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취재를 못하게 해!” 박종철 열사의 부모가 아들의 유해를 강물에 흩뿌릴 때 먼발치에서 그 풍경을 지켜보던 윤 기자(이희준)는 기자들을 통제하는 형사들을 향해 분노한다. 윤 기자의 취재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세상에 알렸고,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윤 기자를 연기한 이희준은 “<1987>과 윤 기자를 통해 내 삶을 반추할 수 있게 됐다. 이 작품을 계기로 내 삶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됐다”고 고백했다.
-6월 민주항쟁 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나.
=하굣길에 최루탄의 매운 냄새 때문에 대학생 형들은 공부는 안 하고 왜 저러는지 불만을 터트렸던 기억이 난다.
-기억이 선명한 편인데.
=<1987> 시나리오를 읽고 당시 있었던 일들을 조사해보니 무시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흔인데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싶어 정말 부끄러웠다.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 곧바로 촛불집회로 뛰쳐나갔다.
-윤 기자는 어떻게 다가왔나.
=이런 기자가 있었는지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당시 겁이 되게 났을 텐데 계속 보도를 하는 걸 보면서 존경스러웠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라도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정말 무서웠을 것 같다. 진실을 알려야 하는 기자로서, 가족의 안위를 지켜야 할 가장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이 많았을 것 같다.
-캐릭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존 인물(<동아일보> 사회부 고 윤상삼 기자)에 대해 조사를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실존 인물의 어떤 면모를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나.
=그가 보도했던 기사들을 많이 구해 읽었다. 신문이 객관적인 정보를 알리는 매체지만 그가 작성한 기사를 보니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더라. 가령 ‘어떤 사건이 이러이러해서 일어났는데 다시 조사해보니 이런 가능성도 있었을 것 같다’는 식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제작 발표회에서 장준환 감독이 윤 기자를 “2D 캐릭터가 아닌 3D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고 얘기한 바 있는데.
=대본에는 정의의 사도처럼 묘사됐지만 캐릭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라면 이런 기사를 쓸 수 있었을까, 가족도 있는데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할까 같은 갈등을 분명 했을 것 같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처럼 표현하려고 했다. 동료 기자들과 술 마시는 장면에서 “아이, 누구는 안 무서워?!”라는 애드리브를 넣자고 감독님께 우겼던 것도 그래서다. 영화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대사는 아니지만 연기하는 입장에서 이 사람도 무서웠다는 감정을 꼭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전작에서 스스로를 캐릭터에 대입해 접근했던 작품이 또 있었나.
=드라마 <유나의 거리>. 드라마에서 맡았던 캐릭터가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데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런 갈등을 늘 했다. 이런 캐릭터를 맡으면 삶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현장에선 어땠나.
=촬영 분량이 15회차였다. 현장에 갈 때마다 거의 모든 배우들을 영화에서 만나게 되더라. “역할이 작은 줄 알았다”고 얘기했더니 의상 스탭이 “오빠가 제일 많이 나온다”고 했다. 현장에 갈 때마다 다른 배우들이 내뿜는 에너지가 무시무시해 경이로웠다.
-매회 각기 다른 배우들을 맞닥뜨리는 상황이 어땠나.
=배우로서 행복했다. 좋은 배우들을 만나면 리액션을 충실히 하면 된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모두 에너지를 확 뿜어내니까. 영화 속 상황이 기자로서는 무서운데 배우 이희준으로서는 너무 재미있었다. 현장에서 내가 가장 많이 놀았던 것 같다.
-최근 필모그래피를 보면 상업영화든 저예산영화든, 역할 비중이 크든 작든 가리지 않고 작업을 많이 하고 있는데.
=아직 철이 안 들었나보다. 시나리오를 읽고 심장이 뛰면 다른 조건은 나중에 생각하려는 편이다. <최악의 하루>(감독 김종관, 2016)도 불과 3회차 출연이었는데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잘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일정이 안 되는 상황인데도 출연했던 작업이다.
-다음 작업은 <마약왕>과 <미쓰백>인데.
=<마약왕>에서는 이두삼(송강호)이 일본으로 마약을 유통할 수 있게 도와주는 부산 밀매업자 최진필 역을 맡았다. 촬영하는 동안 진짜 재미있었다. (웃음) <미쓰백>은 참혹한 세상에 맞선 한지민씨를 지키려는 남자를 맡았는데, 이야기가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