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보같이 보였어?” 시사회가 끝난 직후, 엄정화는 감우성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보는 사람, 가슴 아프라”고 던진 대사에 좌중은 “예상치 못했던 폭소”로 화답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장면에서 감독은 극중 상황과 인물들의 맛깔난 대사를 어긋나게 해놓았고, 관객은 뜻밖의 웃음을 실컷 즐긴 눈치였지만, 정작 엄정화는 얼굴이 화끈거려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긴 10년 만에 출연한 영화, “가슴 졸이고 봤으니”, 주위의 헛기침에도 사레가 들렸을지 모를 일이다.
시사회에서 그의 ‘엄살’은 괜한 것은 아니다. 1993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마누라 죽이기> 등 2편의 영화와 1집 <눈동자>를 연이어 내놓으면서 ‘저울질’을 시도했지만, 상반된 대중의 반응은 ‘배우’가 아닌 ‘가수’의 길을 선택하게끔 강요했다. 이후 ‘서른둘’의 나이를 먹기까지, ‘원기팔팔’한 10대들 틈바구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 댄스가수가 됐지만, 반대로 그의 수중에 허락된 시나리오는 “섹스어필한 역할의” 몇편이 고작이었다. 그랬으니, 영화에 대한 갈증과 허기는 갈수록 커져갈 수밖에….
도중, 슬럼프가 피할 수 없는 역병처럼 찾아오기도 했다. 지난해 봄, 6집 활동을 끝내고나서였다. “추락에 대한 불안함이 밀려왔어요. 여기서 한번 떨어지면 끝이라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가장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 강박관념 같은 것도 있었을 거예요.” 그를 구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뭐든지 즐기면서 하자’는 신조가 다시, 그를 어루만졌다. 그때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다지지 못했다면, 얼마 전까지 영화와 음반활동을 병행했던 ‘이중고’를 감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뒤늦은 ‘러브 콜’은 머쓱했던 모양인지, 우연을 가장해서 그녀를 찾았다. 감우성이 출연하던 <메디컬 센터> 1회분에 얼굴을 내비쳤는데, 그게 유하 감독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다. 당시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던 유하 감독은 “정화가 있었구나”라고 무릎을 쳤고, 10년 전 신인 감독과 배우로 만났던 두 사람의 ‘재회’는 ‘극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엄정화에게는 ‘와신상담’의 시간이었다. 뮤지컬과 드라마의 섭외 요청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도, “감을 잃어선 안 된다”는 판단하에 나름의 ‘워크숍’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골수’ 팬들은 그의 선택을 방해했다. 노출이 심한 영화라는 소문이 파다해서다. 믿음이 없었다면, 그 역시 10년지기 팬들의 성화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감독님이 집에 가서 보라기에 나중에 시나리오를 펴봤죠. 근데 가슴이 철렁했어요. 디테일한 만큼 노골적이었으니까요. 근데 다 읽는 순간, 연희의 행동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이젠 내가 팬들을 설득하러 나서야 하는구나 했던 거죠.”
극중 연희는 ‘자유연애’의 기치 아래 분방하게 즐기면서도, ‘필수결혼’이라는 현실의 조건을 수긍하는 인물. 7집 <화(花)>를 내놓은 직후라, 방송과 촬영을 병행하는 육체적 고달픔도 심했지만, “쉽게 연희에게 공감하지 못한” 고생이 더 컸다. “내겐 없는 감정이 이 인물에게 숨어 있었구나 하면서 어느 순간 푹 빠져드는 게 연기의 맛인데. 연희한테는 처음에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잘하고 있나 확신도 안 서고.”
뭔가를 끊임없이 “발산해야 한다”는 욕심 또한 그를 짓눌렀다. “나름대로 계산을 해서 준비를 해가면, 감독님이 자꾸만 한톤씩 낮추라고 요구하시더라고요. 그게 너무 갑갑했어요. 그래서 많이 싸우기도 한 걸요.” 첫 장면 촬영시만 하더라도 볼살이 통통했는데, 지금은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빠진 것도 모두 그 때문이라고. 그토록 다시 거머쥐길 원했던, ‘영화배우’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었지만, 충만한 휴식을 만끽하는 건 아무래도 영화개봉 전에는 힘들 것 같다는 게 그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