’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구부정하거나 어눌한 말투를 쓰는 대신, 여전히 ‘나는 젊다’는 걸 말투나 의상 등에 표현해나간다.
=대개 나이 먹은 사람은 말도 느릿느릿하고 행동도 느리다, 그리고 마치 세상사에 달관했다는 전형적인 틀을 가져간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 심덕수는 당뇨는 있지만 활동성이 강한 인물이다. 의상, 소품은 전문 파트가 거의 완벽하게 준비를 해줬다. 요즘 내가 느끼는 건, 정말 배우는 연기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만 잘하면 되는 거다. (웃음)
-자기 것만 챙기던 심덕수가, 월세 밀리는 ‘205호’(김혜인)를 구하러 몸을 불사르는 변화를 무리 없이 표현해야 했다. 심덕수의 심경 변화를 어떻게 표현하려 했나.
=애초 마음은 연립주택 건물주로서, 자기 건물에서 자꾸 사고가 나니 좋을 게 없었을 거다. (웃음) 그는 월세를 독촉하는 입장이지만 205호에 사는 젊은 여성이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데도 어머니를 돌봐야 해서 잘 안 풀리는 걸 한켠으로는 짠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편집됐는데, 내가 그 마음을 대사로 표현하는 장면이 있었다. 대본을 읽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 관객이 감동해야지, 배우가 울면 안 되니 그 감정을 잘 조절해서 어느 선까지 표현할지 고심을 많이 했다.
-중반부의 계단 액션부터, 후반부의 비 내리는 진창에서의 액션까지. 액션에 관한 한 거의 자비가 없이 끝까지 간다. 굼뜬 동작과 느린 달리기지만 지치지 않고 물고 늘어지는 액션을 소화했다.
=계단 신은 처음에는 대역이 했는데, 아무래도 배우가 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 감독은 내 상태를 걱정해서 대역을 썼다는데, 아무래도 직접 재촬영을 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계단이 가파르긴 가파르더라. (웃음) 비오는 장면은 지난해 11월 이맘때 비를 흠뻑 맞으며 밤새고 찍었다. 진창에서 구르는데, 비는 계속 뿌리지, 흙이 코로 입으로 다 들어가지. 넘어지면서 잔돌들이 막 박히지. 그런 고생을 했는데 고생한 만큼 만족도 크다.
-함께 출연한 조달환 배우가 마스크부터, 연기 태도 등 모든 걸 본받고 싶은 대선배라는 존경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심덕수를 통해 점점 나이와 연륜이 쌓이는 배우로서의 책임감도 되새김해보게 될 것 같다.
=나이를 먹는 것도 인생의 흐름이고, 순리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다. 세월이 흐르는 걸 어쩌겠나. 거기 걸맞게 좋은 모습을 찾고, 자기 생활을 멋지게 운영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남는다. 후배들이 내가 활동을 오래하는 걸 보고 좋아하더라. 배우의 활동 폭을 확장시켜준다는 의미일 거다. 내가 나를 이렇게 평가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배우로는 독특한 존재감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업계에서도 나를 아직까지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나. (웃음) 힘은 들지만 이 일은 늘 재밌고 자극이 되고 보람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