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3③] <1987> 김경찬 작가, 이우정 제작자
2018-01-01
글 : 이화정 | 사진 : 오계옥 |
[빅3③] <1987> 김경찬 작가, 이우정 제작자
이우정 제작자, 김경찬 작가(왼쪽부터).

숨막히고 뜨겁고, 그래서 마침내 울분으로 끓어올랐던 시대. 최규석 작가가 6월항쟁을 소재로 해 그린 만화 <100℃>에는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하지만 사람도 100℃가 되면 분명히 끓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1987년 1월 4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그리고 6월 9일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 열사의 죽음, 청년의 무고한 죽음에 맞닥뜨린 ‘보통 사람들’은 그해 100℃의 온도로 끓어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 민주화의 분수령이 된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1987>은 2016년 겨울, 광장의 승리, 뜨거운 온도가 어디서 발화됐는지 되짚어가는 영화다. 당시 10대의 나이로 그 사건을 목도했던 김경찬 작가와 이우정 제작자에게 30년이 지난 지금, 더 늦지 않게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야 했던 이유를 들어보았다.



김우형 촬영감독, 장준환 감독(왼쪽부터).

-원래 두 사람이 준비하던 사극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이 영화를 먼저 하게 됐다. 6월항쟁은 지난 정권에서 선뜻 진행하기 힘든 소재였고, 초반 투자의 어려움도 컸던 작품이다.



=김경찬_ 사극은 이제 막 쓰기만 하면 되는 때였다. 그때 YTN의 송태엽 선배랑 막걸리를 마시는데, 한마디 하더라. “왜 6월항쟁은 영화로 안 만드는 거야.” 토르의 망치가 뒤통수를 갈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날 바로 이우정 대표한테 조금만 미뤄달라, 너무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고 했다. 이우정 대표가 ‘옳다구나’ 하고 받더라. (웃음) 주변의 영화하는 지인들이 많이 말린 걸로 아는데, 꿋꿋이 버티더라. 나는 PD로 20년간 활동하다 영화를 막 시작한 터라 다행히 주변에서 말리는 지인들이 없었지만. (웃음)



=이우정_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박종철 열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걸 작가님에게 꺼낼까 말까 고민은 했는데 워낙 접근이 어려운 소재라 사극을 먼저 하려고 했다. 그런데 먼저 이 이야기를 하겠다는 소리를 듣게된 거다. 그때, ‘내가 언제 이분한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하는 착각이 들더라. 김경찬 작가가 “내가 같이 하게 된 건 이우정 당신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김 작가가 이 소재를 말했을 때 굉장히 기다리던 친구,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김경찬_ 1987년에 10대를 보냈는데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 나온 <중앙일보>를 실시간으로 봤다. 알고 보니 이한열 열사가 같은 동네에 살았더라.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같은 오락실에 가고, 같은 만홧가게를 간 형이었을 거다. 그때의 충격과 공포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1987>은 그걸 위해서 달려간 영화였다. 내가 그 신문을 보면서 느꼈던 공포를 연희(김태리)를 통해 관객 역시 봤으면 했다. 그것 하나만 정확히 보여주자. 그때가 아니면 못 쓸 것 같더라. 2017년은 예정대로라면 대선이 있었고, 6월항쟁 30주년이기도 했다. 그러자면 2017년 가을이나 겨울에는 개봉을 해야 하니, 시나리오 쓰는 시기가 딱 나오더라.



-원래 제목이 지금의 <1987>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다. 영화는 당시를 살던 다양한 ‘보통 사람들’의 역할을 보여준다. 마치 양파 껍질을 까듯 캐릭터와 그에 상응하는 배우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구성이 신선했다. 영화의 무거운 톤을 상쇄해주어 관객이 한순간도 지루할 틈 없게 만드는 영리한 선택이었다.



이우정_ 2015년 국면에서 볼 때,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87년 6월항쟁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나는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이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을 왜 지금까지 영화화하지 않을까, 항상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든다면 감당할 태도도 필요했고, 김 작가 말처럼 타이밍도 중요했다. 만약 김경찬이라는 작가를 못 만났다면 내 안에서 끝날 고민이었다. 영화계에 박종철 열사 프로젝트도, 이한열 열사 중심 프로젝트도 따로따로 있었지만 김경찬 작가처럼 박종철 열사에서 시작해 이한열 열사로 끝을 맺는 그런 구성,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어느 기획보다 새롭더라. 심지어 작업 속도도 엄청 빨랐다. 초고가 한달은 걸리겠지 했는데 2주 만에 ‘다 썼다’고 연락이 왔다.



김경찬_ 독립 PD로 생활하면서 기획, 제작, 각본, 출연까지 하다보니 뭐든 빨리 하는 편이다. 시나리오 쓰려고 자료 조사를 하면서 알았다. 왜 영화계가 이 이야기를 지금까지 못 만들었는지. 이야기 자체가 사건 중심인 데다 인물이 너무 많다. 주요 인물이 수백명이다. 지금 최순실을 영화로 만들면 3천명은 언급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웃음) 어떤 인물을 선택하고, 주인공은 누구로 할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 프로젝트다. 지금 시대에 맞게 만들려면 결국 선택은 하나였다. 주요 인물을 다수로 두고 릴레이 방식으로 풀어가자. 특히 특정 인물로 가게 될 경우 영화적으로 재밌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역사적 사실과 멀어질 위험이 크다. 아직도 스스로 언론인이라는 생각이 크고, 그 매체만 영화로 바뀌었을 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늘 같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팩트를 난도질하면서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는 게 내 제1 원칙이었다. 주제를 전달하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1987> 촬영현장.

-30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피해를 본 분들, 유족들까지 아픔을 안고 살아 계신다. 그 부분에 대한 주의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어떻게 실제 인물들과 접촉했나. 또 그분들의 반응은 어떻던가.



김경찬_ 최초 접촉한 게 2016년 2월이었다. 이한열 기념관에서 하나 남은 운동화를 복원했고 그것을 복원한 전문가의 세미나가 있었다. 행사 끝나고 나서 관장님에게, 내가 이런 이야기를 써도 되겠냐고 했더니 마음껏 쓰라고 하시더라. 나중에 보니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신 것 같다. 유족들을 만난 건 캐스팅고를 완료하고 나서였다. 그전에 안 보여드린 이유는 하나였다. 영화화한다고 찾아온 유명 감독이나 제작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매번 엎어져서 상처를 많이 받으신 것 같았다.



이우정_ 정말 확실히 이 영화가 들어가게 된 시점에서 유족들과 접촉했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 관계자 양쪽으로부터 컨펌을 받았다. 시나리오에 대해 지지와 지원을 받았고, 그 지지로부터 벗어나지 말자, 왜곡하지 말자는 마음을 다졌다. 그게 어찌보면 이 영화를 만들어온 이유이자 우리 전체가 가진 기본적인 태도였으니까.



김경찬_ 박종철 열사는 형님과, 이한열 열사는 어머님, 둘째누님과 소통했다. 대원칙이 ‘우리 영화로 인해서 유족들이 상처를 받는 건 막아야 한다’였다. 유일한 방법이 진행상황을 알리고, 뵙고 말씀도 듣는 거라 생각해서 처음에는 사소한 것까지 컨펌을 받았다. 그랬더니 “알아서 해라. 왜 일일이 보고하냐”고 하시더라. (웃음) 창작자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셨다. 시사회에 초대했으나 이한열 열사 가족은 아직 영화를 못 봤다. 누님들은 도저히 마음이 안움직인다고 하시더라. 어머님은 아직도 날마다 바뀌신다. 오신다고 하다가도 다음날 전화하셔서 “힘들 것 같아요” 하신다.



-영화 제작 단계에서 촛불시위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실질적으로 제작 과정에서 체감했던 변화가 있었는지, 또 그 변화가 반영되기도 했는지 궁금하다.



김경찬_ 2017년에는 레임덕이 올 거고 그래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가을에 사건이 있었고, 그 시기가 빨리 오면서 많은 고민 지점들이 풀렸다. 장소협찬이나 이런 것들도 수월해진 거다.



이우정_ 내가 철이 없는 건지, 애초 시작할 때부터 당시 정국이 주는 부담은 없었다. 그런데 어쨌든 그 변화가 제작 환경에 준 영향이 컸다. 워낙 소재가 소재다 보니 어렵게 만들게 될 거라고 우리끼리는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이후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더라. 캐스팅이 얼추 될 즈음 최순실 태블릿 관련 소식이 나왔고, 그즈음 투자자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타고난 운명이 그런 거였나 보다.



김경찬_ 운명이 맞다. 고비가 올 때마다 동방에서 귀인이 나타나더라. (웃음) 투자도. 제작도 어려웠다. 누구 하나 주인공이 아닌 이 독특한 구성에, 소재는 소재대로 어렵고 캐스팅도 답이 안 나올 때였다. 그런데 강동원씨가 장준환 감독과 인연이 있고, 자연스럽게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되어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이우정_ 강동원씨의 정확한 코멘트가 이거였다. “제가 누를 끼치지 않는다면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 말 듣자마자 “그럼 뭘 시키지?” 했다. (웃음) 대통령이 ‘역사를 모르면 혼이 비정상’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으니, 앞으로나 뒤로나 답이 없어 보일 때였다. 그땐 저예산으로라도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말 그대로 돌파구가 보이더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인공이 부재한 모험적인 선택인데, 다수의 주인공을 통해 이걸 상업적이자 대중적으로 흥미롭게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중심 악역으로 등장하는 대공수사처의 수장 박 처장(김윤석)의 역할이 컸다.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봤을 때, 그 깊이를 파고들수록 자칫 미화될 소지가 큰 인물이다. 어떻게 톤을 조절했나.



김경찬_ 박 처장은 완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나름 언론사에서 20년을 일했고 취재력 하나는 탁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엔 안 통했다. 평안도 용강 출신에 지주 집안이면, 주변 사람들 증언이 많을 법도 한데 단편적인 에피소드 몇개 말고는 안 나오더라.



이우정_ 박 처장은 그 시대를 말해주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 인물 안에 당시 군사정권이 가진 폭력적인 속성, 레드 콤플렉스라는 내적 트라우마를 상징화하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모두 그 이데올로기 하나로 정권을 유지하던 세상이었다. 영화에서 이들을 상징화할 인물이 필요했고 그 대상이 박처장이었다.



김경찬_ 박 처장이 복잡한 게, 가령 박정희 시절에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게 있었다. 대통령 욕하면 끌고 가서 금방 ‘빨갱이’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그 시절에 유일하게 그 사람만 막걸리 보안법을 싫어했다고 하더라. 진짜 빨갱이가 아닌 사람을 빨갱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폭력은 마구 행사하는 사람이었다. 전두환이 86년 들어, 중요한 시기이니 치안본부장을 하라고 그에게 제안을 했는데 그것도 거절했다고 한다. 자기는 영원히 대공수사처에 남을 거라고.



이우정_ 치안본부장은 잘릴 수 있지만, 대공처장은 보다 센 물리력을 가졌다. 반짝 더 주목을 받기보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다 들어 있는 인물인데,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칫 잘못하면 이 사람을 미화하게 되고, 또 그런 디테일들을 빼버리면 너무 밋밋한 악당으로만 남겠더라. 그런 지점이 가장 어려웠다.



김경찬_ 반대의 의미로 연희도 가장 어려웠던 캐릭터다. 나머지는 실존 인물들로부터 차용했다면 연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한 인물이다. 그런데 창작한 인물들을 실존 인물과 붙이려고 하니 잘 안 붙는 거다. 한병용(유해진)의 조카로 관계를 설정하기까지 정말 많은 과정을 거쳤다. 대사 한마디라도 혹시 이질적인 건 아닐까 다듬고 또 다듬었다.



이우정_ 당시 사건에 말리지 않았던 일반인들의 표상이 연희였다. 정말 그 시대의 수많은 연희들이 있었고, 또 연희를 통해서 지금의 관객도 그 시대를 봐줬으면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이었다.



<1987> 촬영현장.

-시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한 ‘나비효과’의 긍정과 달리, 당시 운동권 내부에서는 갈등이 적지 않았다. 군부독재, 공포정치를 일삼은 5공 정권을 와해시킨 6월항쟁 이후에도, 정권 이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암울한 현실이 줄을 이었다. 다시 영화에서 보여주는 한마음 한뜻과 희망적인 대단원과는 상충되는 현실들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김경찬_ 영화의 메인 테마는 6월항쟁이지만 내가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궁극적인 것은 직업윤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 사람들의 직업윤리가 깨지기 시작했다. 그전만 해도 어떤 윤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면 “우리가 이런 거 해도 돼? 안 되잖아”, 이런 자기 점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들 다 하는데 뭐” 이러는 거다. 사람들의 윤리가 무너지는 게 눈으로 보이더라. 영화는 자기 직업윤리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는 구조다. 영화 속 검사나 의사 같은 사람들은 권력의 압력에도 자기 직업윤리를 지킨 사람들이다. 교도관 한병용은 직업윤리로 봐서는 불법인데, 대의를 위해 그걸 버린 사람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대한민국을, 민주주의를, 후대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기념비적인 이야기면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어떻게 살아갈지 답을 구했으면 했다.



이우정_ 6월항쟁은 명백한 승리의 역사다. 정치적 거두들이 분열되면서 그들은 실패했지만, 이게 국민들의 실패는 아니다. 국민의 힘에 의해 무력으로 통치하던 세력들이 함부로 국민을 대하지 못하게 됐고, 그 체제를 통해서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항쟁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김경찬_ 전세계 역사를 뒤져봐도 민주주의 70년사에 세번의 혁명을 거친 건 우리나라밖에 없다. 2016년 촛불시위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전부터 가진 모순이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87년 승리의 기억이 2016년 촛불시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 승리의 기억이 있어서 우리가 광장에 설 수 있었던 거다. ‘권력 별거 아니야, 우리가 나서면 이겨나갈 수 있다’는 마음을 먹게 된 거다. 우리 모두 지난해에 경험을 해봤다. 200만명이 한목소리로 하나의 언어를 외칠 때, 그 찬바람에도 등줄기에 땀이 차오르는. 관객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영화가 아니라 몸속에 가진 그때의 경험을 되새김질하면서 호응하길 바란다. 우리는 그 기억 속에 있는 작은 단초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우정_ <1987>에서 하이라이트가 결국 마지막 광장이 되는 이유다. 이 영화의 힘은 결국 당시 광장에서 <아리랑> <애국가>를 부르며 투쟁하던 시민들의 뜨거운 에너지다. 승리이자 환희다. 그게 지금을 사는 내게도 힘이 되어주고, 이런 감정이 관객에게도 전달되는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



이우정 우정필름 대표는_ 노근리 학살사건을 소재로 한 <작은 연못>, 한국전쟁 최후의 격전지를 그린 <고지전> 등의 제작에 참여해왔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그를 ‘한국 근현대사와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고, 스스로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소양이 뛰어난 사람’이라 칭한다. “중요한 건 역사를 다룬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고 그를 통해 현재를 생각하는 그런 소재를 끊임없이 찾을 뿐이다.”



김경찬 작가는_ 마트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카트>와 뺑소니 전담반을 그린 형사물 <뺑반>(2018년 개봉)의 각본에 참여했다. 방송 PD로 근 20년간 활동하다 시나리오작가로 전향했다. 뒤늦게 영화를 시작했지만 ‘방송 경력을 살린 또 다른 시각의 각본을 쓸 수 있지 않을까’하는 포부가 남다르다. “내 폴더에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역사적 순간들이 13가지 정도 있다. 주로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 백성, 민초들이 이기는 승리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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