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드 투 킬>
Dressed to Kill /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 / 1980년
브라이언 드 팔마만큼 오마주나 레퍼런스를 기꺼이 수용하는 감독도 없을 것이다. 흔히 그의 이름 앞에 “모방”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브라이언 드 팔마는 과거 작가들의 스타일을 수용하며 자신의 호흡으로 새로움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특히 <드레스드 투 킬>에서 그는 자신이 광팬임을 밝힌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에 대한 오마주이자 장 뤽 고다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의 영향을 드러낸다. <드레스드 투 킬>은 양성을 가진 정신과 전문의 엘리엇(마이클 케인)의 환자 케이트(앤지 디킨슨)의 살해를 둘러싸고, 목격자인 리즈(낸시 앨런)가 결백을 증명하려 나서는 스릴러. 자신의 인격을 여성인 보비가 지배하면 여인들을 습격하는 살인마로 변모한다.
<드레스드 투 킬>을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는 영화 초반, 엘리엇이 케이트를 엘리베이터에서 처참히 살해하는 장면이다. 면도칼에 잔인하게 난자당하는 강렬한 장면은 이후 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의 강렬한 액션 신으로 재연된다.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는 면도칼 대신 구둣발로 뭉개는 엘리베이터 장면을 통해 드라이버의 분노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올드보이>(2003)의 학교 시퀀스를 찍을 때 <드레스드 투 킬>을 분명히 의식하고 찍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노아 바움백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드 팔마>(2015)를 연출했으며, 자신이 “<드레스드 투 킬>과 <침실의 표적>(1984)를 보고 자란” 드 팔마의 팬임을 밝혔다.
<용호풍운>
龍虎風雲 / 감독 임영동 / 1987년
홍콩 누아르의 세계에서 오우삼과 두기봉의 이름만을 기억하고 있다면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바로 임영동이다. 소위 갱단을 전멸하기 위해 심어놓은 경찰을 그린 ‘언더커버’ 영화의 레퍼런스를 한편 꼽으라고 한다면 <용호풍운>이 이후 영화들에 끼친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펄프 픽션>(1994) 홍보차 국내에 왔을 때, 전작 <저수지의 개들>(1992)이 <용호풍운>의 표절이 아니냐는 질문을 듣고 “<용호풍운>을 훔쳐왔다”고 공인한 건 유명한 일화다. 임영동은 <용호풍운>은 이후 <감옥풍운>(1987), <학교풍운>(1988), <성전풍운>(1990) 등 다채로운 ‘풍운’ 시리즈를 만들었다. 영화는 한 비밀경찰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의 자리를 대신해 임무를 받은 추(주윤발). 처음엔 어려움에 고사했지만,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갱단에 동화된다. 조직의 보스인 호(이수현)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된 추가, 마지막 보석상을 털던 중 경찰의 습격을 받고 오히려 그를 지켜주는 모습은 추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수지의 개들>에서 미스터 오렌지(팀 로스)와 미스터 화이트(하비 카이텔)의 설정은 추와 호의 관계와 거의 유사하다. 추가 자신의 조직을 파멸시키러 온 경찰임을 알고도 그를 제거하지 못하고 끝까지 그를 믿고 자신이 잡혀가는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은 <저수지의 개들>에서 오렌지를 보호하려는 화이트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갱단과 비밀경찰 사이에 싹튼 우정과 비극을 그린 설정은 이후 <무간도>(2000)로 이어졌으며, <신세계>(2012),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6)의 인물 설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용호풍운>은 홍콩 누아르를 대표하는 숨겨진 걸작 중 하나다.
<어셔가의 몰락>
House of Usher / 감독 로저 코먼 / 1960년
‘가능한 한 싸게, 빨리.’ 영화를 만드는 데 도가 튼 로저 코먼의 영화 이력에서도 유독 두드러지는 작품은 고딕 호러 영화의 계보도 안에서 읽히는 <어셔가의 몰락>이었다. 고딕풍의 집의 재현, 유럽적인 색채 촬영, 조명, 시네마스코프 화면비, 흑백이 아닌 컬러영화 등 코먼 영화 중에서도 제작비를 많이 들인 작품이기도 했다. 특히 하우스 호러 영화로 이 영화가 보여준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괴물이 나오지 않는다”라며 흥행을 걱정한 AIP 사장 샘 아르코프에게 코먼은 “그 집 자체가 괴물이야”라고 말했는데, 영화가 흥행하면서 쏠쏠하게 재미를 보았다. 로빈 우드는 토브 후퍼의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1974) 등에서 보여지는 폐가의 이미지는 <어셔가의 몰락>의 영향 아래 있다고 분석한다. 코먼이 제작으로 참여한 <박스카 버사>((1972)를 연출한 마틴 스코시즈는 “<어셔가의 몰락>이 그 시절 희귀한 미국 예술영화 중 한편”이라고 말한다. 팀 버튼은 어셔 역의 빈센트 프라이스에 대한 애정으로 단편만화영화 <빈센트>를 만들었으며, 이후 <가위손>(1990)에 가위손을 발명한 발명가로 그를 출연시키기도 했다.
<수라설희>
修羅雪姬 / 감독 후지타 도시야 / 1973년
여성 복수극의 계보도를 말할 때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영화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감옥에서 태어난 유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능욕한 패거리에 복수하기 위해 원수들을 찾아가 차례로 단죄한다. 유키는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내달린다. <수라설희>의 캐릭터 설정, 액션 시퀀스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시리즈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타란티노는 유키 역의 배우 가지 메이코의 열렬한 팬임을 밝혔다. 특히 <킬 빌>의 백미인 마지막, 설원 위에서 펼쳐지는 브라이드와 오렌의 결투 장면은 <수라설희>의 엔딩 신을 연상시킨다. 타란티노는 오렌이 브라이드의 검에 죽음을 맞는 순간의 음악을 가지 메이코가 부른 <수라의 꽃>을 선택함으로써 이 장면의 출처를 명백하게 밝힌다. <솔트>(2010), <한나>(2011), <콜롬비아나>(2011) 등 여성 복수극의 전사들의 고독한 운명, 액션 병기에 가까운 모습은 <수라설희>와 이 영화를 바탕으로 한 <킬 빌>의 변주라고 봐도 무방하다.
<디어 헌터>
The Deer Hunter / 감독 마이클 치미노 / 1978년
<디어 헌터>는 베트남전 묘사를 바꾼 기념비적 영화였다. 전쟁이 남긴 참상의 현장 후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지옥의 묵시록>(1979), <플래툰>(1986), 한국영화 <하얀 전쟁>(1992)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고발되었다. 특히 베트콩의 포로가 된 스티븐, 닉, 마이클이 러시안룰렛을 강요당하는 장면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은 이들의 상처가 얼마나 곪아 있는지 보여준다. <첩혈가두>(1990)에서 오우삼 감독은 <디어 헌터>의 러시안룰렛 장면을 대놓고 가져다 썼다. <쓰리 빌보드>(2017)에서도 <디어 헌터>의 인물들이 겪는 상처를 차용한다. 샘 록웰이 경찰차 안에서 “마우”를 외치는 장면 역시 <디어 헌터>의 러시안룰렛 장면에서 가져왔다. 마틴 맥도나와 주연배우 샘 록웰은 “마이클 치미노의 열렬한 팬”임을 밝히기도 했는데,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가 머리에 밴디지를 두른 모습은 <디어 헌터> 속 닉(크리스토퍼 워컨)의 모습을 가져온 것이다.